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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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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8>

중국 제1의 여자 갑부 양란 (上)

***신은 그녀만 예뻐해?**
<사진8-1>

신은 그녀만 너무 예뻐하는가 보다.
양란(楊蘭)에게 눈부신 미모에다가 사업을 경영하는 지혜까지 주었으니 말이다. 양란이 7억의 중국 여성 가운데 제일 출중한 여인이라는 평판에 토를 다는 중국 사람은 별로 없다. 아름답고 총명하며, 귀엽고 우아한 데다 참신하면서도 세련된 지성미까지 구비한 여인.

올해 나이 서른셋인 양란은 같은 또래 여인들이 차마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을 몽땅 현실로 실현해 나가고 있다. 일류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일류 직장에서 최고 경영자가 되었으며 일류 남편을 얻고 일류 자녀를 두었다. 그 무엇보다 일류 사업을 창업하고 중국에서 최고 돈 많은 여인이 되었으니까 그럴 만하다.

1968년 양란은 베이징의 대학교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학교 성적은 초등학교 때부터 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우수하였다.
특히 초중고 12년 간 역사와 지리시험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린 적이 없다고 한다. 타고난 두뇌, 비상한 노력, 그리고 좋은 가정환경의 3박자를 두루 갖춘 그녀가 명문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는 일은 어쩌면 '누워서 자장면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대학시절 양란은 심한 자신감 결핍으로 고생해야 했다. 현재 중국 TV사상 최고의 여자 MC라는 평을 받고 있는 양란이 청취력 성적 불량으로 기가 죽어 있었다면 누가 믿으려고 하겠는가. 남들은 웬만하면 받는 청취력 A학점을 그녀는 허구한 날 A-나 B+를 받았다.

"내일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아, 청취력 시험에서 A+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구절은 그 시절 양란의 일기 맨 처음에 언제나 등장하던 말이었다.
그렇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어학 랩실은 으레 공포의 도살장처럼 다가왔다. 양란의 어머니는 당시 딸이 심한 좌절감으로 인해 자폐증 비슷한 병에 걸렸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약 반년간의 분투 끝에 양란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아픔을 겪은 후 저는 좀 달라졌어요, 주변 사람들 가운데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며, 창의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사람에게 더욱 마음이 끌리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때까지 나 자신만이 탁월한 여성이라고 여겨왔던 어줍은 교만심을 팽개쳐 버렸지요."

***다시 0에서 100으로의 쾌감 **

한 후배 여성 아나운서가 양란에게 다소 곤란한 질문을 하나 했다.
"선배님, 처녀 시절에 심하게 운 적이 있으세요?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만 말씀해주시겠어요?"

"1990년 여름날 새벽이었지요. 그때 저는 베이징 외국어대학 영어과 4학년생이었는데요. 호감이 가는 남학생이 있었어요. 실은 제가 흠모했던 것은 그 남학생이 아니고 그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물건, 즉 PC이었어요. 그는 베이징 대학의 대학원생으로 저의 룸메이트의 남자친구였는데 그가 논문이나 편지를 PC로 쓰는 거였어요.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아세요?

3학년이 다되도록 저는 수동식 타자기로 리포트를 썼거든요. 4학년 초가 되어서야 유학을 떠나는 졸업 선배로부터 286PC를 한 대 물려받을 수 있었어요.
4학년 말 저는 졸업논문을 며칠을 뜬눈으로 새우며 그 중고 PC로 타이핑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날이었어요. 새벽 4시경 그만 PC가 다운되고 사고가 발생했어요. 오 맙소사! 그때까지 입력한 내용이 전부 날아가 버렸어요. 졸업 논문의 제출 마감은 그날 낮 12시까지였는데……

며칠 동안 열심히 입력한 내용이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눈앞이 깜깜해지고 세상의 종말이 온 듯했어요. 눈물이 핑 돌더니 나중에는 펑펑 울었어요.
그러나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눈물을 닦고 처음부터 다시 타이핑하기로 했어요. 결국 마감시간 10분을 남겨놓고 졸업논문을 제출할 수 있었죠.

회상하면 정말 아찔해요. 입력한 자료가 몽땅 날아가 버린 PC가 다운되던 그 순간, 천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낭패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 낭패감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성취감의 희열, 마치 100에서 0으로 다시 0에서 100으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짜릿하면서도 소중한 '쾌감'이었어요."

'100에서 0으로 다시 0에서 100으로의 쾌감'은 중국 제1의 여자 갑부의 재테크이자 인생테크를 축약한 하나의 감탄부호라 할 것이다.

***영자(英雌) 선발대회**

<사진8-2>

1990년 가을 대학을 갓 졸업한 그녀에게 운명 같은 기회가 홀연 찾아왔다. CCTV(중국중앙방송국)가 '정대종예'(正大綜藝)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새 MC 1명을 선발하는 공개채용 공고를 낸 것이다. '정대종예'는 태국의 대재벌 CP그룹(중국에서는 正大集團이라고 함)이 후원하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교양 오락프로그램이었다.

CCTV는 채용조건으로 유창한 베이징 표준어를 구사하며 용모가 단정한 대학 졸업반 여학생으로서 특히 신문방송과를 전공한 자를 우선 고려 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어가 전공인 양란은 졸업 후의 진로로 호텔이나 외국계 은행의 입사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모가 모두 대학교수인데다 주변의 친지들 중에서도 방송이나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 측의 강력한 추천이 있어 그녀도 반쯤 경험 삼아 응모한다는 마음으로 중국 천하에서 모여든 1천 여 명의 재원 대열에 합류하였다.

당시 CCTV의 MC공채에 1000대 1이라는 전무후무한 경쟁률을 두고 사람들은 1000대 1의 영자(英雌:英雄의 상대)선발대회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서류심사, 필기, 용모테스트, 음성테스트, 바른 언어 구사력, 실기, 토론식 면접 등 모두 7개나 되는 복잡하고 어려운 관문들은 단 1명의 '영자'에게만 허용되었다.

"CCTV는 얼굴만 예쁘고 머리는 간단한 여 MC를 뽑겠다고 아주 대놓고 말했어요."
양란은 '왜 여자는 꽃병만 되고 남자는 주인공이어야 하는가'를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용모테스트 관문에 들어선 양란은 심사위원석을 향해 "왜 여자 MC는 외모만 보나요, 여자 MC는 머리가 없어도 되나요?" 라고 상냥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따졌다.

심사위원 중의 하나였던 신샤오잉(辛少英)이라는 여자 PD는 이 당돌하고 귀여운 여대생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양란에게 파격적으로 100점 만점에 100점을 주었다.
1000대 1이라는 가히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이른바 '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 PD덕이라며 양란은 지금도 그녀를 따지에(大姐:큰언니)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다.

***아저씨, 제 얼굴 괜찮죠?**

양란에게는 총명한 머리만 있는 게 아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지적 매력이 넘치는 미모는 그녀의 직장생활이나 사업 활동에 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양란도 이런 점에 절반은 동의한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은 잠시 동안 당신을 도울 수는 있으나 영원히 도울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인품과 능력이겠지요."

'정대종예' MC 선발 최종 면접에 이르렀다. 이제 1,000여 명의'닭'은 사라지고 양란과 함께 단 둘의'학'만이 남았다. 고위간부 하나가 능글맞은 어조로 "아무래도 용모에서 딸리는 양란이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겠다"고 말했다. 양란은 말없이 잔잔한 미소로 응대하였다.
그 간부의 모욕적인 언사는 그녀의 반응을 떠보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양란은 오랫동안 그때의 충격으로 가슴앓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1998년 미국의 한 권위 있는 잡지사는 양란을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녀로 선발하였다. 지금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고 한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용모인 거 같아요. 어떨 때는 사람들은 저를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떨 때는 못생겼다고 하죠, 그래서 전 이런 평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요. 하여튼 저의 남편이 저를 못 생겼다고는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요, 뭘."

'정대종예'의 MC를 맡으며 양란은 이런 이야기를 하나 꺼낸 적이 있다.

"험한 산이 많기로 이름난 궤이저우(貴州) 성에서 버스 한 대가 그만 산골짜기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났었어요. 먼저 빠져나온 남자 승객들이 버스 안에 있던 여자 승객들을 구해 언덕에 올려다 놓았어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한 젊은 여자 승객이 가까스로 입을 열더니 '아저씨, 제 얼굴 괜찮죠?'라고 물었어요. 하도 안쓰러워 고개를 끄덕여 주었더니 안도의 숨을 쉬고는 기절했대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이지요. 20대의 용모는 신이 주고 30대 용모의 절반은 자기가 주고 40세 이후의 용모는 100퍼센트 자기가 자신에게 준다는 말도 있어요. 외모보다 내모(內貌)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 다음에 할머니가 되면 사람들로부터 '저 여자 참 곱게 늙었구나'라는 평을 듣는 게 소원이거든요."

***인기의 고속 엘리베이터**
<사진8-3>

중국의 TV 시청자들은 1990년을 잊지 않을 것이다. 엄숙한 정치사상 교육 위주의 CCTV 화면에 신선한 용모의 긴 머리 처녀 MC가 신데렐라처럼 나타났다. 전에부터 시청자들은 MC들이 자신을 전지전능한 신처럼 생각하고 노는 꼬락서니에 내심 못마땅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아직 여대생 티가 가시지 않은 양란의 산뜻한 표정, 가식 없는 진행방식, 상냥한 음성은 수억의 중국 시청자들의 이목구비에 깊이깊이 각인되어갔다.

양란의 인기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탔고, 명성은 빌딩 맨 꼭대기 층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그 당시 회를 거듭할수록 감칠맛 나는 오락성 교양프로그램 '정대종예'는 200회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1993년 말 베이징의 쿤룬(崑崙) 호텔의 회전식 라운지에서는 60대 노신사와 20대 여인이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명멸하는 베이징의 야경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입을 뗐다.
"너는 아무래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
"너는 타고난 MC야. 그렇지만 그저 MC로만 만족해서는 안 될,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여자야."
"아이, 그런 과찬의 말씀은 마세요."
남자는 태국의 대재벌 CP그룹 총재 시에궈민(謝國民)이고, 여자는 CCTV의 MC 양란이었다.

양란은 처음에 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러는 줄 알고 약간 농담조로 대꾸했다.
"총재님께서 저를 보고 유학을 가라고 하신 말씀은 이제 MC를 그만두라는 말인가요?"
그러나 시에궈민은 한층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따위 프로그램 한두 개는 인재 한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아. 네가 대학원 과정을 마칠 때까지 등록금 체제비 등 모든 비용을 우리 CP그룹에서 부담할 것이야."
"총재님의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좋을까요. 유학에서 돌아오면 총재님의 일을 도울까요?"
"내가 미국유학을 보낸 젊은이가 한 둘이 아니야. 양란, 네가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것만이 나한데 보답하는 거야."

1994년 양란은 컬럼비아 대학 국제매스컴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초 MC로 미국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자 전 매스컴의 비상한 주목을 받으며 크게 보도되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녀를 1면 톱으로 보도했고,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몇 면에 걸쳐 스페셜 리포트를 실었다.

1996년 여름 두 번이나 에미상을 수상한 레빈슨(Barry Levinson)과 함께 공동 진행한 '2000년, 그 팀'의 두 시간짜리 다큐멘터리 드라마가 골든아워 시간에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다.
미국의 안방극장의 시청자 대부분은 열렬한 환호로서 양란을 맞아주었다. 아시아 국가의 MC가 미국 주류 매체에서 진입하고 또 호평까지 받은 경우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양란은 1996년 판 '대영백과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방학과 석사논문준비기간을 활용하여 상하이 동방TV와 '양란視線'이라는 프로그램의 PD겸 MC를 맡았다. '양란시선'은 중국의 52개 성과 시에 동시 방송되었는데 중국 전체 TV의 각종 문예 오락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또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피닉스 마약중독자 보호감호소를 취재하였고, 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박사를 인터뷰하기도 하였다.

그해 말 양란은 미국과 중국에서 거의 동시에 두 가지 행운의 축포를 쏘아 올렸다. 즉 미국에서는 컬럼비아 대학 국제매스컴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일이었고, 중국에서는 제1회 중국 TV와 라디오 우수 MC 선발대회에서 최고의 MC로 선정된 일이었다.

***물 먹인 돼지고기**

1997년 1월 양란은 산문집 '빙해임풍'(冰海臨風)을 출판하였다. 모두 50여만 권이 팔려 판매량으로만 보면 방송인 저작 사상 초유의 대박이었다. 그렇지만 양란은 그 책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물 먹인 돼지고기' 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책의 내용 분량은 7만 8천자가 전부였는데 쪽수로는 200이 넘었고, 게다가 쪽수의 절반가량이 여백이었다. 보통 중국 교양도서의 한 쪽에 수록되는 평균 글자수는 768자 정도다. 그러니까 200쪽이라면 적어도 15만자는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절반을 여백으로 채웠으니, 독자들이 '빙해임풍'을 '물 먹인 돼지고기'라고 혹평을 가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책의 맨 앞쪽이나 뒤쪽에 지은이와 펴낸이, 책의 가격 등과 함께 반드시 글자수를 명기하는 게 불문율로 되어 있다. 중국 독자들은 책의 글자수와 쪽수를 비교해 쪽수에 비해 글자수가 많으면 알찬 책으로 그 반대면 불성실한 책으로 여기는 경향은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양란이 이 책을 좀더 얇게 썼더라면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물 먹인 돼지고기'책을 낸 출판사에도 책임이 있지만 독자들은 출판사 탓은 생각지도 않고 인기 방송인 양란에게만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양란은 자서전 한번 잘못 냈다가 뜨거운 맛을 본 귀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극심한 불황으로 허덕이던 1997년 중국의 도서계에서 양란의 '빙해임풍'처럼 인기를 누린 책도 보기 드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공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질주하던 양란의 앞길에 하나 둘 책망과 조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을 욕하는 소리가 많아질수록 성공은 멀지 않다. '빙해임풍'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긴 했으나 그녀의 질주는 조금도 멎지 않았다.
1997년 4월 양란은 유엔 부사무총장의 초청을 받아 동아시아의 대표로서는 유일하게 '유엔 세계 매스컴 심포지엄'에 참석하였고, 그해 11월에는 '97년 유엔 세계 TV 심포지엄'에도 참석하였다.

양란은 '물먹인 돼지고기'라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빙해임풍'의 인세 전액을 '희망공정'(希望工程)이라는 벽지아동 교육지원사업에 기부했다. 그 대가로 양란은 중국청소년 기금회 상무이사라는 직위도 받게 되었다. 또 그해 12월 컬럼비아 대학 국제관계대학원의 이사가 됨으로써 미국 아이비 대학 리그사상 최연소 이사가 된 셈이었다.

<사진8-4>

중국중앙방송(CCTV)은 2002년 2월 현재 11개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CCTV 채널 1은 뉴스와 종합, 채널 2는 경제 생활, 채널 3은 음악, 채널 4는 국제, 채널 5는 스포츠, 채널 6은 영화, 체널 7은 군사, 채널 8은 드라마, 채널 9는 외국어, 채널 10은 교육과 과학기술, 채널 11은 연극과 경극 전문이다.
CCTV의 모든 채널은 광고를 주 수입원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인기 있는 경제 생활 채널 2와 스포츠 채널 5의 광고비는 매우 비싸다. 자본주의 한국의 KBS는 광고방송을 하지 않고 있는 데 반하여 사회주의 중국은 여타 방송국은 물론 중앙의 CCTV도 광고가 전체 방송시간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내보내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된 중간광고와 간접광고 등도 중국에서는 제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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