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주식회사, 최초의 M&A**
지금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국을 가리켜 흔히‘중국주식회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근대중국의 최초의 주식회사는? 중국의 근대적인 주식회사, 즉 ‘구펀공스(股分公司)’는 서양으로부터 건너왔으나 아편전쟁 이전부터 광둥 지방에는 영국의 주식회사가 몇 개 진출해 있었다. 1842년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에는 서양의 주식회사 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회사는 수십 명의 상인이 출자하여 운영하는 데 그 이익과 권리는 출자한 금액 만큼 분배된다.'
1873년 성쉬안화이가 관독상판체제로 개편한 윤선초상국은 중국 최초의 주식회사로 공인받고 있다. 윤선초상국은 상인들의 주식출자가 활성화되자 돌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중국 최초의 주식회사가 제일 먼저 마주친 경쟁 대상업체는 바로 미국자본의 기창윤선양행(Russel & Co)이었다. 오랜 역사와 막강한 자금력의 기창윤선은 윤선초상국을 병탐할 목적으로 운임을 절반 이하로 대폭 낮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창윤선의 자충수(自充手)였다. 윤선초상국은 비록 자금력은 약했지만 관독상판기업이라 관방의 도움을 받아 도산하지 않고 그럭저럭 꾸려나갔다.
반면 기창윤선은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손실로 인해 안으로 골병이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운송료 50퍼센트의 삭감조치를 취한 지 3개월도 못 돼서 기창윤선의 주가는 1백2량에서 60여량으로 대폭락 사태를 맞았다.
성쉬안화이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가히 파천황이라 부를 만한 파격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즉 기창을 인수합병 해버리자는 것이었다. 기창의 자본금은 무려 2백만 량이었으나 윤선은 고작 기창의 20분의 1인 10만량에 불과했다.
소기업이 자신보다 20배나 큰 대기업을 인수하는 제안에 서윤과 주기앙 두 회판은 일소에 붙여버리고 총판 당정추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자 성쉬안화이는 이홍장의 심복인 양강총독 심보정(沈葆禎)을 찾아가 국고지원을 요청했다.그러나 심보정 역시“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지만,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기다리자”라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성쉬안화이는“작게 지혜로운 자는 기회를 기다리고, 크게 지혜로운 자는 기회를 창조하는 것이오”라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심보정은 성쉬안화이의 전폭적인 후원자이자 자신의 상사였던 이홍장의 체면을 생각했고 성쉬안화이의 용이주도한 지략과 변설에 자신도 모르게 설득되었다.
상하이로 돌아오는 성쉬안화이의 대형 트렁크 속에는 2백만 량의 거액이 들어 있었다. 얼마 후 윤선초상국은 기창윤선양행의 모든 것을 인수합병했다.
이것은 중국 기업사상 최초의 인수합병(M&A)이었다. 또한 소자본의 중국 기업이 대자본의 미국 기업을 흡수통합한 일대 거사였다. 당시 중국 최대의 일간지 선바오(申報)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그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중국 뱀이 미국 코끼리를 삼켰다’
***뱀이 코끼리를 삼키다**
대어를 낚으려면 먼저 좋은 미끼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먼저 길을 잘 닦아두어야 한다. 작은 일은 작은 길을, 큰일은 큰길을 닦아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성쉬안화이는 인간관계와 사업에서 우선 막힘없이 길을 닦아두었으며 그 길 위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의 성공은 길을 막힘없이 잘 뚫어두었다는 데 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양무운동이 일어났던 청말은 영웅을 낳아야 할 시대였고 그것을 위해 힘써야 할 인물이 필요했던 시대였다. 그 인물이 곧 성쉬안화이였다.
그러나‘기창’이라는 코끼리를 삼켜 뱀에서 일약 용으로 변신한 윤선초상국에 더 큰 강적이 나타났다. 대영제국의 거상 덴트(Henry W. Dent)가 창건한 이화선박공사(怡和船舶公司, Jardine Matheson & Co)와 그와 맞먹는 실력을 가진 태고선박공사(太古船舶公司, Dent Beale & Co)가 그들이다.
그들은 기창의 최후를 목도하였으면서도 자신들의 막대한 자본력을 믿고 오기라도 부리듯 운송료를 대폭 인하했다. 이번에도 성쉬안화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두둑한 배짱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상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푸른 눈에 노랑머리를 한 서양상인들이 왜 자기 고향을 놔두고 이역만리 중국땅에까지 왔는가? 그것은 단 한 가지, 하루라도 빨리,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그들이 제아무리 풍부한 자금력을 보유하였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제 살 깎아 먹는 할인정책을 펼 수는 없으리라.”
반면에 윤선초상국은 관독상판체제라 3개월의 조운량만 있으면 1년 동안 그런대로 버텨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이들 사이에는 피를 말리는 지구전이 얼마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공멸보다 상생의 길을 찾기로 했다. 태고와 이화, 윤선초상국의 삼자는 1877년 겨울 제1차 가격 카르텔 협상을 체결하였다. 중국 상업사는 중국 기업이 외국 업체와 체결한 최초의 카르텔로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성쉬안화이는 곧이어 윤선초상국 내부로 눈길을 돌려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과감한 인력 감원조치를 단행했다. 잉여노동인력 3분의 1을 정리해고하자 1878년부터 윤선초상국의 수익금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이 근대중국 최초의 주식회사를 성쉬안화이는 비전과 직관을 가지고 탁월한 전략, 과감한 결단으로 건실하게 성장시켜나갔다. 밖으로는 인수합병과 가격 카르텔로 연대하고, 안으로는 구조조정과 자본주의적 경영합리화를 도입했다. 그야말로 그는 근대중국 최초이자 최고의 CEO (Chief Executive Officer)라고 할 만하다.
1870년대 양무운동 기간 중국의 산업 중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군수산업과 선박해운업이다. 그러자 석탄과 철강의 수요와 운송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윤선초상국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성쉬안화이는 다시 광산의 개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철광 먼저, 석탄 다음**
성쉬안화이는 “석탄보다 철광이 먼저고, 또 그 철은 양질의 철을 우선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홍장도 성쉬안화이가 앞장 서 개발하는 광산을 중국 광산업 진흥의 본보기로 삼았으며 전국에 보급하고 확산시킬 요량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1878년 성쉬안화이는 후베이의 다예(大冶)철광을 탐사하였는데 철의 품질은 물론 매장량도 풍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외국에서 굴착기와 종합 채굴기, 컨베이어벨트, 광차 등 신형장비를 구입하고 선진 야금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서양인 광산 전문가를 초빙했다.
서방기술을 활용하여 채광하고 야금까지 시도한 것은 성쉬안화이가 처음이었다. 지금도 후베이의 다예철광은 랴오닝(遼寧) 성의 안산(鞍山), 쓰촨의 판즈화(攀枝花)와 함께 3대 철광 생산지로 손꼽힌다. 참고로 2000년 말 현재 중국 철광석의 연간 생산량은 약 2억 톤이며, 강철의 생산량은 세계 4위이다. 이미 확인된 매장량은 4백50억 톤으로 세계 3위이다.
다예철광 개발에 고무된 성쉬안화이는 연이어 탄광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손을 댄 광지(廣濟)탄광은 매장 층이 얇은데다가 제철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저품질로 밝혀져 포기하였다.
그 다음 탐사한 징먼(荊門)의 당양(當陽)석탄은 제철용으로 적합한 고품격이었지만 채굴 자금이 예상액을 훨씬 초과하였다. 그런데 정부지원 자금은 철광개발에 거의 다 투입해버렸기 때문에 탄광개발에 드는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성쉬안화이는 순수 관영 후베이매철총국(湖北煤鐵總局)을 해체하는 대신 관독상판체제인 징먼광무총국(荊門鑛務總局)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징먼광무총국은 기대했던 것보다 투자자가 적었다. 겨우 5천주, 즉 5만량을 모집했으나 이는 원래 재원확보 목표에는 어림없는 액수였다. 다시 주식을 공모했지만 징먼탄광은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탄광개발에 드는 원가가 너무 높아 선뜻 투자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탄광을 개발할 수 없었으니 그 연쇄반응으로 다예철광도 더 이상 가동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홍장도 점점 광산업에 자신감을 잃어갔다. 결국 징먼광무총국은 폐쇄되었고 성쉬안화이도 무려 1만 6천여 관을 국고에 변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쉬안화이는 조금도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의 경험을 귀감으로 삼아 광산개발의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틈틈이 광산 기술자를 인솔하여 탐사하거나 직접 광산개발에 출자하였다. 그가 후세에 남긴 광산은 앞서의 다예철광과 랴오닝 성의 진저우(錦州) 광산이다.
그에게 모든 것은 결과의 성패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시도 그 자체였다. 성쉬안화이는 중국 근대광업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현재 석탄은 중국의 주요 동력자원으로 매장량이 4조5천억 톤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전세계 석탄자원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장량과 생산량은 모두 세계 1위다.
중국의 석탄자원은 그 분포지역이 매우 광대하며 주로 산시(山西)와 네이멍구(內蒙古) 동북지구에 분포되어 있다. 산시는 일반적으로‘석탄의 고장’(煤炭之鄕)이라 불린다. 산시 성의 다퉁(大同)과 타이위안(太原), 랴오닝 성의 푸순(撫順), 허난(河南 ) 성의 핑딩산(平頂山) 등의 탄광이 현재 중국의 중요한 석탄 생산지역이다.
***자본주의 vs 봉건주의**
성쉬안화이는 이렇게 말했다.
“남보다 먼저 시장의 판세를 예측하는 일은 비 오기 전에 창문을 수선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것은 남보다 한 발 먼저 우세를 확보하는 길이다. 즉 기선을 제압하는 책략이 최고다. 전쟁이나 장사나 신속성이 제일이다. 먼저 말에 오르고 나중에 채찍을 가하라.“
아는 바와 같이 성쉬안화이는 근대중국 최초의 주식회사 윤선초상국을 창립한 인물이다. 또한 최초로 외국 기업을 인수합병 했고 가격 카르텔 협정을 맺었고 최초로 선진 기술과 장비를 도입하여 광산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윤선초상국을 창립하여‘혈맥’이라 할 운수업을 경영한 성쉬안화이가 다음으로 도전하고 싶었던 것은 가히‘신경’으로 비유되는 통신 분야였다.
1860년부터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끈질기게 중국 땅에 전신선을 개설하길 요구했다. 외국에 의한 통신권 장악을 두려워한 청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듣는 둥 마는 둥 차일피일 미뤄만 왔다.
양무운동의 성과로 근대산업이 흥기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청 정부는 전신선 개설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에 성쉬안화이는 주어진 시대적 기회를 정확히 포착했다.
그는 이홍장에게 전신국의 개설을 전격 건의했다. 한편 이와 거의 동시에 호설암도 좌종당에게 똑같은 제의를 하였다. 결국 쌍방간에 전신사업의 선점권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권력, 재력, 지력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전방위 용호상박전이 치러졌다.
성쉬안화이-이홍장 팀, 호설암-좌종당 팀간의 먹느냐 먹히느냐의 일대혈전. 그러나 전자가 내세운 것은 선진적 자본주의의 생산력이고 후자가 의지한 것은 낙후한 봉건주의적 생산력이었다.
역사발전 법칙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성쉬안화이-이홍장 팀이‘당연한’승리를 거두었다. 1881년 텐진(天津) 전보총국이 성립되고 성쉬안화이는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신업에서 자신의 상재(商才)를 마음껏 발휘하였다.
과감히 “상무(商務)를 최우선으로 삼고 상무를 이롭게 하자”를 전보총국의 제1의 구호로 삼았다. 그리고 인재양성에 주의를 기울여 텐진전보학당을 창설하여 많은 통신 전문인을 양성했다.
그밖에도 모든 전신장비에 대해 면세특권을 적용했고 전보국은 세금을 감세해주었고 전신의 안전은 치안당국의 보호를 받게 했으며 전신부호의 통일을 제안했다.
이익을 다투는 데에는 으레 경쟁자와 충돌이 생기게 마련이다. 덴마크와 영국의 전신회사와 마찰이 발생했을 때 성쉬안화이는 이들과의 집요한 물밑교섭을 통하여 1889년 마침내 가격 카르텔 협정을 체결하였다. 서양상인과 이익을 나누어 가지자라는 성쉬안화이의 앞을 내다본 전략이 주효했다. 1890년 분국만 해도 1백여 곳이 넘을 만큼 전신망은 중국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현재 중국의 통신사업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장규모와 기술부분에서 비약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2000년 말 중국에 건설된 광케이블은 1백25.2만 킬로미터, 전국 전화 사용자수는 2억1천5백만 명, 그중 이동전화 사용자수가 8천5백26만 명으로 고정전화 네트워크 규모는 세계 2위, 이동전화 네트워크 규모는 세계 3위를 기록했다.
***이익을 위해선 칼날의 피도 핥는다**
성쉬안화이는 모험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인은 이익을 중시한다. 취할 이익만 있다면 칼날에 묻은 선혈도 핥아야 한다. 위험이 없는 장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어떻게 위험을 극복하는 중에 곤경에서 빠져나오는가? 모험이 클수록 이윤도 크다. 이것은 네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편안하게 어려운 세월을 보내며 살겠는가? 아니면 기회를 똑바로 보고 착수하여 밑천도 돌아오지 못할 모험을 아끼지 않고 해볼 것인가? 이것이 곧 소상인과 대상인이 다른 점이다. 본전을 까먹을까봐 앞으로 전진하지 못 하고 남이 와서 삼킬 것을 기다리는 바보가 돼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어놓고 한바탕 신나게 싸우는 편이 훨씬 낫다.”
1883년 1월 12일은 19세기 중국의 ‘블랙 먼데이’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상하이 주가에 대폭락 사태가 발생했다. 수많은 업체와 전장(錢莊:중국의 전근대적 은행)이 무너졌다.
난공불락이었던 호설암의 푸캉(阜康)전장도 이때 도산했다. 1882년 9월 탄생했던 중국 최초의 증권회사 상하이평준구펀공스(上海平準股分公司)도 4개월 만에 끝났다. 이렇게 19세기 중국의 증권투자열기는 오는 것도 빨랐지만 가는 것도 빨랐다.
윤선초상국 역시 공전의 금융위기에 뿌리부터 흔들렸다. 당시 그 중국 최초의 주식회사는 수구적인 회판 서윤이 총판 당정추를 대신하여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동안 성쉬안화이는 광산개발과 전신국 운영에 전념하느라고 윤선초상국의 경영일선에서 떠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윤선초상국 특명감찰단장의 자격이 주어졌다.
성쉬안화이는 추진하는 일마다 딴지를 걸어 자신을 곤란에 빠뜨렸던 서윤이 16여만 량의 공금을 횡령하고 개인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한 비리를 적발했다. “사재를 털어서라도 횡령액을 갚을 테니 옛정을 봐서 한번만 눈감아 달라”는 서윤의 간청을 성쉬안화이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비리사실을 낱낱이 이홍장에게 고해바쳤다. 결국 서윤은 파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다.
그후 약 6개월 동안 성쉬안화이는 발바닥이 닳도록 사방을 뛰어다니며 30만 파운드를 조달하여 윤선초상국의 도산을 막았다. 곧이어 서윤의 잔당을 포함해 직원의 절반가량을 해고하고 지나치게 둔중한 윤선초상국을 여덟 개 부분으로 분리하였다.
이는 조직의 효율적 운영과 각 부문간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눈에 가시 같은 부패한 서윤은 제거되었지만 무능한 당정추는 허울뿐인 자리에 만족하며 여전히 윤선초상국의 총판을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무능은 부패보다 더 나쁜 것이다. 성쉬안화이는 회판 마건충(馬建忠)과 연합공세를 펴 당정추 스스로 총판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성쉬안화이는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자신이 텐진 세관장을 겸하고 있음을 이유로 구조조정의 일등공신 마건충에게 총판의 지위를 양보했다.
얼마 후 성쉬안화이는 공석으로 비어 있던 윤선초상국의 최고위직인 독판에 임명되었다. 그것은 사실 12년 전부터 그가 겉으로는 사양했지만 속으로는 간절히 원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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