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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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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12>

동인당이 살아남은 까닭

<사진1>
***중국의 대표적인 한방제약회사**

전국시대 맹상군의 식객 중에 풍환이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날 풍환은 설국의 백성들에게 빌려 준 돈을 거두어 오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빚이 있는 자들을 한자리로 불러모았다. 풍환은 차용증서를 꺼내어 맞춰보고는 이자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까지 내라는 기한을 정해 주고 가난하여 이자를 낼 수 없는 자의 차용증서는 받아서 불태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상군께서 돈을 빌려준 까닭은 가난하여 자본금이 없는 백성들을 위하여 본업에 힘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자를 받는 것은 식객들을 대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유한 사람들은 기한을 정해 주고 가난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차용증서를 태워 그 돈을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그곳 백성들은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절을 했다. 맹상군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풍환을 불러들였다. 풍환은 빈손으로 돌아온 자신을 보고 화가 잔뜩 난 맹상군을 태연히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빚을 급하게 독촉하여 받을 수 없게 된다면, 위로는 선생께서 이익을 좋아하여 선비나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아래로는 백성들이 선생을 떠나 빚을 갚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니, 이것은 선비와 백성들을 격려하고 선생의 명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을 수 없는 차용증서를 불태워서 설국의 백성들로 하여금 선생과 친하게 하고 선생의 훌륭한 명성을 드러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제(齊)나라 왕은 맹상군의 명성이 자신보다 높고 제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여겨 파면시켰다. 맹상군이 영지로 돌아가게 되자 그를 따르던 빈객들도 모두 떠났다. 그러나 설국의 백성들은 백 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맹상군을 위로해주었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줄여주고 백성들의 인심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풍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인당(同仁堂)은 중국을 대표하는 한방제약회사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알려졌다. 아마 중국을 한번도 가보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도 동인당 세 글자는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그래서 발음대로 ‘통런탕’이라 하지 않고 우리 귀에 익숙한 ‘동인당’이라 쓰겠다).

동인당은 지금으로부터 약 3백50년 전 1669년(강희제 8년) 저장 닝보(寧波)출신의 웨준위(樂尊育)라는 만년 과거 낙방생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닝보는 예로부터 탁월한 상술을 지닌 중국 최고의 상인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이름이 높아 흔히 옛날 우리 나라의 개성에 비견되기도 한다.

웨준위는 연거푸 과거에 떨어지다 보니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었다. ‘이번에 낙방하면 타향의 고혼이 되고 말리라’는 각오로 배수진을 쳤으나 또다시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도저히 그는 고향의 가족과 친지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그냥 베이징에 눌러앉은 그는 한 많은 과거시험장 가까운 치엔먼(前門) 근처에다 ‘동인’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한약방을 열었다. 절반은 호구지책이었고 절반은 과거응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였다.

그의 아들 웨펑밍(樂鳳鳴)도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다. 불행히도 낙방의 대물림 사슬은 끊을 수 없었다. 결국 제2대 동인당의 주인이 된 그는 이왕 부업(父業)을 이을 바에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가업으로 키우겠다는 웅지를 품었다.

그리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전래의 민간 비방과 궁정 비방 그리고 자신이 임상실험을 거친 비방 등 모두 3백62종의 비방을 집대성한 『악씨세대조전배방』(樂氏世代祖傳配方)을 펴냈다.

한편으로 그는 약재의 산지를 중시하되 약재가 아무리 비싸고 조제에 손이 많이 가더라도 절대로 약재를 감량하거나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라는 요지의 엄밀하기로 유명한 동인당의 규장(規章)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동인당의 빈틈없는 품질 제일주의는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널리 인정받아 신용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1723년에는 ‘황실어용약방’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건륭황제는 특히 동인당은 상표를 영원히 바꾸지 말 것과 함께 웨씨 가문의 동인당 주인자리를 세세대대로 보장하라는 칙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세월이 200여 년을 훌쩍 흐른다. 황제도 군벌도 총통도 사라진 중화인민공화국 시절 동인당의 전통은 독야청정 사철 푸른 송백마냥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 했다.

1955년 마오쩌뚱 주석은 당시 동인당의 대표 웨송성(樂松生, 창시자의 13대 손)과 롱이런(榮毅仁, 국가부주석 역임) 단 두 사람에게만 ‘전국민족상공업자’의 대표라는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후일 웨송성은 베이징 부시장과 전인대 대표위원(국회의원)을 3번이나 연임하기도 하였다.

2002년 현재 동인당은 ‘동인당 발전위원회’라는 최고집단지도체제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그 위원회의 대표위원은 동인당 창립자 웨준위의 14대 손인 웨다이(樂達義)가 맡고 있다.

중국 50대 한방제약회사 중 가장 역사가 오래며 규모 또한 제일 큰 동인당은 모두 2백79개 종류의 한약제품을 한국, 일본, 미국, 독일, 호주 등 세계 40여 개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2000년 동인당은 한약제품으로는 중국 최초로 미연방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기도 하였다.

<사진2>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참는다?**

동인당은 ‘타성(他姓) 절대배제원칙’을 견지해왔다. 이는 앞서 말한 중국 최고(最古) 업체 리우삐쥐의 ‘친인척 절대배제원칙’과는 정반대다. 동인당은 타성의 자본과 기술이 동인당에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막았다.

타성의 부하에게 회계장부를 맡기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일을 전부 웨씨 가문이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약재의 구매와 조제와 포제(布製)는 반드시 웨씨 가문이 장악했다. 웨씨 가문으로 시집온 동인당의 모든 여성들은 한약 달이기와 한약 포장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녀들은 약이 다 달여질 때까지 약탕기 앞을 절대 떠날 수 없었다.

동인당은 제자를 키우지 않았고 대리인을 두지 않았다. 또한 자기 자손이 한약업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넘보는 짓을 엄금했다. 이러한 원칙은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서면서부터 어림없는 소리였기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이토록 폐쇄적인 인사 체제의 동인당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세상 사람들의 찬사를 받아오며 번영과 장수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엄선된 재료, 엄격한 공정을 통해 동인당의 제품이라면 소비자가 언제 어디서나 안심하고 복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가짜와 불량품이 많아 ‘가짜 공화국’이라 비아냥 받고 있는 중국에서도 동인당의 약품이라 하면 왠지 듬직하니 믿음이 갈 만큼 신용으로 일관된 정책을 펴왔다.

한약재는 품종, 산지, 가공법, 재배법, 채취시기에 따라 약효의 차이가 많이 나기에 동인당은 산지로부터 최상의 엄선된 약재를 취하는데 각별히 신경을 썼다.

예를 들면 산삼이나 녹용은 구매 책임자가 직접 집산지인 랴오닝 성 잉커우(營口)에까지 가서 구입해오고, 특품의 사향을 구하기 위하여 허베이 성 안구어(安國)의 지정 약종상에까지 달려갔다. 동인당은 제일 좋은 가격으로 대량 구입하였기 때문에 전국의 약종상들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는 최대의 고객이었다.

그리고 한약을 달이는 기구에서부터 약을 우려내는데 사용하는 물은 물론 정결한 포장까지 최대의 약효를 낼 수 있도록 평균 40여 개의 공정에 동인당은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시장경제의 단맛에 매료된 일부 중국 사람들은 동인당이 참 돈 벌 줄 모르는 동네라고 혀를 찼으며 떼돈을 벌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고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동인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냐, “우리는 동인당이기 때문에.” 이 짧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군자 또한 재물을 좋아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얻는다”(君子愛財, 取之有道)라는 중국의 옛말이 있듯 동인당도 물론 정의와 이익을 약저울 접시에 올려놓고 둘의 무게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정의와 이익이 서로 충돌하거나 이익이 정의보다 훨씬 무거울 경우에는 서슴지 않고 약저울 접시에서 이익을 쏟아내 버렸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오늘날의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을 중국의 사회 문화코드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활용하려 든다. 그러나 동인당의 존재는 그런 고정관념에 가차없이 돌을 던지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동인당은 마치 상대 공격수의 깊숙한 센터링을 외곽 멀리 차내버리는, 중국 상업도덕의 스위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나에겐 얼음을, 남에겐 햇빛을**

동인당은 다소 밑지더라도 선과 덕을 쌓아왔다. 동인당 본점에 가보면 대청 벽에 ‘논어’와 ‘명현집’(名賢集)에 나오는 말이 걸려 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德不孤 必有隣
선행을 쌓는 자는 의외의 좋은 일이 반드시 있다
積善之家 必有余慶

즉, 도덕이 고상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은 반드시 이웃의 존경을 받는 법이며 누가 보지 않더라도 선행을 부단히 쌓는 자는 생각지 못한 경사가 반드시 생기는 법이다.

동인당의 역대 주인들은 자손들에게 밑 질 때는 억지로 돈을 벌려고 애쓰지 말고 선과 덕을 부지런히 쌓으라고 가르쳐왔다. 장사를 하노라면 이익도 보고 손해도 보는 법. 한두 푼의 이익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탐심을 버리고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어야만 장기전인 상업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상인으로서 ‘적선의 도’를 지키고 꾸준히 행한다면 언젠가는 고객의 환영과 신임을 받을 것이다.

먼저 고객으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하여 재부와 건강을 저축하게 한다. 사회와 백성들에게 덕과 선을 쌓는 것이 얼른 보기에는 밑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저축’이다. 인심과 인정의 저축은 금전의 저축보다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해준다. 상인은 반드시 먼 앞날을 내다보아야 한다. 목전의 현금에만 눈이 어두워서는 안 된다.

동인당 정신의 핵심은 한마디로 ‘이신구리’(以信求利), 즉 신용으로 이익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업이니 만큼 항상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정제하는 일은 번잡하지만 절대로 공력을 아끼지 말고, 약재는 비싸지만 절대로 감량하지 말라”, “성실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자” 등을 기업의 실천 강령으로 삼아왔다.

동인당은 옛날 과거를 보기 위해 각지에서 상경하는 모든 선비들에게 보약을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객고(客苦)에 지친 그들은 과거 보는 중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아 동인당은 항상 우황청심환이니 안궁환 같은 구급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과거에 급제한 자든 낙방한 자든 동인당의 은혜는 백골난망일 것이다. 이는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중장기적 광고효과를 얻을 수 있는 동인당만의 절묘한 비책이었다.

그러나 동인당은 이런 유산 계급, 상층 계층에만 주력한 게 아니라는데 그만의 특장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법인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속성을 동인당은 극복해내었다.

“나 자신에게는 얼음을, 남에게는 온누리의 햇빛을” 하는 정신으로 품질 및 내부 조직관리에는 엄정하였고 마케팅과 대고객 서비스에는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방위 전천후로 인심에 투자했다.

청나라 때는 우기에 황궁 내의 빗물이 잘 흘러나가도록 백성들은 도랑을 파야 했다. 그래서 밤길을 걷다가 도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인당은 초롱불을 사서 그 위에다 ‘동인(同仁)’이란 두 글자를 써서 불을 밝혀 가로등을 만들어주었다. 그 초롱불 하나하나의 그림자에는 광고의 목적이 짙게 베어 있었지만.

또한 옛날 베이징의 난민들은 늘 추운 겨울이면 거리에서 얼어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새벽이면 시체를 거두어 성 밖에다 내던졌다. 말 그대로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가 썩어나고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가 나뒹구네’였다. 그런데 동인당은 그들에게 여름이면 일사병 예방약을, 겨울이면 솜이불을 무료로 제공했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서자 웬만한 한약 관련 기업은 모조리 싹쓸이 당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동인당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과거 봉건주의 시절에도 동인당은 특이하게도 사회주의 정신과 그 실천에 투철했다’는 것이다.

<사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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