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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에 얽힌 이야기**
중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업체는 어디일까?
말 돌릴 필요도 없이 바로 말해본다면 바로 베이징 대학 가까운 곳에 위치한 리우삐쥐(六必居)라는 식료품 제조업체다. 명나라 가정연간(嘉靖年間, 1530년)에 창건되었으니 대충 짐작에도 춘추 500세에 가까운 초 장수업체다. 오늘도 리우삐쥐는 여느 젊고 튼튼한 기업 못지않게 활발한 생산과 경영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리우삐쥐는 원래 주점으로 출발하였다. 이곳의 초대 주인은 술맛을 향기롭게 하기 위하여, 반드시'必(필)'자가 들어간 6개의 필수사항을 주점의 창립 규장 제1조로 명문화하였다.
첫째 양곡은 반드시 골라야 하며, 둘째 누룩은 반드시 좋아야 하고, 셋째 그릇은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 넷째 술병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며, 다섯째 연료는 반드시 충분해야 하고, 여섯째 샘물은 반드시 맑고 향기로워야 한다. 이'여섯 개(六)의 반드시(必)가 산다는(居)'뜻을 가진 상호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작명을 가장 잘 한 이름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본사 정문 위에 걸려있는 황금색 글씨로 쓴'六必居(육필거)'라는 편액은 예사가 아니다. 다름 아닌 당시 재상이었던 엄숭(嚴崇)으로부터 하사받은 글씨다. 비록 엄숭은 간신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의 글씨만은 명필이라는 평을 받았다. 리우삐쥐의 주인은 엄숭의 글씨로 상호를 쓰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했다.
언젠가 엄숭이 리우삐쥐에 와서 술을 마시는 기회가 있었을 때 그에게 글씨를 부탁하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사람을 이용해 한 번쯤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엄숭의 부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그의 근심은 여전했다. '다리는 놓았는데 어떻게 건너편으로 건너가야 하지. 저쪽은 일국의 재상이요 나는 일개 주점을 운영하는 백성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를 어쩌지."
고민만 하고 있던 그에게 여종업원 하나가 뭔가를 귀띔해주었다. 하루는 엄숭이 황궁에서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인이 마루에 앉아 종이에다 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다. 부인이 쓴 글은 '六必居' 세 자였다.
"천하의 명필가의 부인 글씨가 이처럼 악필이다니, 쯧쯧."
엄숭은 자기 아내가 한편 우습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여 "부인, 글씨를 쓰려면 적어도 이렇게는 써야 하는 법이라네"하며 일필휘지 그 자리에서 본을 보여주었다.
작전은 성공하였다. 리우삐쥐 주인은 엄숭의 글씨에다 금박을 입혀 주점 대문 높은 곳에 걸어 놓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재상의 권세가 리우삐쥐에 광채를 더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리우삐쥐는 업종을 주점에서 간장이나 조미료 밑반찬을 만들어 파는 식료품 제조업으로 바꾸었다. 일설에 의하면 업종 전환의 배경에는 그 일이 있은 후 자신의 글씨가 몰래 상업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노한 엄숭의 조치 때문이라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00년, 의화단은'부청멸양'(扶淸滅洋)이란 구호를 내걸고 베이징으로 진격하였다. 그들은 외세의 중국대륙 침략의 첨병인 기독교도와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의화단에 자극을 받은 서태후 일파를 비롯해 청나라 보수파들은 열강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으나, 오히려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 연합국은 자국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공동 출병하여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그 와중에 텐안먼(天安門) 건너편 치엔먼(前門)의 외국상품 밀집 상가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근처의 리우삐쥐에까지 불길이 옮겨 붙었다. 그때 장두어뱌오(張奪標)라는 종업원 하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리우삐쥐 주점의 편액을 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그것을 쑹원먼(崇文門) 근처의 한 회관에 보관해 두었다.
1901년 봄, 의화단의 난이 평정되고 리우삐쥐는 원래 있던 자리로 복원되었고 장두어뱌오는 화마(火魔)에서 편액을 구해낸 공로로 평직원에서 일약 주인으로 승격되는 벼락출세를 하게 되었다.
차츰 화재 이전의 활기를 되찾은 리우삐쥐는 중화민국 시기에 들어서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1935년'전국 철도 근접도시 생산품 전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였다. 또 같은 해 일본 나고야에서 거행된 국제박람회에서는 리우삐쥐는 된장과 간장, 그리고 오이장아찌통조림 제품 부문에서 우수상을 휩쓸기도 하였다.
국민당 정부 수반인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송매이링(宋美齡)까지도 리우삐쥐의 제품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마오타이와 리우삐쥐, 다나까 수상과 저우언라이 총리**
리우삐쥐는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엄선한 원료와 엄격한 공정으로 제품의 품격과 맛을 보장해 왔다. 직원들에게는 같은 업종의 다른 업체에 비해 보수도 많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의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겨 축하나 위문품을 보냈고 실적이 우수한 직원에게는 노새가 끄는 마차를 보너스로 지급하여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반면에 규율을 어기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에게는 가차없이 처벌을 내렸다. 그렇게 되자 직원들은 업체를 자신의 집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동료들을 한 가족처럼 여기는 매우 모범적인 사풍을 스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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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리우삐쥐의 회사 운영은 별다른 풍파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66년 난데없이 몰아닥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는 리우삐쥐의 편액을 떼어내 버리고, '홍치장차이먼시'(紅旗醬菜門市)라는 멋 하나 없는 이름의 간판으로 바꿔 달게 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비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72년 9월 중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일본의 다나까(田中)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환영만찬회에서 마오타이주를 내놓았다. 그 술은 그 해 2월에 방중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 일행을 경악시켰던, 중국의 대표적인 배갈이었다.
하지만 다나까 수상 일행의 반응은 원래 기대했던 바에 훨씬 못 미쳤다. 닉슨 대통령과 달리 그의 마오타이주에 대한 경탄은 "참 기막힌 술입니다"라는 단 한 마디뿐이었다. 그 대신 "리우삐쥐는 지금 잘 있겠지요?"라고 물었다. 이 뜬금없는 질문에 저우언라이 총리는 물론 중국 측 참석 인사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모두 눈만 끔벅거렸다.
그러자 다나까 수상은 만년필을 꺼내 들어 메모지에 '六必居'를 써서 통역관에게 건네 보이며 "그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업체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래도 중국 측 인사들은 알 리가 없어 그냥 적당히 얼버무리고 지나갔다.
역사적인 중일수교 조인식을 마친 날 오후, 저우언라이 총리는 국무원에 리우삐쥐의 편액을 다시 내걸도록 하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현대 중국의 명재상 저우언라이는 명나라의 간신 재상이었던 엄숭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리우삐쥐의 역사적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다른 경로를 통해 그에게 중국 최고(最古) 업체의 존재를 일깨워준 다나까 수상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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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업체는 간장, 춘장, 식초 등을 비롯해 수백 여 가지의 각종 밑반찬을 내놓고 있다. 모든 제품의 원료를 자기들이 직접 재배하고 제조나 판매도 모두 직접 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해외의 친지들에게 명란젓이나 창란젓 등 젓갈류와 고추장이나 장아찌 등 양념과 밑반찬을 선물하듯 중국인들도 해외의 친지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하는 것 중의 하나도 리우삐쥐의 제품이라고 한다.
리우삐쥐는 오래된 것 가운데 새로운 것을 취하며 쉴 새 없는 품질의 이노베이션을 추구해왔다. 1950년대 리우삐쥐의 연간 생산량은 10만kg에 지나지 않았지만 2001년 말 연간 생산량은 2천만kg으로 해방 이후 50년 동안 생산량은 해방 이전 400여 년의 1백배가 넘는다.
옛날 리우삐쥐의 제품은 명성이 높았고 값도 비쌌다. 그래서 조정에만 납품되어 고관 귀족들만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렴한 값으로 일반 서민들의 식탁에서 얼마든지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먼저 점포를 차리고 나중에 공장을 짓는' 일관되게 준수하여왔던 경영 전략에 일대혁신을 가하였다.
1999년 베이징 남부에다가 30만평의 대형 종합식품 제조공장을 건설하였다. 오랜 세월 '작은 간장병'이라고 불렸던 업체가 '큰 춘장통'이라는 규모의 경영체제로 환골탈태하게 되었다.
***친인척은 가라**
부자는 3대도 넘기기 어렵다는데, 5백 년 전통의 리우삐쥐의 장수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간판의 글씨가 좋아서만도, 한결같이 뛰어난 제품의 우수성만도, 부단한 경영 혁신만도 아니리라. 이런 전통을 갖춘 데가 어디 리우삐쥐 한 군데 뿐일까. 무언가 더욱 심상찮은 비결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만 같다.
그 비밀은 다름 아닌 리우삐쥐 창립 규장 제2조에 있다. 거기에는 절대로 '불용삼야'(不用三爺)하여야 한다는 규장이 있다. 삼야란 바로'소야'(少爺:아들, 즉 직계비속),'고야'(姑爺:고모, 즉 방계존속),'구야'(舅爺:외삼촌과 처남, 즉 외가와 처가)를 가리킨다.
친척과 외척과 처족은 물론 친자식까지도 점포 안에 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치맛바람이든 바짓바람이든 절대 사절! 그들이 업체 경영에 끼치게 될 치명적 악영향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옛날 중국의 업체는 가족이나 혈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또 그래야만 쉽게 망하지 않고 오래갔을 거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의외로 옛날 중국에서는 후계자를 종업원 중에서 선발하는 업체의 수가 적지 않았다. 역사가 오래되고 건실한 업체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국가의 헌법 격인 회사의 규장에, 그것도 규장 앞머리인 제2조에 '불용삼야'라는 친인척 기용 배제 원칙을 명기한 예는 리우삐쥐가 유일하다.
"후계자는 오너의 친인척이 아닌 종업원 가운데서 선발한다."직원들에게 선사하는 희망의 메시지다. 비록 지금은 어렵지만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다라는 사기를 북돋아 주는 말이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얻는데도 이로운 말이다.
또한 "현자는 친척도 원수도 피하지 않는다"라는 다소 이상한 중국 옛말이 하나 있다. 친척을 원수와 동렬에 놓다니, 이 숨은 뜻은 무엇일까? 뒤집어 보면 그게 금방 눈치 챌 수 있는 반어법에 불과하다.
동서고금 이래 현자는 극소수이고 보통 사람은 대부분이다. 즉 당신이 현자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원수나 마찬가지인 친척을 피하라는 충고이다. 사실 친척과 원수 가운데 진정으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다. 500년 전통의 리우삐쥐가 오늘도 막강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비결 중의 비결은'낙하산 인사'와 친인척 기용의 온정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던, 이 얼음장처럼 섬뜩하고 아름다울 만큼 쿨한 합리주의에 있다.
귀족의 자식은 귀족이고 농부의 자식은 농부일 수밖에 없는 봉건시대에 태어나 지금껏 정정하게 살아있는 리우삐쥐. 그의 실존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참으로 소중한 사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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