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중국의 商父**
<사진1-1 쑤저우(蘇州)에 성시안화이의 별장에 있는 그의 초상화>
장쩌민 총서기겸 국가주석의 모교는 상하이의 자오퉁(交通) 대학이다. 그리고 이 대학의 설립자는 성쉬안화이(盛宣懷, 1844-1916)라는 인물이다.
또 중국 제일의 와인브랜드로 산둥 옌타이(煙臺)의 장유(張裕) 포도주를 꼽는데 그 회사의 공동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 역시 성쉬안화이이며 근대 중국의 상성(商聖) 호설암(胡雪岩, 1823~1885)을 무릎 꿇게 만든 자 역시 바로 성쉬안화이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그의 휘황한 대업적에 비한다면 에피소드에 불과할 것이다.
쑨원(孫文,1866-1925)이 근대 중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듯 성쉬안화이는 근대 중국의 상부(商父)로 떠받들어진다. 근대 중국 자본주의와 상공업의 문은 그가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 중국의 선박, 광산, 통신, 방직, 철도, 은행 등등 중국 근대 자본주의 산물 중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의 조정과 개입 또는 참여 하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중국의 양무운동(1862~1894) 시절 대표적인 매판 관료상인이었으며 1911년 철도국유화를 반대한 보로(保路)운동과 신해혁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저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사람이 나타나 비상한 길을 걷는 법이다. 비상한 인물 성쉬안화이는 개인적 욕망의 실현과 함께 근대 중국의 경제사회발전을 비상하게 추구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 후 중국은 밖으로는 외국 열강의 정치, 군사, 경제적인 침략과 안으로는 태평천국 운동으로 그의 봉건적 지배체제는 만신창이가 되는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비상한 인물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장지동(張之同) 등의 한인 관료들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보강하려 했다. 이 국난 극복의 자강운동과 양무운동이라는 관상합판사업(官商合辦事業)의 최선봉대를 이끈 자가 다름 아닌 성쉬안화이였다.
<사진1-2 중국의 명문, 상하이 자오퉁 대학>
***다섯 자의 성공비결**
성쉬안화이는 후일 자신의 성공비결을 심(心), 찬(鑽), 충(衝), 봉(捧), 송(送) 다섯 자로 요약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무엇보다 첫째가 마음(心). 한마음 한뜻으로 변하지 않는 마음이 제일이었던 것이다. 사업에 임해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한 가지 일에만 전력을 기울여 몰두하는 마음이고 시간에 임해서는 참을성 있으면서도 조급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마음가짐이다. 오늘 안 되면 내일 또 계속하고 올해에 안 되면 내년에 계속 해야 한다.
둘째, 뚫어라(鑽). 보통 세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구멍이 있어도 뚫지 않는다" 에 속한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큰돈을 벌 만한 대로(大路)가 있어도 결코 보이지 않는다.
"구멍이 있으면 뚫는다" 는 정도의 사람들의 수도 의외로 적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은 "마땅히 구멍이 있으면 뚫어야 하고 구멍이 없더라도 뚫는다" 라며 행동하는 자다. 즉 창조와 천착,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셋째, 돌진하라(衝). 이는 인간관계의 의사소통에 관한 말이다. 자기의 뜻을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작정 돌격 앞으로만 하는 식이나, 큰소리만 치는 일방통행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상호간에 원대한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는 사통팔달의 큰길이 되어야 한다.
말로써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에 대한 것에서, 글로써는 공문서와 편지와 같은 사사로운 사문서에 이르기까지 상대와 환경에 따라 '돌진'하되 완급과 강약이 적절히 조절해가며 순발력 있게 '돌진'해야 할 것이다.
넷째, 받들어라(捧). 분위기를 좋게 살리라는 것이다. 아부하라는 게 아니고 칭찬하라는 뜻이다. '받들어라'도 두 가지이다. 하나는 타인을 잘 받들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 의해 받들어지는 것이다. 사업을 잘 하려면 남들을 잘 받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남들도 자기를 받들어주니까. 당연한 얘기다.
끝으로 선물하라(送).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선사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흑심을 품고 모종의 목적을 억지로 달성하기 위하여 뇌물을 바치라는 말이 아니다. 상호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긴밀한 교감을 나누기 위하여 선물하라는 말이다.
이 역시 큰 선물과 작은 선물 두 가지가 있다. 큰 선물은 귀중한 예물을 주는 일이고 작은 선물은 차나 술 따위의 특산물이나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다.
***다섯 아들 이야기**
성쉬안화이는 1844년 장쑤(江蘇) 성 창저우(常州)의 무진(武進) 현에서 조부와 부친이 연달아 과거에 급제한 명문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 성융(盛隆)은 저장(浙江) 성 하이닝(海寧)현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부친 성강(盛康)도 포정사(布政使)의 신분으로 후베이(湖北) 성의 염상을 총괄하는 직을 맡으며 경세치용학의 경전인 '황조경세문속편(皇朝經世文續編)'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
성쉬안화이는 세상을 다스리고 실제에 응용하라는 부친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소년 시절부터 그는 중국 사회의 실제 문제에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1860년 청나라 대장 화춘(和春)의 강남대군영이 태평천국 혁명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성쉬안화이의 고향 창저우도 일대 혼란에 빠졌다. 당시 17세의 성쉬안화이는 조부 성륭을 따라 강북의 옌청(鹽城)으로 황망히 피난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부친 성강이 양곡 운송의 책임을 맡고 있는 후베이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난퉁(南通)과 닝보(寧波), 안후이(安徽)와 장시(江西) 등지를 6개월 여를 떠돌았다.
어려움을 모르고 온실에서 자란 이 명문대가집 자식에게는 보트피플이나 다를 바 없는 선상 피난 시절은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온실에서 자라난 이 명문대가집 자식을 강인하게 변모시킨 값진 시련기였다고 할 수 있다.
1861년부터 성쉬안화이는 후베이에서 약 6년 동안을 살면서 견문을 넓혔다. 후베이에서는 화이베이(淮北)와 쓰촨(四川) 지방 염상들이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곤 하였다.
이 때문에 후베이 염상의 총감독관 성강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자 성쉬안화이는 화이베이와 쓰촨 지방의 염상들을 모두 감싸 안는 획기적인 안인 '회천염상통합안'(淮川鹽商統合案)을 기안하여 아버지에게 보였다.
제안은 채택되었고 쌍방 간의 모순은 일거에 해결되었다. 이 일로 성강은 아들에게 큰 희망을 품게 되었다. 성쉬안화이 역시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경전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팔고문(八股文)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보다는 젊고 패기 넘치는 인재들과 현실적인 사업에 몰두하는 일이 훨씬 즐거웠다.
원래 장쑤 성은 과거합격자수와 장원급제자수가 다른 성에 비해 월등히 많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었다.
그러나 성쉬안화이는 고향 창저우에 돌아와 초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는 결국 세 번이나 낙방했다. 자신의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성쉬안화이는 과거준비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그는 아들의 낙방 소식에 위로와 격려 차 찾아온 아버지 성강에게 다음과 같은 우화를 들려주었다.
"옛날 중국 호씨네 집에 다섯 아들이 있었답니다. 장남은 착실하고 차남은 총명하였으나 셋째는 장님이고 넷째는 절름발이고 막내는 곱사등이었답니다. 호씨네 아버지는 착실한 장남에게는 농사를 짓게 했고, 총명한 차남에게는 장사를 시켰습니다. 장님인 셋째에게는 점쟁이를, 절름발이인 넷째에게는 마작을, 곱사등인 막내에게는 베를 짜게 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아들은 의식주 해결에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살게 되었답니다.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취하는 호씨네 아버지는 용인의 대가였다지요."
"……."
성쉬안화이는 아버지에게 쓸데없는 학문을 할 바에야 차라리 검법이나 상술을 배우겠으니 허락해주길 청했다. 성강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를 잡아라**
"어떤 일이든지 기회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꼭 할 수 있는 일도 우연한 원인으로 잘못되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고, 또 분명히 하기 힘든 일도 기회만 잡으면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성공의 절반은 능력에 달렸고 절반은 기회를 잘 잡는 데 달려 있다. - 성쉬안화이"
1870년 이홍장이 후이족(回族)의 봉기를 진압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받고 싼시(陝西) 성에 왔다. 양종렴(楊宗濂)이라는 자가 이홍장에게 성쉬안화이를 그의 수행비서로 삼을 것을 추천하였다.
이홍장은 일찍이 성강과 호형호제하는 막역한 사이였기에 성쉬안화이를 시험 삼아 써보기로 하였다. 이홍장은 노회한 관료로서 아랫사람에게 매우 엄격한 인물이었다.
성쉬안화이는 이때 자신이 진정한 인생의 출발점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개인사를 온갖 시련과 역경의 순간들을 부단한 노력과 끈질긴 저력으로 극복해온 도전과 분투의 역사로 만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주어진 일마다 최선을 다했다. 무더운 더위에도 하루에 수십 리씩 발로 뛰며 일만 자나 되는 문서를 단 삼일 만에 기안해 올리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정직했으며 혹시 그가 저지른 실수들이 있다면 그 잘못을 통해 배워나갔다. 지속적인 자기 개선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에게 없었다.
또한 텐진과 상하이 등지로 공무출장을 다니면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문물에 눈떴다. 이로써 그는 훗날 자신의 사업에 건실한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고통을 감내하고 잠시도 태만하지 않는 완벽한 그의 근무 태도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런 성쉬안화이를 이홍장은 친조카처럼 애지중지하며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았다. 이것은 마치 상성 호설암이 좌종당의 참모 역할을 맡은 것과 비슷했다.
성쉬안화이는 국가가 부강하려면 반드시 선진 과학기술과 근대적인 상공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타고 온 증기선은 서양 문명의 우수함을 보여준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배를 마련하는 것은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하는 결정적인 일이라고 인식하였다.
1857년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선박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그들이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자 성쉬안화이는 종래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오던 것을 민족 해운을 일으켜 막으려고 했다.
1872년 성쉬안화이는 이홍장에게 해운 사업의 민간투자 유치를 촉진하는 기업으로서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의 창립을 정식으로 건의했다.
***칼날은 숫돌에, 사람은 일에 단련된다**
윤선초상국의 창업을 준비하면서 그 체제와 운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성쉬안화이는 관료의 감독 하에 상인이 경영하는 이른바 관독상판(管督商辦) 형의 기업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료가 감독과 경영을 함께 하는 관독관판(管督官辦)의 형태를 고집하였다. 결국 성쉬안화이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윤선초상국은 정부의 양곡운송 사업을 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독관판의 윤선초상국은 시작부터 파행을 드러냈다. 구태의연한 관료조직체에 상인들이 투자를 전혀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윤선초상국은 성쉬안화이의 원안대로 관독상판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성쉬안화이는 '상인의 입장에서 상인의 이익을 위하여 시장 상황을 우선 생각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는 윤선초상국의 새 장정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관독상판의 모델은 반만년 중국사의 관료와 상인 간의 새로운 서막을 여는 것이었다. 윤선초상국은 외국의 경제 세력이 이미 중국 근대사회에 광범하게 침투했을 때 출현했다. 관방의 지원과 감독이 없으면 후진국가의 상공업은 외국 자본과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상인은 설 땅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상인을 떠나면 관방은 경영 인재와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된다. 따라서 관독상판은 시대의 필연적인 선택이었으며 중국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성쉬안화이는 바로 이 단계에서 관건적인 인물, 'KEY MAN'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홍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관료와 상인 간의 중요한 지지자였으며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1873년 이홍장은 성쉬안화이를 윤선초상국의 제1인자인 독판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쉬안화이는 과분하다고 사양하고 오히려 독판과 총판의 다음 서열인 회판으로 일하길 자원했다.
이홍장은 독판을 공석으로 둔 채 매판 상인 당정추(唐廷樞)를 총판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주식을 공모하고 상인의 투자를 유치하는 일을 맡겼다. 당정추는 광동출신으로 원래 홍콩의 매판(식민지의 매국적인 기업인으로 매도되어온 매판의 원래 뜻은 난징조약 이후 외국 자본과 중국의 시장을 중개하는 무역상인 또는 외국상사의 대리업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어느 날 당정추는 우연한 계기로 매판을 그만두게 되었고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가는 외국배를 타게 되었다. 선주는 승객에게 마시고 세수하는 물이라면서 1리터도 채 안 되는 물을 나눠주었다.
그러나 물을 다 쓴 승객들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더 이상 물을 얻을 수 없었다. 그때 배에는 1백여 마리의 양을 싣고 있었는데 선주는 양들에게는 무한정 마실 물을 주었다.
이에 당정추는 극도로 분노하였다. 민족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국가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홍콩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1십만 원을 모아 두 척의 배를 사고 상하이와 홍콩을 운항하게 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게 해준 위인으로 당정추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 성쉬안화이는 윤선초상국의 3인의 회판 중 하나가 되었는데 다른 두 회판은 총판 당정추와 같은 고향 출신이자 보순양행의 매판이었던 서윤(徐潤)과 지방관료출신인 주기앙(朱其昻)이었다.
오늘날의 말로 해보자면 독판은 기업의 회장, 총판은 사장, 그리고 회판은 부사장인 셈이 된다. 그러나 성쉬안화이의 지위는 회판에다가 조운과 해운을 총괄함으로써 실제 파워로는 총판인 당정추를 능가하는 윤선초상국의 제1인자인 독판이었다.
<사진1-3 장난(江南)의 4대 정원중 하나인 리우웬(留園)의 정경>
필자 소개
<필자 사진>
필자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타이완 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국립 타이완 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와 중국 화동정법대에서 수년간 강의를 맡았던 그는 타이완, 상하이를 거쳐 현재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차이니즈 나이트-밤에 읽는 중국인 이야기'(2000),'협객의 칼끝에 천하가 춤춘다'(1995), '중국? 중국, 중국!'(1995), '동양스승, 서양제자'(1992)와 동인시집 '야간열차, 바닷가에서'(1983) 등이 있으며 '중국 중심항 선정 논쟁''영수증 복권제' 등 여러 편의 중국 관련 논문과 칼럼을 써냈다. 특히 그는 '인민일보'에 상해 임시정부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1999)케 하였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의 기고문이 실려(2000)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또 지난 8월에는 1996년 2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4년반 동안 중국 전역을 누비며 중국정부문서보관소, 중국내 도서관 자료를 뒤져 확인한 일제시대 항일유적들을 모아 '중국 내 한민족 항일독립운동 100대 사적'(2001, 동방미디어)이라는 제목의 씨디롬 출판도 했다.
현재 그는 네트로폴리탄 대학에 '차이니즈 나이트'란 제목으로 중국인 이야기를 연재중이며 서울디지털대학(SDU) 중국학 겸임교수로 있다.
그는 "솔직해지고 싶은 만큼이나 최후까지 믿고 싶은 것은 체험뿐이다" 라는 신념으로 주말이면 중국 곳곳을 누비고 있다. 그런 부지런함으로 현재 그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중국통으로 알려져 있다.
*이메일 : hbkang87@mofa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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