***중국 최고의 ‘월병’ 제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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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중에 술 한 병이 생겼다. 강태공은 흐르는 개울물에 술을 다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그 물을 수백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나누어 마셨다.(‘사기’ 중 ‘태공세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문화와 풍속을 비교하여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동소이’ (大同小異:크게는 같고, 작게는 다르다)이다. 그 좋은 예를 하나만 들라치면 두 나라 모두 설과 추석을 주요 명절로 쇤다는 것이다(대동). 하지만 중국은 한국보다 설을 훨씬 중시하여 일주일 이상의 긴 연휴를 갖으나 추석은 공식 휴일도 아니고 그저 한국의 송편 격인 ‘월병’ 먹는 날로 통한다(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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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병은 호두나 땅콩 팥앙금 등 단것과, 고기라든가 짭짤한 콩 등 지방마다 각기 다른 속으로 다양하게 채워진다. 월병을 먹고 월병을 선물로 주고받는 날, 추석 대목이 오기만을 고대하는 업체는 월병 제과점들이다. 중국의 대표적 월병 제조전문점의 하나는 베이징 왕푸징(왕부정:王府井) 북서쪽에 있는 다오샹춘(도향춘:稻香春)이라는 제과점이다.
그 집의 창시자 장선롱(장삼융:張森隆)은 1914년 상하이에서 찻집 사환일을 그만두고 혈혈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리고는 왕푸징 동안시장에 불판을 하나 내걸고 ‘눈썹고기만두’라는 노점상을 열었다. 만두를 현장에서 구워서 현장에서 팔았다. 손님들은 입안에 사르르 녹아드는 이 유별난 강남 풍미의 맛에 매료되어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눈썹고기만두로 끌려 갈 만큼 인이 박혀갔다. 이렇게 베이징 바닥에 발을 붙이게 된 장선롱은 1915년 다오샹춘이라는 월병 등 중국 전통 과자와 빵을 구워 파는 제과점을 열었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남방 풍미의 과자나 빵을 만드는 조리사를 구하기 힘들었다. 남방 각지에서 유명한 제과제빵 조리사를 초빙해야 했고, 그렇게 남방 특유의 맛깔스러운 과자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들 전문 제과제빵사는 각종 전통 과자나 빵에 세련되고 독보적인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아삭아삭한 빵거풀이 혀끝에 감도는 맛이 별스러운 다오샹춘의 제품은 유별나게 까탈스러운 베이징 사람들의 혀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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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푸징 동안시장**
다오샹춘이 독특한 경영기법으로 동업자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며 오늘날도 중국 제과업계의 모델이 되고 있다. 다오샹춘은 경영의 선결요건을 인화단결로 삼았다. 인화단결을 기반으로 애사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복리후생과 평안한 근무 분위기 조성에 최선의 배려를 하였다.
다오샹춘은 오전 9시에 문을 열고 밤 12시에서 문을 닫았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근무시간이 하루 14시간이나 되었다. 당시 평균 노동시간보다 50퍼센트 가량 많은 것으로 매우 보기 드문 경우였다. 이유는 다오샹춘의 과자와 빵이 없어서 못 팔 만큼 영업이 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다른 제과점에 비해 보수를 50퍼센트 이상 더 주었다. 종업원들도 보수를 50퍼센트 더 받고 50퍼센트 더 일하길 원하였고 주인도 50퍼센트의 더 지불하는 인건비에 비해 수십 배의 이윤을 남길 수 있어 좋았다.
다오샹춘에는 특별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식사시간을 인화단결을 핵심으로 하는 인적자원관리의 최적시간으로 활용하는 거였다. 옛날 중국 식탁은 원형이나 정방형이다. 정방형의 식탁의 경우에는 북쪽은 윗사람이 앉고 남쪽은 아랫사람이 앉는다. 남쪽자리의 왼쪽이 말석으로 신분이나 지위가 가장 낮은 사람이 앉게끔 남겨두곤 한다.
그러나 다오샹춘의 주인은 언제나 이 말석에 앉아서 종업원들을 대접하였다. 주인은 항상 세 끼를 종업원들과 같이 먹는다. 각종 맛있는 요리가 풍성히 차려진 식탁에는 절대로 술을 내놓지 않는다. 종업원들이 술에 취하여 실수할까봐 그랬고 장사에 영향을 끼칠까봐 그랬다. 주인은 종업원들에게 일일이 차를 손수 따라 주고 맛있는 반찬을 챙겨주며 노고에 고맙다는 말로 격려를 해준다.
이는 보기에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 같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먹기 위해 일할 때 다오샹춘의 주인은 돈을 벌기 위해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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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이 넘치는 업체**
강태공이 문왕에게 얘기했다. “낚시에는 세 가지 묘미가 있습니다. 미끼로 물고기를 불러모으는 방법은 왕이 보수로 인재를 채용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미끼를 달면 좋은 물고기가 잡히듯이 좋은 조건으로 대우하면 훌륭한 인재들이 모이는 겁니다. 또 물고기가 끌려와서 잡히는 것은 인재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하는 것과 같고, 물고기의 크기에 따라 미끼를 조절하는 것은 임금이 인물의 능력에 따라 알맞은 지위나 일을 시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왕은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싶었다. 이에 강태공은 또 “왕이 어질지 못하고 무능하면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 할지라도 얼마 가지 않아 반드시 흩어집니다. 그러나 왕이 유능하면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제각기 위치에서 성심성의껏 보필하여 천하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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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췌이화로우(췌화루:萃華褸) 반점은 베이징을 대표하는 5대 반점의 하나다. 산둥출신의 요리사 손중차이(손중재:孫仲才)가 중국의 명동 왕푸징 북동쪽에 이 반점을 개업한 해는 1940년으로 올해 나이 환갑이 넘은 노반점이다. 손중차이는 자신의 업체를 직무의 세분화,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 그리고 강태공의 ‘세 가지 낚시’의 교훈을 명심해서 절도 있게 경영하여 나갔다.
지금도 췌이화로우의 경영방식과 식당 내부의 분업 운영방식은 수많은 중화요리집의 교과서로 삼고 있는 것이기에 아래 자세히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오늘날 왕푸징 58번지에 위치한 췌이화로우 반점은 원래 5층건물이었다. 꼭대기 층은 뾰족한 탑 같은 모양으로 다락방이 한 개 들어 있었다. 사장(총경리:總經理) 손중차이는 바로 그 방을 사령부 삼아 음식점의 모든 일을 총지휘하였다.
4층은 5층보다는 서너 배 가량 넓었다. 거기서 부사장(부총경리) 여러 명은 반점의 일상 업무를 사장의 명을 받아 집행하고 장궤이(장궤:掌櫃)와 각급 종업원을 지도 감독하였다.
3층은 궤이(櫃)로 부르는데 부유층 손님용 방 몇 개와 경리와 회계를 맡은 장궤이의 사무실이 있었다. ‘궤이’의 좁은 뜻은 ‘돈 궤’ 또는 ‘카운터’라는 뜻이지만 넓은 뜻으로는 ‘권한의 범위’를 말한다. 장궤이는 권한을 가진 지배인을 뜻하며 현재의 매니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장궤이는 사장과 부사장의 명을 받아 자세한 사전 계획과 분석을 통한 예산의 회계, 감사 등 엄격한 관리통제를 실행하였다. 매니저도 권한이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듯 장궤이도 그랬다.
2층은 주방과 주로 중산층 손님이 머무는 방이 예닐곱 개가 들어 있었다. 주방은 다시 부뚜막과 아궁이를 뜻하는 ‘짜오’(조:조)와 싱크대와 도마를 뜻하는 ‘안’(案) 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짜오’는 ‘장짜오’(장조:掌조) 또는 ‘훠토우’(화두:火頭)라고 하는 우두머리가 지휘한다.
‘알훠’(이화:二火)는 지지고 볶는 일을 주로 맡고 ‘산훠’(삼화:三火)는 알훠를 돕고 ‘스훠’(사화:四火)는 채소를 삶고 국을 끓이는 일을 도맡는다. 제일 초심자인 ‘우훠’(오화:五火)는 찌는 일을 맡는데 절대로 찜통을 떠나서는 안 된다.
도마질하는 요리사들 간에도 서열과 분업이 분명하였다. 안(案)은 ‘홍안’(紅案)과 ‘바이안’(백안:白案)의 둘로 나뉘는데 홍안은 닭이나 오리 등 고기류 음식을 조리하는 도마를, 바이안은 주식과 밀가루음식을 빚는 도마를 의미한다.
싱크대와 도마는 ‘토우둔’(두돈:頭墩 : 우두머리 도마)이라 불리는 수석 요리사 곧 주방장이 진두지휘하는데 ‘방안’(幇案)과 ‘랴오칭’(료청:了靑)이라고 불리는 여러 명의 조수가 그를 돕는다. 주방장 토우둔은 음식점을 대표하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낸다. 그 요리에는 주방장의 정성과 솜씨가 가장 많이 발휘되었다.
일반 요리사인 방안은 다시 1급에서 3급으로 서열이 구분되었고,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든지 주방장 옆에서 닭과 오리, 물고기와 새우를 자르며 파와 생강과 배추를 썰든지 한다. 3급 방안 밑에는 랴오칭이라는 초심자들이 설거지와 청소를 맡는다.
1층은 식당 홀로서 ‘탕’(당:堂)이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손님 접대를 맡는 종업원인 ‘파오탕’(포당:포堂)과 그들의 리더인 ‘탕토우’(당두:堂頭)가 배치되었다. 탕토우는 사장과 장궤이가 가장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식당의 문이자 얼굴이라는 뜻으로 ‘먼리엔’(門月僉)이라고도 불렸다.
탕토우는 용모가 단정하고 두뇌가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고 구변이 좋은 최정예직원이었고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고 음식을 시키는 일을 총괄하였다. 탕토우의 목소리는 마치 노랫소리처럼 맑고 시원스러웠으며 장궤이만큼 월급도 많이 받았다.
단골손님들은 그들을 이 음식점으로 끌어들인 것은 이 잘생기고 친절한 탕토우 덕택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동업자들도 “제대로 된 탕토우 하나가 췌이화로우의 절반이다”라고 말하며 부러워하였다.
췌이화로우의 창업자 손중차이는 직무의 세분화와 조직의 공식화라는 두 철권으로 자신의 업체를 리드해나갔다. 즉 노동 분화효과를 극대화하고 규칙, 규정, 표준화된 운영절차에 의해 움직이는 질서정연한 조직체로 발전시켜나갔다.
언뜻 보면 순전한 군대식 경영이다. 하지만 군대는 전공을 세운 자에게는 훈장을 달아주지만 췌이화로우는 좋은 실적을 이룬 자에게 돈을 한다발 안겨주었다. 그곳의 종업원의 보수는 요식업체 중 최고 수준이었다.
사장 이하 모든 종업원의 세 끼 식사는 2층의 중류층 식당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항상 근엄한 표정의 사장도 위의 중국 최고의 제과점 다오샹춘과 마찬가지로 종업원과 식사할 때만은 ‘어깨와 목에 힘을 빼고’ 한데 어울려 먹었다. 단 술은 일체 금지했다.
지금도 베이징 최고의 산둥요릿집으로 손꼽히는 췌이화로우는 2002년 2월 현재 왕푸징의 본점과 3개의 분점까지 해서 모두 49명의 각급의 요리사와 5백여 명의 각층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다.
췌이화로우의 좌석은 사람당 가격에 따라 11개 계층으로 세별하고 있다. 대개 평등과 보편을 내세우고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는 드문 일이다. 한 고급 요리사는 일 년에 몇 번씩이나 일본과 미국 말레이시아 등의 중국 요리점의 초청을 받아 샥스핀과 베이징식 오징어구이요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자랑한다.
산둥요릿집인데도 단골손님은 산둥사람보다는 베이징 출신의 장년과 노년층이 많다고 한다. 서열과 분업을 유난히 따지는 반점 분위기가 점잔과 위엄이 넘치는 그들에게 맞아떨어져서일까? 옛날은 황궁이요 지금은 중국 수도의 시민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그들은 자녀의 결혼 피로연과 자신의 환갑잔치를 이 췌이화로우에서 열기를 고집한다고 한다.
위엄이 겉으로 풍기는 것은 속에 덕이 넘친 걸세(柳柳威儀 維德之隅 : 유유위의 유덕지우, ‘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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