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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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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9>

중국 제1의 여자 갑부 양란 (中)

<그림9-1>

***봉황이 '한류'(韓流)를 물고 왔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지만 제비가 봄을 알리는 전령임에는 틀림없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하면 최근 중국대륙으로 뻗어나가는 한국 문화의 활발한 진출을 보고 해보는 말이다.

한편, 중국대륙에 한국 대중문화의 붐을 처음으로 촉발시킨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홍콩의 '봉황위성TV'다. 중국의 수많은 청춘남녀들은 안재욱 주연의 '성몽기연'(星夢奇緣, '별은 내 가슴에'), '묘수정천'(妙手情天, '해바라기'), '포말애정'(泡沫愛情, '안녕 내 사랑') 등을 비롯하여 '남색생사연'(藍色生死戀, '가을동화'), '홀연정인'(忽然情人, '토마토'), '하왜적유혹'(夏娃的誘惑, '이브의 유혹') 등의 TV 드라마로 밤잠을 설쳤다.

또 1990년대 전반부터 중국대륙에 대우자동차, 현대건설, LG전자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이 발 빠르게 진출해서 입지를 굳히고 성장하자, 중국은 한국경제를 배워보자는 구호가 넘쳐흘렀다. 그들은 박정희, 정주영, 김우중 등 한국경제의 독재시대 리더들을 중국이 본받아야 할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심지어 김우중 대우그룹 전 총재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天地廣闊 大有作爲)는 장쑤 성의 부유한 경제도시 중 하나인 창저우(常州) 시의 모든 공무원들의 필독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림9-2>

그러나 1997년 말 IMF의 일격을 맞은 한국은 하루아침에 중국의 '경제 선생님'에서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 전락했다. 이제 동방불패 신화였던 한국경제의 환상은 사라졌다.

그러나 경제가 몰락한 황량한 빈터에 문화의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한류'(韓流)였다. 즉 음악, 드라마, 패션 등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에 흉용하고 있다는 의미의 신조어가 생겨났다.

중국인들이 주로 시청하는 드라마에는 상하이나 홍콩, 타이완에서 제작하는 도시생활을 담은 트랜드 드라마와 근현대를 배경으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을 대변하는 생활드라마, 그리고 여전히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무협드라마가 있다.

한국은 이 가운데, 트랜드 드라마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 시장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한 마케팅 전략과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세련된 드라마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소비중심의 도시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중국인들의 한국풍에 대한 관심의 증가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현상 뒤에는 중국인들이 그 동안 재미있는 볼거리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홍콩이나 대만, 싱가포르보다 세련되고, 일본보다 역사적인 반감도 없는 한국 문화가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한류는 자연스럽게 나타났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1997년 7월 '홍콩 회수'를 계기로 '봉황위성TV'가 시청률과 신선함을 확보하기 위해 채택한 조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안재욱 등 한국의 인기 연예인이 출연하는 한국의 TV드라마를 수입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MC, 양란의 캐스팅이었다.

양란은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홍콩의 '봉황위성 TV'에 방송인으로서 제2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봉황위성TV' 한 고위 인사는 양란에게 홍콩과 타이완의 방송 스타일에 맞추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미디어학 석사학위를 받고, '중국중앙TV'의 MC로 잔뼈가 굵은 그녀는 설령 기존의 어떤 스타일에 맞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화에 접근하는 것이어야지 적당히 버무리고 어설프게 모방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홍콩이나 타이완 것들은 이미 중국의 시청자들에게 신물이 날대로 난 구닥다리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자기만의 독특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개척해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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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마우스 끈을 늘어뜨려라**

중국의 저명한 성공학자 왕즈강(王志綱)의 베스트셀러 '책획선풍'(策劃旋風)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좋은 기획은 줄줄이 사탕처럼 성과를 계속해서 이끌어줄 끈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투자한 것보다 많은 이익이 생기게 하는 게 기획의 요체이지만 더욱 훌륭한 기획의 관건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또 다른 프로젝트로 연결시켜 사업을 장기적이고 입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예비 끈을 얼마나 길고 건실하게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끈은 성공의 PC를 클릭할 때 없어서는 안 될 마우스의 줄 같은 것이다.'

1998년 1월 양란은 봉황위성TV 내에 '양란공작실'을 개설했다. 자신의 이름과 프로그램의 이름을 일치시킨 점은 상하이 동방TV 시절의 '양란시선'과 같았다. 그러나 PD겸 MC를 맡았던 '양란시선'과는 달리 '양란공작실'은 PD 겸 MC는 물론 행정관리와 연출을 도맡는 프로듀서-디렉터로서 모든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양란공작실'은 일개 프로그램이 아니라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봉황위성TV내의 일종의 프로덕션이라고 할 수 있다. 빠듯한 예산과 소수의 스태프의 그것은 양란에게 최소 경비로 최고의 프로그램을 창출해내야 하는 노하우를 터득하게 해준 교실이자 2년 후 중국 제1의 여자 부호로 뜨게 해준 뜀틀이기도 했다.

'책획선풍'을 읽어보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양란은 책의 구절대로 성공의 마우스 끈을 '정대종예'→'양란시선'→'양란공작실'로 길게 이어갔다. 울브라이트 미국무장관, 잭 웰치 GE회장을 비롯하여 세계 금융계의 큰손 조오지 소로스, 세계적 어문학자 지센린(季欽林), 마카오의 행정수반 허호우화(何厚譁), 타이완의 괴재 리아오(李傲).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최이치(崔琦) 등등 120여 명의 세계적 명사들이 '양란공작실'을 거쳐 갔다. 양란은 다양한 분야의 비범한 인물들과 직접 마주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고급정보와 지식을 흡수하는 것은 물론 초호화급의 인간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란은 항상 자신을 영감이 모자란 여자라고 여겼다.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보충하기 위하여 그녀는 30분 인터뷰를 위하여 최소한 30시간의 준비를 했다.

1999년 7월 어느날 상하이에서 양란은 미국의 경제잡지 '포춘'의 주필과 인터뷰를 했다. 주필은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의 여기자 양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처음부터 가벼운 농지거리로 대하였다. 그러나 양란은 시종 날카롭고 진지하며 구체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주필을 맡은 10여 년 동안, 국제산업구조는 어떤 변화를 거쳤지요? 또한 그런 변화가 세계 10대 기업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또 기업의 경영책임자는 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어떤 비전을 가지고 기업을 이끌어가야 합니까?"

예리한 시각과 신선한 말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양란의 질문공세에 그 콧대 높은 주필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후에 그는 양란에게서 받은 느낌을 이렇게 피력했다.

'이처럼 완벽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자가 중국에 있다니……. '중국에서 받은 당신의 인상은?', '눈부신 상하이에 대해 당신이 느낀 점은?' 이런 따위의 질문이나 반복하는 다른 중국기자들과는 완전 딴판이다. 그녀는 인터뷰를 신들리게 하는 주술사다.'

또 인텔의 앤드류 그로브(Andrew Grove) 총재 역시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에는 두 가지 경탄할 만한 것이 있다. 하나는 백만 대의 TV를 생산할 수 있는 생산라인이고, 나머지 하나는 양란같은 출중한 기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양란은 잠시라도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으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계속했다. 그녀의 목적지는 단 하나 '끊임없는 성취의 과정' 자체에 있었다. 봉황위성TV를 진행한 2년간 그녀는 질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었으며 베테랑급의 업무경력과 방대한 머릿속 지식자본을 축적했다. 봉황위성TV는 또 하나의 봉황, 양란을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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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봉황이 만난 환상의 커플**

이 세상 거의 모든 부모는 자녀가 잘 살고 성공하길 바란다. 개혁개방 이후 한 아이만 두어야 되는 중국의 부모들이 자녀에 품는 기대는 극성스러울 만큼 높다. 그들은 아들에게는 용이 되라고 '왕즈청롱'(望子成龍)이라고 부르며, 딸에게는 봉황이 되라고 '왕뉘청펑'(望女成鳳)이라고 부른다. 특히 딸 가진 중국 부모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자기 딸이 명예와 재산과 용(남편)을 한몫에 거머쥐는 봉황으로 자라나길 바란다. 그러한 그들에게 양란은 최고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보통 젊은 여성의 성공에 대해 중국 사람들의 평가는 양극화된다. 신화로 떠받드는 맹목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아니면 무턱대고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특히 그 여성이 박학하고 부유하고 잘생긴 남편까지 얻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깎아내리는 편에 서는 사람들은 양란을 가리켜, 그녀가 '현대 중국의 봉황, 양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정(吳征)이라는 용을 만난 덕분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물론 그녀 역시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선택은 남편을 선택하는 일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그녀는 1994년 CCTV를 떠나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의 첫 결혼은 1년을 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을 하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기도 하지만, 사랑을 위한 결혼은 불가피하게 비극을 초래하는 것 같아요." 실패한 첫 결혼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면 양란은 언제나 J.B 캐번의 '농담의 정확'의 한 구절로 응대했다. 양란의 첫 남편은 캠퍼스커플이라는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양란의 현 남편이자 '양광문화그룹'과 '신랑왕'의 공동회장 우정(吳征)은 홍콩의 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잣집 아들의 학력은 참으로 화려하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 학사와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 석사, 그리고 워싱턴 대학 국제무역학과 상하이 푸단 대학의 국제정치관계학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현재 그는 베이징 대학과 칭화 대학의 겸직 교수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다.

우정은 양란보다 3살 연상이었다. 결혼을 한 유부남 우정은 미국 유학시절, 역시 결혼을 한 유부녀 양란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들은 서로 첫눈에 반했고 거의 동시에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결국 둘은 첫 남편과 첫 아내와 헤어지고 재혼했다.
그들의 결혼 전후를 두고 일기 시작한 악성 유언비어들은 지금도 중국 천하에 난무하고 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용과 봉황이 만나 한 쌍을 이룬, '환상의 커플'에게는 반드시 납부해야할 할 대가였다. 세인의 시샘을 원천으로 하는 '유명세'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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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을 낳지 못하는 문화는 죽은 문화**

문화는 일종의 이상이다. 문화에서 영리를 얻으려면 문화적 추구와 상업적 가치를 동시에 고려하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것은 헛소리다. 예로부터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개 속으로는 이익을 추구할지언정 대놓고 말하는 것을 금기시 했다. 심지어 그들은 문화와 금전의 관계를 가장 비열하며 적대적인 관계라며 흘겨보았다. 그러나 양란은 불경스럽게도(?) 문화를 상업적인 이익을 무한정 빚어낼 수 있는 마이다스의 황금손으로 반기며 환영하였다.

봉황위성TV 시절 양란은 이윤을 낳을 수 있는 문화만이 진정한 문화이며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문화는 불임문화 또는 죽은 문화로 규정했다. 어쩌면 이것은 인터넷 시대의 연금술사만이 해낼 수 있는 파천황적인 발상이라고 하겠다.

1998년 4월 '양란공작실'의 양란은 '백년질타풍운록'(百年叱咤風雲錄)의 진행까지 겸했다. 그것은 20세기 100년간의 인물과 사건을 총결산하는 교양 프로그램으로서 전 세계 중국인들로부터 '정대종예'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TV는 제가 일생을 두고 추구하는 것이지요. 1, 2년간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아요. 장래 저의 사업의 길은 최소한 20년은 거뜬히 남았다고 생각해요."

1999년도 신춘특집 프로그램을 마친 후 양란은 한 후배 기자의 인터뷰에 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CCTV MC로의 데뷔는 참 우연한 일이었어요. 저는 인기의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숨에 높이 올라갔어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스라한 공중누각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나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고 흥분이 가라앉을 즈음 나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어요. 허구한 날 고깃배 위의 등불처럼 흔들거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처음부터 차근차근하게 나의 벽돌을 다시 쌓겠다고 결심했어요.

지금 저의 인기는 막 데뷔했을 때의 절반만도 못하지만 제 자신에게 항상 다짐해요. '인생은 100에서 0으로, 다시 0에서 100으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요즘 TV에 나와서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대해 든든함을 느껴요."

그러나 일개 MC로부터 세계적인 방송인 대열에 들어선 1999년 10월, 양란은 갑자기 봉황위성TV에서 사라졌다. '양란공작실'과 '백년질타풍운록'도 사라졌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청자들도 그녀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보았다. 피곤기는 성공한 여성들에게 늘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녀는 더 많은 시간을 남편과 아이와 함께 보내고 싶었고 거기서 사랑을 찾고 싶었다. 남편과 아이는 무한한 행복과 동력을 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갑자기'가 아니라 순전히 '개인사정'으로 봉황위성TV를 떠난다고 말했지만 세간에는 여러 추측들이 난무했다.

"'정대종예'를 떠나 미국으로 갔고 다시 귀국한 이후 곧바로 홍콩 봉황위성TV에 들어갔어요. 쉴 틈도 없었지요. 이제 심신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쳤어요. 매주 월요일에서 수요일은 홍콩, 목요일에서 금요일은 베이징, 주말이면 상하이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아들과 지내다가 일요일 밤 다시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2년이나 계속했어요.

세 살짜리 제 아들은 아마 같은 또래 아이들 중 공항에 제일 많이 나온 아이일 거예요. '마마, 짜이찌엔(再見)' 하며 손을 흔드는 아이를 뒤로 하고 매주 비행기를 타야 하는 어미심정, 아마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그녀는 직장에서는 가정일, 가정에서는 직장일을 걱정하는 자신에게서 부담감을 느꼈다. 그래서 자연히 인터뷰를 위한 장기출장도 꺼렸다. 시간을 더 주체적으로 배정하기 위하여, 더 큰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 늘 생각했다. 그녀는 마침내 단안을 내렸고 봉황위성TV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지 그것을 채굴하는 곳이 아니지요. 얻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지만, 주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은 영원히 행복할 거예요."

양란은 이 말을 뒤로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잠시동안.

<그림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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