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리 용을 부리다**
한 나무꾼이 산에서 선인을 만나 물었다.
“무엇이 ‘모험’이며 무엇이 ‘무모’입니까?”
선인은 수풀 속의 동굴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동굴에 금은보화가 가득 들은 보물상자가 있다. 네가 그것을 갖고자 한다면 반드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저 동굴에 늑대가 산다면 ‘모험’일 것이고 호랑이가 산다면 ‘무모’일 것이다.”
나무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선인은 말을 이었다.
“만일 동굴에 나뭇더미만 한 다발 있고 박쥐들이 살고 있다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모험’이 아니라 ‘무모’라고 할 것이다.”
모든 성공한 사람은 모험가다. 그들은 자기의 목표를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였다. 세상에 아무 손실의 부담 없이 얻어진 성공은 없다. 또 아무 희생 없이 얻어진 성공은 참다운 성공이라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성쉬안화이는 확실히 성공한 사람이었다.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에 맞선 전쟁에서 연전연패는 청나라 정부의 부국강병 의지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특히 1883년 청불전쟁의 패배는 그간 군사공업 위주의 양무운동을 좌절에 빠뜨렸으며 이홍장을 비롯한 양무대신들을 심적으로 크게 위축시켰다. 그때 성쉬안화이는 이렇게 말하며 나섰다.
“서양 사람이 중국에 온 것은 통상을 위한 것이지 전쟁을 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서 전쟁은 수단이고 통상은 목적이다. 이 점을 조정은 냉철히 파악하여 침착하게 대처해나가면 전쟁 위기는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19세기 말 근대중국의 4대 주요산업은 해운과 전신, 광업과 방직업이었다. 19세기 90년대 전에 성쉬안화이는 해운과 전신, 광업을 장악하더니 90년대 이후에는 나머지 방직업마저 쓸어 쥐었다.
1893년 당시 중국 최대의 방직공장 상하이기계직포국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이홍장은 톈진에 머물던 성쉬안화이를 상하이로 급파하여 잿더미로 변한 방직공장의 사후처리를 당부했다.
성쉬안화이는 단순히 사후처리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주식을 공모하고 부족분은 윤선초상국과 전보국에서 갹출한 2백만 량으로 공장재건에 투입하였다. 2년 후 그는 잿더미 위에서 새롭게 태어난 상하이기계직포국의 독판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대한 포부, 초인적 돌파력과 절륜한 정력을 겸비한 성쉬안화이는 4대 주요산업을 석권한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일찍이 1889년 제철업 참여를 놓고 성쉬안화이는 장지동(張之洞)과 담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장지동은 정부가 직영할 것을 고집한 반면 성쉬안화이는 경영은 민간상인에게 맡기고 정부는 뒤에서 후견인 역할만 할 것을 주장하여 담판은 결렬되었었다.
정부직영의 한양제철소(漢陽製鐵所)는 해마다 적자경영을 면치 못했다. 1894년 산더미같이 늘어난 적자를 견디다 못한 장지동은 그제야 제철소를 민영으로 이관하고 그 경영을 성쉬안화이가 맡아줄 것을 의뢰했다. 성쉬안화이는 만신창이가 된 기업을 인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다가 장지동에게 한 가지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한양제철소 생산 철강의 원할한 판로확보를 위해서 노한철로(盧漢鐵路, 베이징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후베이 성 우한을 잇는 중국 제1의 간선철도)운영권을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장지동은 이 조건을 마뜩찮았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기실 성쉬안화이가 눈독을 들인 것은 한양제철소보다는 덤으로 묻어온 셈인 이 철로 운영권이었다. 이제 성쉬안화이는 탄광과 철광, 제철과 철로를 하나로 연계시킨 한 마리 거대한 용을 부리게 되었다.
***실사구시**
<그림1> 톈진대학 교훈인 ‘실사구시’
중국 개혁개방의 그랜드 디자이너 덩 샤오핑(鄧小平)이 제일 애호하던 고사성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였다.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라는 뜻.
그런데 ‘실사구시’는 근대중국의 상부, 성쉬안화이가 이미 1백여 년 전부터 가장 즐겨 쓰던 말이었다.
1895년 10월 2일, 톈진 세관장 성쉬안화이는 청나라 9대 황제인 광서제(光緖帝)로부터 톈진에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을 창건해도 좋다는 칙령을 받았다. 북양대학당은 근대중국의 최초의 대학이자 현대 중국의 명문대학인 톈진 대학교(天津大學校)의 전신이다.
성쉬안화이는 북양대학당의 초대 독판(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대학의 교훈을 ‘실사구시’로 정하였다. 그 후 1백여 년이 넘도록 이공계 중심의 이 명문대학교는 전교과과정의 기본 정신으로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캠퍼스 내의 울창한 송림처럼 희망찬 미래를 향해 쭉쭉 뻗어나갔다.
1912년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북양대학당은 국립북양대학교로 개명되고 국내외적으로 드높은 명성을 날렸다. 이 대학의 우수 졸업생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과 예일대학의 대학원을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었다.
1896년 성쉬안화이는 윤선초상국의 자금 10만 량과 기타 민간자본을 모금하여 상하이의 쉬자후이(徐家匯)에 남양대학당(南洋大學堂)을 창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베이징대, 칭화대와 함께 중국 6대 명문대학에 든다는 상하이 자오퉁(交通) 대학이다.
앞에서 말 한대로 중국 국가주석 겸 총서기인 장쩌민이 모교이기도 한 이 대학은 상하이 이외에도 베이징의 베이팡(北方)자오퉁, 싼시 성 시안(西安)의 시안자오퉁, 쓰찬 성 청두(城都)의 시난(西南)자오퉁, 심지어 타이완의 신주(新竹)에 위치한 자오퉁 대학 등 자오퉁 대학이란 명칭의 대학이 중국 대륙과 섬에 걸쳐 무려 5개소나 있다. 이들 자오퉁 대학은 모두가 우수한 이공계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명문대학들이다.
<그림4>북양대학당(텐진 대학)의 엠블렘
<그림4-1>남양대학당, 지금의 상하이 자오퉁 대학의 구관
성쉬안화이는 근대 상공업을 창립하고 경영하면서 두 가지를 절절히 깨달았다.
첫째는 중국 과학기술의 낙후와 인재의 결핍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유능한 인재를 육성할 학교를 세우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었다.
청말 양무운동의 최선봉대장이자 매판 거상이며 청조말 대신을 지낸 성쉬안화이에 대한 평가는 중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고 이러쿵저러쿵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나 그가 창건한 북양대학당과 남양대학당이 중국 근대화와 현대화에 미친 공헌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함부로 반박하지 못한다.
지금 성쉬안화이의 동상과 흉상은 텐진 대학과 중국과 대만 모두 5개소의 자오퉁 대학 내에 서 있다. 한사람을 기리는 기념물이 6개 명문대학 교정에 동시에 모시어져 후학들에게 누대로 존경받는 행운은 아마 마오쩌둥도 덩 샤오핑도 누리기 힘든 영광일 것이다.
비상한 혜안의 소유자 성쉬안화이는 대학을 창립함으로써 역사가 그에 가하는 평가에 보험을 든 것은 아닐까?
***은행은 백업의 근간**
<그림5> 중국 최초의 근대 은행, 상하이 중국통상은행
“효도가 백행의 근본이듯 은행은 백업의 근간이다.”<성쉬안화이>
1847년 외국은행이 처음으로 중국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근대적인 금융기관인 치엔좡(錢庄), 파오하오(票號), 장쥐(帳局) 등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개항 이후 50년이 넘도록 중국 자신의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은 탄생하지 않았다.
1887년 이홍장과 성쉬안화이, 마건충(馬建忠) 등이 미국상인 미젠웨이(S.J. Mizzenway)와 함께 가칭 화미은행(華美銀行) 설립을 추진하려다가 수구적인 서태후와 노신들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쳐 구상단계에서 유산된 바 있다.
청일전쟁의 패전 후, 1896년 호부상서(戶部尙書) 옹동화(翁同和)는 베이징에 1875년 미국 은행법에 규정된 국립은행을 모방한 국가은행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원래 이 의견을 창안한 용(容) 모씨를 미국으로 파견하여 국립은행의 설립방안을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성쉬안화이는 그해 10월 국립은행설립안을 반대하고 민간은행을 창립하자는 주장이 포함된 상소문(條陳自强大計折)을 올렸다.
“효도가 백행(百行)의 근본이듯 은행은 백업(百業)의 근간입니다. 공자가 다시 태 어나서 다시금 천하를 주유하겠다는 웅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제 돈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신은 수년간 철광과 광산, 철도 등 일체의 상공업을 경영하면서 우리 자신의 은행이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껴왔습니다. 감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은행 없인 다른 업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은행은 백 가지 업종의 근본이자 국가의 근본입니다. 은행을 통해서만 국가의 재물을 순조롭게 모을 수 있으며 국가의 이익도 원활하게 도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은행이 있으면 서양인으로부터 차관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성쉬안화이는 자국 은행의 자금지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식하였다. 국가 기간시설 건설에 드는 자금이 천문학적 숫자이고 자본 회수기간이 장기간이였기에 은행의 자금지원 없이는 성공하기가 힘든 사업임을 절감하였다.
성쉬안화이는 철도총공사의 독판에 임명된 후부터 호광(湖廣)총독 장지동의 지지를 구하고 민간은행 창립을 호소하는 간곡한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렸다. 마침내 1896년 10월, 청 정부는 성쉬안화이를 은행창립준비 총책임자로 임명하였다.
***화룡점정**
성쉬안화이는 재력가 8명을 골라 공동 이사장으로 위촉하는 등 민간상인들로 이사회를 조직하고 그들로부터 2백만 량의 자금을 동원하였다. 자신은 그가 조정하고 있던 윤선초상국과 전보국으로부터 각각 80만 량과 20만 량을, 본인 명의의 73만량 해서 총 1백73만 량을 투자하였다. 은행설립 자본의 40퍼센트를 점하는 액수였다.
은행창립 과정에서 성쉬안화이는 외국 제국주의의 방해와 간섭을 많이 받았다.특히 러시아는 중아동승은행(中俄東勝銀行)의 창립을 내밀히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만 성쉬안화이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닭 좇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성쉬안화이가 은행을 창립하지 못하도록 온갖 음해와 흑색선전을 퍼뜨리고 다녔다. 성쉬안화이는 민간은행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지원과 도움 없이는 탄생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정의 제한적 참여를 유도할 목적으로 6년 거치 원리금 균등상환이라는 조건으로 2백만 량의 국고를 대부받았다.
그러는 한편, 민간상인들에게는 조정의 출자금과 관련한 의혹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대부한 자금은 은행의 주식으로 절대 전환되지 않을 것이며 잠시 대부받는 조건이라는 점을 민간출자자들에게 누누이 강조하였다. 윤선초상국을 창건할 당시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성쉬안화이의 전략은 은행은 관으로부터는 뒤를 보장받고 상인으로부터는 앞장서 안심하고 투자에 참여하고 운영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즉 평형의 술책을 극대화한 것이다.
1897년 5월 27일, 상하이에 중국 최초의 은행 중국통상은행(中國通商銀行)이 창립되었다. 영문으로는 The Imperial of China으로 표기하였는데 우리 나라와 달리 중국에서는 국립은행보다도 먼저 상업은행이 창설된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청 정부는 이 은행에게 은행권을 발권할 특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여신과 수신업무 등 상업은행의 기능도 주었다. 이듬해 중국 최초로 은행권을 발행하게 된 중국통상은행은 지점수만 해도 톈진, 한커우(漢口), 광저우(廣州), 산둥, 옌타이, 전장(鎭江)과 베이징 등 10여개를 넘었다.
1899년에는 은행이 보유한 예금 총액은 3백97만 량에 이르렀으며 그해부터 6개월에 한 번씩 은행주식소유자들은 총 40만 량의 이윤을 분배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은행을 창립함으로써 용을 그린 다음 맨 마지막에 용의 눈을 그려 넣듯 성쉬안화이의 상업제국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전중국의 모든 업종과 돈줄이 그의 한 손아귀에 장악되었다. 그 몇 년간이 기업인으로서의 성쉬안화이의 최고 전성기였다.
***높을수록 타락한다**
“타락자는 누군가? 너무나 열심히 돈과 권력을 추구했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 정도를 추월해버린 인간이다.”<‘악마의 사전’>
성쉬안화이는 반은 상인, 반은 관료였다. 그러나 그는 중년에서 말년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들어서자 봉건적인 특권을 사수하려는 관료의 전형으로 변해갔다. 관직이 높아지면 질수록 민족자본을 발흥시키려는 애국적 상인으로서의 의지는 희박해져갔다.
외세의 경제 침탈에 대한 증오심도, 민족자본을 축적하겠다는 정열도 날이 갈수록 식어갔다. 이러한 특성은 1897년 그가 톈진 세관장에서 일약 황제를 직접 알현하여 상주할 권한을 가진 지위(太常寺少卿,차관급)로 승진하면서부터 뚜렷해지기 시작하더니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완전히 매판 매국노로 변해버렸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자 성쉬안화이는 피를 부르는 무력 진압 작전을 주장하고 기획하였다. 서태후로부터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극찬과 상공업을 총괄하는 상무대신(商務大臣, 장관급)의 요직을 하사받았다.
그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08년의 일이었다. 그해 성쉬안화이는 기존의 한양제철소, 다예철광, 징먼탄광의 3개 대기업을 한예핑(漢冶萍) 제철공장 하나로 합병하여 그 자신이 제1총재를 겸직하였다.
청말 전중국의 주요 기간산업을 한 개로 묶다시피 한 초유의 거대기업 한예핑의 창립자금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받은 거액의 차관으로 충당되었다. 일본으로부터 빌린 차관은 일본 세력의 대륙 침탈을 돕는 일종의 마취제 내지 최음제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일본의 힘으로 서양 세력의 침투를 억제한다는 미명 아래 한예핑을 비롯한 기타 중국인 소유의 광산과 공장 등이 하나 둘씩 일본인 수중으로 들어갔다.
한예핑 창립 직후, 성쉬안화이는 일본으로 산업시찰을 가게 되었다. 일본조야의 각계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대청제국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대기업가이며 청일합작의 선봉장으로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청일이 연합하여 서양 세력을 억제하자고 꼬드겼다.
일본의 극진한 대우에 성쉬안화이는 정신이 몽롱해져 중일이 같은 문자를 쓰고 같은 종족이라며 감격에 겨워 밤잠을 잊을 지경이 되었다.
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려는 일본의 흑심을 간파하지 못한 성쉬안화이는 오히려 될 수 있으면 일본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주려고 애썼다. 한예핑의 창설에 사유재산의 대부분을 투입한 성쉬안화이는 한예핑의 자산과 자신의 사유재산 몫 사이에 분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외채를 빌리는 명목으로 자신의 몫을 더욱 크게 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차관은 그의 이러한 의도에 맞아 떨어졌고, 한예핑은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 신해혁명 전야에 벌써 한예핑을 가리켜 사람들은 ‘이름만 중국 것, 사실은 일본 것’이라고 풍자했다.
***최하의 상태는 최고의 상태에서 생긴다**
성쉬안화이의 매판성은 돌아오지 못 할 다리를 건넜다. 그에 대한 중국 민중들의 평가가 낮아질수록 그의 정치적 직위는 오히려 높아만 갔다.
1911년 1월, 성쉬안화이는 교통통신 담당 부총리급(郵電部尙書)으로 승진하여 황족 내각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최하의 상태는 종종 최고의 상태에서 생기는 법이다.
그해 5월, 청나라 조정은 전국의 민영철도를 국유로 선포하였다. 차관을 공여 받는 대가로 4개국에 각각 호광철도를 비롯하여 주요 철도노선의 경영권을 팔아먹었다.
이제 중국의 철도는 몽땅 명색만 국가소유이고 실상은 외국인 소유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철도 국유화령은 결국, 분노한 민중들의 광범위하고 극렬한 시위를 촉발하게 되었다. 성난 민중들은 매판자본가 매국관료의 우두머리 성쉬안화이의 타도를 외치면서 각지에서 일어났다.
철도 국유화령에 반대해 후베이와 쓰촨을 중심으로 활발한 국유화 취소운동이 일어났다. 쓰촨 성 청두에서는 ‘보로동지군(保路同志軍)이라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그들은 철도 국유화령에 반대하는 봉기를 촉구하고 전국 각 현에 분회를 조직하며,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보로동지군은 성의 10여 개 주현을 점령하고, 곧이어 우창에서 활동하던 혁명단체 공진회(共進會), 문학사(文學社) 등과 연합해 통합 지휘부를 조직하여 각 성과 연락 계획을 수립하였다.
드디어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무한 봉기가 폭발하였다.
10월 26일 제국의 운명이 경각에 다다르자 청 정부는 성쉬안화이를 모든 공직으로부터 파직시키고 전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자 그는 일본의 비호를 받아 청두로 피신했다가 다롄(大連)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12년 10월, 그는 혁명이 슬럼프에 빠진 틈을 타 일본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제정복고를 획책하고 자신의 사유재산을 반환 받기 위해 아득바득 애쓰는 등의 노추(老醜)를 연출하다가 1916년 4월 향년 72세로 상하이에서 병사하였다.
비록 결과론이지만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성쉬안화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이 20세기에 걸쳐져 있었음은 그 개인으로 보나 국가로 보나 ‘치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 일각에서 그에게 부여하는 ‘근대중국의 상부’라는 명예는 다소 과분하다는 감이 든다. 그래도 굳이 그렇게 부르겠다면 좀더 범위를 명확히 하여 ‘19세기 중국의 상부’라고 하는 게 보다 더 적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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