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로의 일대변신**
지금 중국에서는 해마다 10,000개가 넘는 기업들이 쓰러지고 있다. 중국 기업의 평균수명은 2년 9개월로 매우 짧다. 그래서 중국에서 성공한 기업가를 찾기란 어렵고, 성공한 여성 기업가를 만나기란 더더욱 어렵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시에는 다소 과장된 이런 시구가 있다. "사천(四川 : 촉〔蜀〕나라) 가는 길은 하늘 오르기보다 힘이 든다(蜀道難 難于上靑天)."
하지만 이 시구를 오늘날 분투하고 있는 중국의 기업가들을 형용하는데 쓴다면 좀처럼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즉 중국에서 성공한 기업가의 탄생과 생존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중국의 경제체제는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 미시적으로 보아도 중국의 개별기업에는 경쟁과 도전, 그 생사의 기로로 겹겹이 포위되어 있다. 그들이 시시각각 살얼음을 밟듯 살아간다는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닐 것이다.
대부분 중국의 남성 기업가들은 기업의 드라이브에 장애물이 가로막으면 강자는 엑셀을 밟고, 약자는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에 반해 중국의 여성 기업가들은 장애물의 속성을 먼저 잘 파악하고 난 후 그것을 자신의 재간과 인간관계망으로 일순간에 녹여버리거나 삼켜버린다. 이것은 여성 기업가들이 난관을 돌파하는 방법의 공통된 특징이다.
참고로 중국의 민영기업 중 창업자 수의 17.1퍼센트가 여성이지만 문을 닫는 업체의 폐업자 수의 13.4퍼센트가 여성이다. 일단 창업에 성공한 여성이 실패하는 비율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3월 양란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방송인에서 기업가로 일대변신을 한 것이다. '양기(陽記)그룹'을 인수하여 그것의 명칭을 '양기문화(陽記文化) 사이버네트워크., Ltd'로 고쳐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1962년에 문을 연 '양기그룹'은 92년에 액면가 1위안으로 상장하였으나 줄곧 적자를 면치 못해 온 부실기업. 98년과 99년에 각각 4500만 위안과 2300만 위안씩 적자를 냈고 4년 넘게 이자도 갚지 못한 상태였다.
명색이 그룹이라지만 2, 3개 건축회사를 뭉쳐 놓아 규모가 단출하였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의외로 부채비율도 낮고 거품이 없는 투명한 기풍의 그룹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양란은 이 점이 마음에 들어 인수했던 것이다.
그해 6월 양란은 다시 2000만 달러를 투자해 '양광위성TV'(Sun Satellite Television)'를 창립하였다. 창사 직후 미국 A&E TV망과 기업동맹계약을 체결한 '양광TV'는 2000년 8월 역사와 문화, 인물, 전기 등 다큐멘터리물 위주의 시험방송을 개시하였다.
그녀는 미국의 「네셔널 지오그래픽」이나 「히스토리」를 능가하는 중화권 최고의 전문 다큐멘터리 채널을 사업목표로 삼았다. 세계적인 미디어 사이버네트워크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계속 맺어 나가면서 5년 간 미화 총1억 달러를 투자할 마스터 플랜도 발표하였다.
또한 컨텐츠만 뛰어나면 시장이 없을까봐 우려할 필요도 전혀 없고, 비슷한 유형의 미국TV 채널들의 운영 경험과 현지 시장의 반응을 참고하여 효율적으로 경영하면 1년 만에 5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사진10-2> '양광위성TV'의 로고
***중국 부자의 제4세대**
개혁개방 중국의 20여 년 간 4개 세대의 부자들이 출현하였다.
1980년대 초 중국 제1세대 부자들은 유통부문의 시장화로 탄생하였다. 그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학력수준이 매우 낮은 농민들이나 실업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들 창업자 중에는 심지어 교도소나 노동개조소에서 막 석방된 주변인물들도 있었다.
개체호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그들은 중국 경제발전에 불꽃을 당긴 1980년대 그 시절의 주력군이었다. 그러나 주로 유통분야에서 단박에 폭리를 취하던 그들의 시대는 1990년대 초 종언을 고하였다.
제2세대 부자는 생산재영역의 시장화로 생겨났다. 1980년대 후반 중국정부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궤도를 병존시키는 이른바 '쌍궤제'(雙軌制)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머리가 명석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자들이 '계획'과 '시장'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강철과 목재, 토지 등의 사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제3세대 부자는 금융부문의 시장화와 더불어 나타났다. 1990년 중반 들어 주롱지 총리가 주도한 금융체제 개혁과 상장 회사의 대량출현은 중국 땅에 새로운 부자들을 쏟아 내었다. 제1세대, 제2세대 부자와는 달리 그들은 대부분 고학력자로서 우리주식을 배당 받거나 창사 당시의 우선주와 의결권이 있는 주식도 다량 소유하면서 회사경영에도 직접 참여하는 경영인인 동시에 근로자들이다.
1990년대 후반과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제4세대 부자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지식이 결정적 힘을 발휘하는 지식정보화사회의 도래와 함께 나타난 부자들이다. 이들은 앞선 3개 세대들보다 훨씬 신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양란이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양란이 자신의 방송사를 창설한 것은 우연도 돌연한 것도 아니었다. 10여 년 전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각본을 그대로 따라야 했던 CCTV의 MC시절부터 그녀는 자신이 직접 기획하고 출연자를 섭외하고 대본을 작성하는 등 프로그램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하고 싶었다.
「양란시선」과 「양란공작소」에서 자신의 원을 어느 정도 푼 그녀는 1999년 10월 국제방송인 세미나에 참석하여 '인터넷 시대의 TV방송인'이라는 타이틀로 기조연설을 하게 되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분이다.
"지금 세계는 대량생산 위주의 산업사회로부터 지식 위주의 '지식산업사회'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의 90퍼센트는 불과 30년 이전에 창출된 것이며 앞으로 10~15년이 지나면 지식의 양은 지금의 2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급격히 증가하는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는가가 사업의 성패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사업화하고 사업에 반영하는 의지와 행동은 개인과 기업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경제발전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중화권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하나로 커버하는 다큐물 전문채널을 창설하려는 양란의 몽상은 그 무렵부터 벌써 현실화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한 여성기업가의 공식**
"양란언니가 운이 좋아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조물주는 그토록 한 사람에게만 행운을 몰아줄 수는 없을 겁니다. 양란언니는 확실히 남보다 훨씬 순도 높은 노력을 집중할 줄 아는 여성임에 틀림없어요."
양란을 우상처럼 숭배한다는 CCTV 여기자 왕샤오야의 말이다.
여성은 재물에 연연한다. 일찍이 모계사회 시절부터 찍힌 낙인이다. 여성은 자신의 젖을 물려 아이를 길러낼 1차 책임을 떠맡고 있다(비록 남성우월주의 시각이라는 혐의가 농후한 진술이겠지만). 여성은 생리적으로나 신체구조상으로나 남성보다 재물을 밝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 시장경제의 현란한 생활 속에서 생겨나는 재화들은 대부분 여성의 물욕의 좌표를 시현해내는 것들이다. 객관적 상황이 이럴진대 어느 중국 여성의 가슴이 시종 잔잔한 호수처럼 태연할 수 있겠는가! 중국 시장경제사회는 종종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장면을 펼쳐내고 있다. 그 장면에는 사랑과 미움, 환희와 비통, 실패와 성공 등등 남성들 못지 않게 치열하고 비장하다.
지금 중국 사회 일반에 반쯤 공인된 공식이 하나 있다.
건강한 여사 + 단정한 용모 + 탁월한 재능 한둘 + 집착 = 성공한 여성 기업가
재계의 여성과 연예계의 여성은 본질상 구별된다. 비록 같은 인생이지만 경제계의 여성은 성실과 믿음을, 연예계의 여성은 변화를 추구해야 살아남는다. 서로 모순되는 이 둘은 속성상 융합하거나 하나의 종합체를 이루기가 어렵다.
하지만 양란처럼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연예계에서부터 성실과 믿음을 신조로 삼아야 하는 경제계까지 발을 뻗친 예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위의 성공한 '여성 기업가의 공식'도 양란이 체현한 것에 견주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나비는 애벌레를 포기해야 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현명하게 돈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돈이 주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많아 어디다 어떻게 쓸지 모른다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양광위성TV' 창사 후 가장 곤란을 겪은 분야는 우수 인력을 초빙하는 문제였다. 양란은 윤택한 인문정신의 문화컨텐츠를 기본으로 하는 개성화 된 브랜드로 승부하기로 하였다. 25세에서 49세 사이의 대졸 이상의 남성이 주요 시청자층인 '양광위성TV'는 노키아(NOKIAː핀란드의 핸드폰 제조업체), 모토로라 , 코닥 등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으로부터 막대한 광고 수입을 올렸다. 창사 1년도 안되어 투자금액 전부를 회수하였다.
"9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TV채널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CCTV만 하더라도 제가 MC로 데뷔할 적인 1990년에는 채널이 둘 뿐이었던 게 지금은 11개나 됩니다."
중국 전역의 TV채널 수는 모두 1000개가 넘는다. 또 웬만한 도시 하나의 인구가 시청할 수 있을 정도의 채널은 약 40여 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채널들의 프로그램과 편성이 놀랄 만큼 비슷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오락, 문화, 스포츠 등등 특화된 채널로 출발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든 취급하는 잡화상 같은 채널이 되고 만다. 방송국은 편할지 몰라도 시청자들은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중국TV는 채널은 많으나 볼 만한 채널이 없다."고 중국의 신흥부자, 전문직 종사자 등 이른바 하이레벨에 있는 내국인을 비롯하여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이나 화교들이 한목소리로 내는 불만이다. 양란은 이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시청자에게 채널 선택의 안정성을 부여하자를 구호로 삼았어요. 시청자들이 리모콘을 눌러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지 말도록, 한 채널로 진득하게 충분히 즐기게 하자는 거지요. 우리 '양광'은 전문점을 열었지 그만 그만한 잡동사니들을 잔뜩 쌓아 놓은 잡화점을 연 것은 아닙니다."
2000년 『포브스』지는 '양광문화'를 전망이 밝은 세계 300대 소형그룹으로 선정했다. 이는 중국기업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포브스』는 또한 양란을 중국 본토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으로 선정했다. 『아시아위크』도 그녀를 아시아 20대 사회와 문화계 리더로 선정하였다.
기업가로 변신한 원년인 2000년 연말, 양란은 앞으로의 진로를 묻는 질문에 "지금 나도 곰곰이 생각하고 있어요" 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놀랄 틈도 주지 않을 만큼 변신하는 그녀의 휘황찬란한 경력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일 성싶다.
그러나 바늘 가는데 실 가듯, 생각하는데 행동이 뒤따르는 삶을 그녀는 살고 있다. 비록 자신은 그 결과를 예측할지 못하더라도 매사에 깊이 생각하고 매번 도약할 때마다 질서를 잡아나간다.
양란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오직 첫번째 성공에만 도취해 있으면 그의 인생에 두번째 영광을 맛보기 힘들 겁니다. 또 휘황찬란한 빛발 속에서 부단히 몸을 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성공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비는 애벌레의 모습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합니다."
2001년 9월 양란은 또 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양란과 남편 우정은 중국 최대의 포탈사이트 '신랑왕'(www.sina.com.cn)의 주식 16퍼센트를 매입하여 최대 주식보유자가 되었다. 즉 양란은 신랑왕의 최대 주주로 또 한번 더 도약한 것이다.
나스닥 자료에 의하면 양란이 신랑왕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는 바람에 그 동안 신랑왕의 최대 주식보유자였던 '스통(四通)전자'의 주식보유 비율은 8퍼센트 미만으로 내려갔다. 미국의 '아메리카 온라인'(AOL)과 '타임 워너'(Time Warner)간의 합병처럼 중국에도 TV, 영화, 출판으로 나타나는 올드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뉴 미디어와의 융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보유한, 초대형 디지털 업체가 탄생하였다.
우정과 쟝펑니엔(姜豊年ː원래의 신랑왕의 회장)은 신랑왕의 공동회장으로, 양란과 마오다린(茅道林)은 각각 양광문화의 회장 겸 신랑왕의 CEO를 맡았다. 결국 오늘날 양광문화&신랑왕은 TV프로그램 제작과 위성방송, 음악과 도서 발행 등 미디어 업무와 함께 인터넷 온라인망을 통한 컨텐츠를 제공하는 중국 최대의 미디어 디지털 기업으로 위치를 굳혔다.
<사진10-5> 양광위성TV-신랑왕 합병식에서의 양란. 옆으로 그녀의 남편 우정이 보인다.
***아직 마침표를 찍기에는 이르다**
어떤 이는 여성 기업가는 배워서 생겨난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에 MBA과정이 설치된 지 십여 년이 걸렸어도 이러한 기업가의 요람에서 나온 여성 기업가는 단 하나도 없다.
또 어떤 이는 여성 기업가는 뽑혀서 생겼다고 하는데 그럼 누가 그녀를 선발했는가? 당과 정부? 부녀연맹? 아니면 그들의 상사인가?
또 어떤 사람은 여성 기업가는 성실하게 일을 해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필사적으로 돈을 벌려고 근면하게 일을 해도 왜 아직까지 여성 부호라는 소리를 못 듣고 있는 건가?
위의 이유가 아니라면 기실 정답은 간단한 것 같다. 여성 기업가는 태어나서 생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여성 기업가의 부모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이런 여성 기업가를 탄생하고 양성한 것이다. 물론 남성 기업가들도 마찬가지다.
아마 그녀는 성공자라고 숙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과 축적된 경력, 그녀가 보유한 성공의 DNA는 "황금이라면 언제나 빛날 것이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 한가지가 있다. 그녀의 성공은 에누리하여야 하여야만 한다.
첫째, 그녀의 기업은 세계표준으로 본다면 아직 소기업이고, 듣기 좋게 말하자면 기껏해야 전망 밝은 중소기업일 뿐이다. 그녀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기업가라고 할 수 없다. 엄격히 말하자면 남편의 대리인 또는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그녀는 남편보다 더 강한 영향력이 있나? 그렇다. 그렇게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그녀는 누구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는가? 그녀의 미모와 세련된 태도에서 나오는 매력인가? 아니면 선진적 관리이념과 기법인가 아니면 비상한 리더십인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한다.
셋째, 중국의 많은 기업가들은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순간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여성 기업가는 더욱 이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녀가 영원히 성공한 여성 기업가로서 21세기 부강한 중국의 역사에 남으려면 붉은 무도화를 신고 스포트라이틀 받을 때 더욱 자중하라고 권하고 싶다. 유혹에 견뎌야 하고 때로는 적적함도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보다 얼리고 치켜세워서 죽이는 것이 막기가 더 힘든 것이다.
스무 살 시절부터 양란은 남들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속도로 자신의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우아한 자태와 섬세한 동작 지난 10년 간 양란의 변화는 매우 컸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짧아지고 식견은 넓어지고 돈지갑은 불룩해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이 그리 돈이 많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한다. 오직 승리와 성공뿐인 반생을 살아온 그녀의 그 말에는 뭔가 모를 슬픔이 배어 있다. 마치 모차르트 「터키 행진곡」의 경쾌한 선율 사이에서 짙은 페이소스가 느껴지듯 젊음이 가는데 돈이 많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새벽 안개처럼 청순하던 양란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나 푸른 이상과 포부는 그녀의 가슴속에 변치 않고 살아있을 것이다.
양란은 32세의 나이에 기업가로 탄생했다. 서른 둘이면 노처녀나 노총각이 결혼을 먼저 할 것인가 경제적 기반을 어느 정도 닦아놓고 결혼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려할 나이에 지나지 않는다. 젊어서 창업을 한다. 이 점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성공인이 젊으면 젊을수록 좋지 않은가!
그러나 끝으로 꼭 말하고 싶은 한 가지 의견이 있다. 그것은 양란의 기업경영 나이가 만 두 살이 채 되지 못하다는 데 보다 관찰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 스스로도 "양란은 중국에서 제일 성공한 여성 기업가이다" 라고 마침표를 찍기에는 그녀에게 아직 너무나 많은 여백과 시간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사진10-6> 양란의 최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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