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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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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7>

현대중국 제일 갑부 리우용하오(下)

<사진7-1>리우용하오의 최근모습

***납치(?)당한 형제 **

후난(湖南)성 미루어(汨羅) 시의 근처에는 멱라수가 흐른다. 멱라수는 춘추전국시대 시인, 굴원이 한을 품은 채 자살한 강이다. 굴원은 중국시문학이나 중국인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국 최고의 비극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 역시 굴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굴원이 죽은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이라 하여 그를 추모하는 제삿날로 정해져 있다. 매년 이날이 되면 강남 지방의 사람들은 뱃머리를 용의 머리로 장식하고 용선시합을 성대히 벌이고 대나무와 갈대 잎으로 싼 찹쌀을 멱라수 물고기에게 던져 준다.

1992년 6월 5일은 음력으로 5월 5일 단오절이다. 그날 용하오와 용싱 두 형제는 청두(成都)발 난창(南昌)행 중국 민항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 여객기는 중간기착하기 위하여 후난의 창사(長沙)공항에 잠시 착륙하였다. 그런데 여객기의 문이 열리자마자 인민복 차림을 한 몇 명의 사내들이 기내로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용하오 형제가 앉아 있는 좌석을 에워쌌다.

“두 분 선생이 ‘희망그룹’의 지도자 동지입니까?”
“그… 그런데요.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저희들은 미루어 시에서 나왔습니다.”

무리 중에 대머리를 한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남자가 용하오에게 신분증을 내비치며 말했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기내까지 들어와 두 분 선생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미루어 시의 양식국 국장 차오(曺)모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들은 두 분의 가르침과 도움을 꼭 받고 싶었습니다.”

용하오는 그의 언행으로 비추어 볼 때 관료주의에 빠진 공직자이지 조직폭력배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소 퉁명하게 대꾸했다.
“가르침이라니요? 지금 우리는 사료공장 합작 건으로 장시(江西) 성 난창에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대머리의 부하직원인 듯한 젊은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미리 난창 시 양식국 쪽에 선생들의 방문이 며칠 늦어질 것이라고 양해를 구해놓았습니다. 난창보다 저희들이 더 화급하여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무리한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오 국장께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강 짐작이 갑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비행기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누가 마오쩌뚱 주석 고향사람 아니랄까봐 정말 터프한 후난 사람들이구나, 오죽 다급했으면 저럴까?”
“난창의 합작 건도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침 오늘이 단오절 아닙니까. 내친 김에 굴원과 단오절 행사의 본고장 미루어에서 용선시합이나 구경하죠.”
“그래, 머리도 식힐 겸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도 괜찮겠지?”
용하오 형제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비행기 트랩을 내려갔다.

미루어 시의 ‘인민복’ 차림의 사람들에게 반강제로 납치당한 용하오 형제는 규모는 크지만 허름한 어느 공장으로 인도되었다. 그 공장은 수년 동안 적자경영을 면치 못해 파산 일보직전의 국유사료기업체로서 미루어 시의 애물단지였다. 용하오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희망’과의 ‘잡교’(雜交)였다.

***굴원과 희망그룹**

용하오 형제는 낮에는 공장이라 해보았자 폐허 속의 창고같은 것들을 시찰하고 밤에는 숙소로 돌아와서 그것의 회생가능성을 조사 분석하였다.
역시 그랬다. 국유기업의 3가지 큰 장점, 즉 든든하고 넉넉한 고정자산, 광범한 판매망과 인간관계, 그리고 기술인력은 얼마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영기업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인 효율적인 경영기법과 관리는 전무한 상태였다.

“뛰어난 기업가란 일단 눈앞에 나타난 이상,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작은 기회조차 놓치지 않는다. 물고기만 있다면 크건 작건 즉시 그물을 던져야 하며, 이익만 있으면 많고 적고에 관계없이 즉시 투자해야 한다.”

3박4일의 고심과 강행군 끝에 용하오 형제는 “이들 미루어 시의 공(公)씨와 사(私)씨 ‘희망’과의 잡교를 통해 공씨 가문에게도 희망을 주도록 해보자.”라고 결심을 굳혔다.
결국 ‘희망’과 2개 국유 사료공장사이에 합작협정이 맺어졌다. 하지만 용하오 형제는 용선시합을 구경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용선시합 구경이 어디 대순가. 다음에 얼마든지 보면 되잖아. 비운의 시인 굴원은 멱라수에 몸을 던졌지만 우리 ‘희망’은 멱라수에서 말은 합작협정이지만 실은 국유기업 인수라는 대어를 낚지 않았는가.”

합작협정을 마치자마자 용하오 형제는 본래 목적지인 난창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국유 사료공장 하나와 잡교를 맺고 청두로 돌아오는 길에 후베이의 우한공항에 중간기착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도 미루어 시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기내까지 들어온 우한 시 당국자들은 역시 파산 직전의 국유 사료공장 다섯 개를 인수해달라는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용하오 형제는 회생 가능한 두 개를 골라내어 ‘희망’과의 합작협정을 맺었다.

가고 오는 길에 두 번씩이나 납치당했던 용하오 형제가 인수한 사료공장들은 두 달 여의 구조조정 기간을 거쳤다. 마침내 수년 동안 적자경영에 헤매던 이 기업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흑자경영으로 환골탈태했다.

1992년 9월, 희망그룹이 창립되었다. 리우용엔은 동사회(이사회) 주석, 용싱은 동사장(회장), 용메이는 총경리(사장), 그리고 막내 용하오는 총재며 법인대표였다. 리우용하오는 희망그룹 창립식 개막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그의 개막사는 오늘날까지 그룹의 핵심정신이 되고 있다.

"새로운 사상이나 아이디어만 있다고 온종일 시위해서는 안 된다. 저마다 훌륭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네가 어떻게 이 새로운 사상과 아이디어를 기업의 경영 속에 응용하고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
아이디어 자체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아이디어는 필경 아이디어다. 모든 사람마다 아이디어가 있지만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아이디어를 진정한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시장을 확장하려면 반드시 상품의 질을 높이되 원가를 절감하여야 한다. 원가를 낮출수록 우산은 펼쳐지고 시장은 더욱 확장되는 것이다. 우산을 접으면 그만큼 시장은 좁아지는 것이다.
서비스가 첫째이고 판매는 두 번째다. “판매가 곧 서비스다”라는 이 말은 우리 ‘희망’ 가족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제일의 덕목이다. 서비스는 질을 중히 여기면서도 양으로 승리를 획득하여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 개발은 생산력 증대의 핵심이다. ‘희망’이 계속 발전하려면 반드시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고를 쟁취하여야 한다.
우리 중국은 농업대국이다. 풍부한 농업자원이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자원’ 두 가지는 ‘희망’의 영원한 언덕이자 배경이다."

희망그룹의 탄생은 리우 씨 4형제의 사업 발전에 무한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리우용하오는 이듬해 1993년 3월, 제8대 전국정치협상위원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전국공상연합회 부주석으로 취임하였다.
민간기업인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과 정부의 인사가 기업체의 최고경영자로 임명되어온 정통사회주의국가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리우 씨 4형제는 ‘희망’의 구조를 조정하여 각자 역할 분담을 하였다. 큰형 용엔은 전자부문을, 셋째 용메이는 부동산 개발을 전담하기로 했다. 둘째 용싱과 넷째 용하오는 ‘희망’의 주력업종인 사료와 기타 업종을 양쯔 강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누었다.
양쯔 강 이북은 용싱이 맡아 ‘동방희망’을, 양쯔 강 이남은 용하오가 ‘남방희망’을 각각 창립하였다. 1997년 용하오는 다시 ‘남방희망’을 확대 개편하여 ‘신희망그룹’을 재창설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직도 희망그룹의 이름이라는 큰 틀 아래 소속되어 있다.

***가족기업이냐 족벌기업이냐?**

2001년 4월 19일, 중국 최대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신랑왕’(新浪網)의 네티즌들과 중국 제1의 갑부 리우용하오 사이에 치열한 격론이 벌어졌다.

'네티즌1 : 리우 총재께서 직할하는 ‘신희망’에는 사료말고 무엇이 있습니까?
용하오 : ‘신희망’의 주력업종은 역시 사료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사료 외에 금융업이나 부동산업 국제무역 부분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IT사업과 첨단과학기술 부문에 대한 투자도 면밀히 조사하고 있습니다.

네티즌2 : 창업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용하오 : 저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월 50위안도 안 되는 교사 봉급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수입이 좀더 많았으면 하는 욕망이 창업의 최대 동력원이었던 같습니다.

네티즌3 : 당신의 가족기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용하오 : 우리는 단돈 1000위안으로 창업했습니다. ‘희망’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고작 개체호(客體戶.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구멍가게)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수년 후 형제들이 경영하는 민영기업이 되었으며 지금은 현대화 기업경영을 향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네티즌4 : 네티즌3의 질문에 대한 귀하의 답변이 불충분한 것 같습니다. ‘희망’은 분명히 리우씨 4형제들이 공동으로 창립한 가족기업이 아닙니까?
용하오 :우리는 개체호로 출발하여 가족경영 기업형태로 변화했습니다. 1992년과 1995년 두 차례의 구조조정을 거쳤습니다. 현재 ‘희망’은 민영기업이자 상장회사입니다. 또한 국유기업과 합작한 기업이며 앞으로 현대화 기업경영을 이룩하려고 합니다.
네티즌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족기업 자체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동남아 대부분의 유명 대기업들은 모두 가족기업 형태입니다. 미국도 또한 적지 않은 가족기업이 있습니다. 세계에는 역사가 수백 년 이상 된 유수한 가족기업이 많고 이들은 오늘날 세계 500대 기업에 들고 있습니다.

네티즌4 : 우리와는 다른 자본주의체제의 외국을, 특히 미국도 가족기업이 많다고 그것이 괜찮다는 해석은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요. 다시 보충 질문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족기업은 수많은 폐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건전한 국가경제와 기업발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요?
용하오 : ‘희망’은 가족기업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가족기업의 의미는 사주의 자식이 당연히 회사를 세습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족벌기업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가족식 경영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즉 ‘희망’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저는 ‘신희망’을 창설했으며 몇 가지 부문은 제가 새로운 모델을 창안해 낸 것입니다. 즉 우리 회사의 전체 사원이 저의 가족입니다. 또한 우리 회사의 주주들입니다. 사원들은 투자한 주식 비율대로 이익을 배분 받습니다. 기술도 주식화했습니다.
‘희망’이나 ‘신희망’이나 막론하고 경영 능력이 가장 탁월하고 그룹발전에 공로가 제일 큰 자가 당연히 후계자가 되리라 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기업 패러다임을 창출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가족식 경영기업도 족벌기업도 아닙니다. 미래의 현대화기업경영을 추구하는 현재의 가족기업입니다.'

‘희망’ 산하의 모든 계열사의 구내식당에는 간부식당이 없기로 유명하다. 총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구내식당에서 평사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다. 용하오가 평소에 가장 즐기는 메뉴는 샥스핀이나 전복요리 등 산해진미가 아니라 마파두부와 회이궈로우(제육볶음) 등 대중음식이다.

***졸부 짓일랑 그만둬라**

익명성이 보장되어서인가? 사회주의 중국의 네티즌들도 과감하고 솔직한 편이다.

'네티즌 5 : ‘희망’의 고속성장은 정부의 강력한 지지와 결탁이 있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희망’이 정말 어떠한 특혜도 받지 않고 시장경쟁에서 승자가 된 것입니까?
용하오 :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금력으로 권력을 사서 모든 것을 전횡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과거’ 적 얘기입니다. 오늘날은 금전 대신에 지식, 수양, 가치관 등이 권력을 형성하는 시대입니다.
둘째, 저는 상인입니다. 그리고 민영기업가입니다. 저는 주로 사료업에 종사해왔습니다. 사료의 원료는 양곡입니다. 정부가 정한 표준양곡을 남들과 같이 똑같은 물건, 똑같은 가격으로 구입했습니다. ‘희망’은 정부로부터 어떠한 특혜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셋째, 저는 중국공상연합회 간부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책을 이용하여 어떠한 편의와 우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희망’의 실적이 좋았던 이유로 상장기업이 된 것뿐입니다. ‘희망’이 다른 기업보다 지명도가 조금 높고 영향력이 좀더 있다고 생각해서 몇몇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티즌6 : 당신은 어디에 쓰려고 그토록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까?
용하오 : 사실 제가 번 돈은 세계적 기업인에 비하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1999년 9월에 상하이에서 세계 500대기업 기업주 등 세계 저명인사들이 참가한 ‘포춘 글로벌 포럼’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Jerry Yang)과 CNN방송 사장 테드 터너(Ted Turner) 등과 같은 팀이었는데 거기서 우리 중국 경제 실력은 선진국과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특히 제리 양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이 동업자보다 겨우 3개월 정도 앞섰다는 겁니다. 악착같이 노력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추월 당할 거라고 합니다. 경쟁자보다 한 단계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기 위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일수록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네티즌7 : 중국에서 최고로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젊은이에게 들려줄 충고는?
용하오 : 저는 아직 성공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적 성공 또는 성공 과정 중에 있는 기업인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한 기업의 성공 여부는 최소한 20, 30년은 두고 보아야 합니다.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처음 3~5년 동안은 펄펄 날다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희망’의 상대적 성공은 10년을 하루같이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일해온 덕분입니다.
금융과 인터넷 컴퓨터 생물공학 분야 등등 수많은 기회가 여러분에게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반드시 지식의 기반 위에서 잡을 수 있습니다. 지식경제시대에서 가치창조는 십 여 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이것은 신경제시대가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식과 신념과 정열! 이 세 가지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성공인이 반드시 구비해야할 필수사항입니다.

네티즌8 : 중국 민영기업이 가장 부족한 것은 어떤 분야입니까? 자금 아닌가요?
용하오 : 당연히 자금이 중요하지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 민영기업의 역사가 매우 짧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겨우 개혁개방한 지 20년이고 민영기업의 발전은 십 여 년입니다.
WTO 기존 회원국들의 수준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금보다 기업을 어떠한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 경영하는가가 더 근본적입니다.

네티즌9 : ‘희망’의 앞으로의 희망에 관하여 말씀 해주세요?
용하오 : 사료업과 양식업과 식품업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00년 후에도 1만 년 후에도 사람은 단백질을 섭취해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중국 13억 인구는 5800만 톤의 사료를 생산합니다. 미국 3억 인구는 1억 여 톤의 사료를 생산합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중국 사료업 발전의 여지는 무궁하지 않나요?
‘희망’을 세계에서 최대 사료회사로 성장시키는 것이 최고의 희망입니다. 앞으로도 ‘희망’의 변함 없는 토대는 사료를 비롯한 농산품일 것입니다.
90년대 이후부터 우리는 부동산업과 은행과 증권업계에 진출하여 비교적 양호한 실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IT방면 진출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네티즌10 : 총재님 형제들은 모두 검소한 생활을 하시는 걸로 이름높습니다. 그 많은 재산으로 맛있는 요리와 좋은 옷 입고, 또 벤츠도 타고 다닐 만 하지 않습니까? 이제 좀 쓰세요.
용하오 : 저의 재산은 사회의 재원입니다. 단지 제가 그것을 잠시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그 재원을 낭비할 권리가 없습니다.'

1999년 가을 어느 날, 용하오 부부는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한 싸구려 호텔에 묵었다. 아침에 식사를 하려고 호텔식당에 갔는데 가격표 상에는 한 사람 당 88위안(1만 4천 원 가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들은 뒷걸음치다시피 호텔 밖으로 나가 근처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은 한 사람 당 40위안. 억만장자 내외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결국 길거리의 노점상에서 하나에 4전짜리 꽈배기 몇 개를 사 가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결국 문서를 검토하면서 조찬문제와 시간을 둘 다 해결하였다. 용하오가 가장 즐겨 쓰는 말이 하나 있다.

'졸부 짓일랑 집어치우고 큰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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