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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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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13>

남이 없으면 나는 있다

***2백60년 연중무휴 업체**
<사진1>
베이징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밀가루(麵) 음식점은 치엔먼(前門) 와이다지에(外大街) 동쪽에 있는'두이추'(都一處)라는 곳이다. 이씨 성의 산시(山西) 사람이 2백60여 년 전인 1738년(건륭 3년)에 문을 연 그 집은'이기'(李記 : 이씨네 상점)라는 글씨를 쓴 호로병을 간판으로 삼았다. 서너 개의 식탁에 규모도 영세하거니와 음식 맛도 변변찮은, 조그마한 목로주점이었다.

한데 그 집은 특별한 데가 있었다. 주인 이씨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문을 열었고 삼경이 넘을 때까지 문을 닫지 않았다. 손님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상관없었다. 다른 주점들이 설날이다 대보름이다 중추절이다 해서 문을 닫을 때도 그 집만은 문을 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번화가였던 터라 중대형 주점과 유명 음식점이 많았다. 새우가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아주 비상하고 특별한 생존 전략이 필요하였다. 요즘 식으로 말해 24시간 영업, 365일 연중무휴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남이 쉬는'시간의 틈새'를 활용한 '이삭줍기'에 나섰다. 명절 한때와 평일의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의'틈새'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그야말로 그 목로주점이 신나게 줍는'이삭'들이었다.

때는 1752년(건륭 17년) 음력 섣달 그믐날 밤, 황성의 차디찬 골목길에 흰눈이 시나브로 내리고 길거리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모든 상점들은 설날을 축하하려고 일찍이 문을 닫았고, 바깥은 폭죽 터지는 소리만이 천하를 진동했다. 그때였다. 낮 동안 단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한 그 목로주점의 문턱을 홀연, 넘어 들어오는 세 명의 손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선비 차림이었고 그를 앞뒤에서 시중을 드는 두 사람은 나이가 지긋했다. 얼굴에 수염이 한 가닥도 없는 둘은 각자 손에 얇은 비단 초롱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건륭 황제와 수행 환관이었다. 그들은 베이징 근교의 퉁저우(通州) 지방의 암행 시찰을 마치고 황궁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궁에서 저녁을 들기에는 야심한 시간이고 해서 그들은 식당을 찾았던 것이고, 문을 연 곳이 한 군데도 없어 결국 이 허름한 목로주점을 찾았던 것이다.

이씨는 '이삭'셋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예나 지금이나 섣달 그믐날 주점을 찾는 손님들 중에는 대체로 연말까지 갚아야 할 빚을 못 갚아 답답한 속을 홧술로 달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데 그 선비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지만 안주라고는 고작 민가의 밑반찬 몇 가지가 전부였으나 그는 어떤 산해진미보다 더 맛깔스러웠다. 술맛 또한 향기롭기 이를 데 없었다. 이내 시장기도 가시고 추위도 녹인 황제의 포만감은 그제야 목로주점에 대한 호감으로 번져갔다.

"이 주점의 명칭은 무엇인고?"
"소인의 성이 이가 인고로 그냥'이기'라고 아무렇게나 부릅니다."

황제는 주위를 둘러보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좀 듣더니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아무 집도 장사를 안 하는 섣달 그믐날, 이 집만은 문을 열었구려, 춥고 배고픔을 가시게 한 고마움으로 내가 이름 하나 지어줄 테니 어떻겠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올시다."
"'서울에 딱 한군데'라는 뜻으로 '도일처'(都一處)라 함세."
황제는 수행원에게 지필묵을 준비하게 한 뒤 그 자리에서 '도일처' 세 자를 써 건내주었다.

그러나 이씨는 그가 여느 대갓집 자제인줄로만 알고는 그리 맘속에 두지는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수십 명의 환관들이'都一處'라 쓰인 호랑이 머리 모양의 간판을 가져왔다. 그믐날 밤의 선비는'이삭'이 아니라 거대한 '용'이었다. 순식간에 온 황성이 떠들썩했다. 황은(皇恩)을 입은 두이추는 삽시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장사는 수십 배로 잘 되었다.

또, 청나라 말엽, 베이징의 유명 주점으로 승승장구하던 두이추는 '샤오마이(燒麥 : 만두소는 만두피로 봉해져 있는데 반하여 샤오마이는 윗부분이 열려 있어 안의 소가 보인다)'라는 회족(回族)식 만두를 도입하여 독특한 '두이추식 샤오마이'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사진2>

***초박의 미미**

1912년 신해혁명으로 황궁의 문이 닫혔으나 두이추의 문은 단 하루도 닫힌 적이 없었다. 1966년 어느 대낮,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일단의 홍위병들을 몰고 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두이추의 모든 손님들과 종업원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예의 건륭황제의 편액도 떼어냈다. 그리고 거기를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추악한 쓰레기를 제거하는 투사인 홍위병의 소대 본부로 접수한다는 대자보를 써 붙였다. 그들은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예 식당 문에다 못질을 하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슬슬 배가 고파진 그들은 주방을 뒤지다 팔다 남은'샤오마이'를 발견하고 금방 먹어치웠다.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다. 그 순간 한 접시에 0.2위앤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표도 눈에 들어왔다.
"이건 부르주아 착취자들이 먹는 값비싼 음식이 아니네, 우리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의 먹거리잖아."
결국 값싸고 맛좋은 샤오마이는 홍위병들로 하여금 낮에 박은 못을 그들의 손으로 직접 빼내게끔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두이추의 문은 다시 열렸다.

중국은 설날을 전후하여 한 이레 동안 문을 닫는 업소가 많다. 2002년 임오년 설날(2월 12일), 아침을 떡국으로 먹은 필자는 점심 무렵 치엔먼 근처 두이추를 직접 찾아가보았다. 거짓말처럼 두이추는 거기 있었고 또 문도 열려 있었다. 3층 건물에 1백20평 정도의 작지도 크지도 않은 식당의 1층 벽 높은 곳에는 아직도 건륭황제가 하사한 호랑이 머리 현판이 걸려 있었다.

"얇은 사(絲) 하이얀 박사(薄絲)"의 밀가루 껍질을 무려 24겹이나 되는 연꽃 주름옷으로 걸치고 등장한'샤오마이'. 필자는 밀가루로 만든 중국 음식 중 그처럼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한 것을 먹어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 '초박(超薄)의 미미(美味)'에 감탄하며 이곳 아니면 어디서 이런 맛을 경험하랴, 북받치는 감동(?)으로 앉은 자리에서 3인분을 먹어치웠다.

<사진3>

식당에서 일한 지 5년이 넘었다는 한 여종업원은 필자에게 중국 사람들이 '베이징에서 최고'(京中之最)라면 으레 두이추의 샤오마이를 두고 하는 말로 알아 들으라며 농담 반 위협 반으로 권장한다. 또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일본인으로부터 각광을 받아 두이추의 주방장이 수차례 일본에 초빙되어 요리 시범을 보여준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될 수 있다." 이런 말을 혹 꺼낸다면 돈을 벌려다 조금도 못 번 사람은 성을 낼지도 모르겠다. 산에서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은 산을 보고만 있다.

돈은 모든 이익과 같이 우선 근면함을 요구한다. 만약 두이추가 날마다 달마다 거의 24시간 문을 열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어찌 황제의 발걸음이 그리로 향할 수 있었겠는가? 또 두이추가 연중무휴의 근면함으로 얻은 행운만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두이추식 샤오마이'를 개발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금의 명성을 얻었겠는가?

근면과 창조, 이 두 가지만 확실하다면'성공의 두이추'도 '딱 한 군데'만 있는 게 아니라 도처에 무수히 널려 있으리라. 두이추에서 먹었던 탓인가, 그날 필자의 가슴은 뱃속처럼 든든해짐을 느꼈다.

***긴 의자 하나 솥단지 하나 **

밀가루로 비칠 듯 말 듯한 실크블라우스를 빚어내려고 한 듯한 '초박의 미미'를 맛보며 로맨틱한 추억말고도 별스럽게 떠오르는 음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동라이순(東來順)의 양고기 샤브샤브, 즉 솬양로우(쇄洋肉)였다.

허베이 창(滄)현 출신의 회족 딩더산(丁德山, 1886~1960)은 14살 때 어린 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하였다. 그들은 동즈먼(東直門) 밖 토굴에 거처하며 성 내 막노동판에서 날품팔이로 연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딩더산은 텐안먼 동쪽 왕푸징(王府井 : 베이징 최고의 번화가. 서울의 명동)에 나갔다가 노점상들과 행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는 장면을 목도했다.

다음 날 그는 솥단지 하나와 긴 의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자릿세로 동전 댓 닢을 지불하고 길거리 밥집을 열었다. 한마디로 무작정 상경에 무작정 창업이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죽과 전병 꽈배기 따위를 팔았는데 이내 값싸고 맛좋은 죽집으로 소문이 금방 퍼졌다. 백리를 멀다 않고 손님들이 찾아왔다. 더러는 그 허름한 노점 앞에서 1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손님들도 있었다. 2년이 채 못 되어 노점은 천막집으로, 천막집은 다시 벽돌을 쌓아올린 제법 번듯한 음식점으로 번창해나갔다.

그 무렵 딩더산은 동라이순(東來順)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간판에는 동(東)즈먼 밖 토굴에서 지내던 그들 형제가 성 내로 들어와서(來) 하는 식당이 순조롭게(順) 잘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간판을 달고부터 동라이순은 간판 이름에 걸맞지 않게 순조롭지 못했다.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의 승리의 과실을 찬탈한 것으로는 부족했던지 황제가 되려고 '베이징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왕푸징 부근의 상가는 전부 불에 타 동라이순 죽집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1912년의 일이었다.

딩더산은 실망은 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자취마저 찾기 힘들만큼 변해버린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났다. 잿더미 위에다 벽돌을 쌓아 식당을 재건하였다. 주 메뉴도 죽에서 양고기 샤브샤브, 즉 솬양로우로 바꾸었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기존 솬양로우 음식점의 철벽을 뚫을 수 없었다. 딩더산은 '어지간'에서 뭔가 '별난 틈새'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결국 양고기의 두께에서 그 틈새를 찾아냈다. 우선 신선하고 질 좋은 양고기만을 엄선하였다. 그런 다음 양고기 한 근으로 무려 팔십 여 겹의 백지장 같은 편육이 나오도록 얇디얇게 썰어냈다. 매미 날개처럼 얇은 편육 사이로 접시 꽃무늬가 아른아른 보일 정도였다.

양고기 1근으로 동라이순은 다른 집의 3근 이상의 가치를 뽑아내었다. 남는 고기 부스러기는 따로 모았다가 다른 용도로 썼다. 딩더산은 레닌의 명언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곧 배신을 뜻한다"가 씌어진 액자를 식당에 항상 걸어 놓았다. 딩더산은 돈을 많이 벌어도 자신의 고단하였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았다. 양고기 샤브샤브 집 곁에다 따로 죽 노점을 벌려서 노무자들에게 거저 주다시피 저렴한 값으로 죽을 대접하였다.

상인이 근본을 잊지 않으면 평판도 얻게 되고 결국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그는 바로 '도리'라는'최고의 상술'을 실천했던 것이다. 해방 전에 벌써 동라이순은 종업원의 수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 식당으로 번창하였다. 긴 의자 하나, 솥단지 하나로 출발한 딩더산은 베이징 양고기 샤브샤브의 대왕이 되었다.

<그림4>

***필연의 행운**

현재 동라이순은 베이징 오리구이점 '췐쥐더'(全聚德)와 함께 베이징을 대표하는 음식점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동라이순의 '순할 순'자는 하늘에서 그냥 '순하게' 떨어진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백전불굴의 정신으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어 '역경'을 '순경'으로 바꿔낸 담금질한 '순'자다.

지금 베이징에는 동라이순말고도 시(西)라이순, 난(南)라이순이 성업중이다. 그들은 각각 1930년과 1943년에 동라이순을 벤치마킹하여 생겨난 음식점들이다. 주메뉴는 솬양로우가 아니라 나름대로 독특하게 개발한 그들의 음식이다. 앞서 성공의 '두이추'가 '딱 한 군데'만 있는 게 아니라 도처에 널려 있듯 순조로움의 '동라이순'도 동쪽에서만 오지 않고 사방 어디서든 올 수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림5>

"남이 없으면 나는 있고, 남이 있으면 나는 우수하다(他無我有 他有我優)"는 중국 전통 상술을 얘기할 때 앞머리에 나오는 잠언 중의 하나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장사를 내가 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장사라면 나는 더욱 특출 나게 하라는 말이다. 꼭 두이추나 동·시·난라이순을 두고 하는 말 같다.

비록 처음에는 규모가 영세하고 제품이 보잘것없더라도 꾸준히 노력하고 창조하면 품질이 우수한 신제품을 창출해낼 수 있다. 그러면 단점도 장점으로 변하고 열세도 우세로 변한다.
원래 시장이란 흠잡을 데 없이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 너는 너의 장사를 하고 나는 나의 장사를 하라. 큰 길은 하늘까지 통하니 각자가 자기 갈 길을 가면 된다. 치열한 경쟁에서 승자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타무아유'의 틈새를 찾고 그 틈새에다 이윤의 바늘을 꽂고 '타유아우'의 발전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성공의 행운이란 우연이 아니라 노력과 창조의 연속선상 , 그 맨 끝에 매달려 있는 '필연의 행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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