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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빠진 손님, 역무원에게 욕먹고 코레일 팬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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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빠진 손님, 역무원에게 욕먹고 코레일 팬이 되다

[편집국에서] 왜 '철도'를 지켜야 하는가?

서너 달 전의 일이다. 퇴근길에 시내의 한 백화점에서 물건을 하나 사서 지하철에 올라탔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운이 좋게도 환승역에서 내 앞자리가 비었다. 무심코 손에 든 백화점 쇼핑백을 선반에 올려두고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앉자마자 책을 펼쳤다.

40분쯤 지나서 지하철이 멈췄다. 평소처럼 가방과 책을 챙겨서 내렸는데, 순간 '아이쿠!' 싶었다. 분명히 손에 들고 있어야 할 백화점 쇼핑백을 열차 선반에 그대로 놓고 내린 것이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제 막 떠나는 열차의 탔던 칸 번호를 얼핏 확인하고서 지하철 역무실로 찾아갔다.

마침 저녁 교대 시간이라서 나이 지긋하신 역무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정말 여러 번 해본 익숙한 솜씨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시간표대로라면 네 정거장 후에 곧 도착할 테니, 기다려 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몇 분 후에 전화가 왔다. 내가 기억하는 칸 번호에 그런 쇼핑백이 없다는 것이다.

낭패다 싶어서 인상을 쓰고 있는데, 해당 열차가 종착역에 도착할 시간이란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는데, 웬걸 내가 지적한 칸의 옆옆 칸에서 쇼핑백을 발견했단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차를 타고 종착역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역무실에 쇼핑백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그렇게 쇼핑백을 찾아서 다시 집으로 오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 나서 20분 후, 나는 다시 한 번 사색이 되었다. 종착역에서 출발하는 텅 빈 열차에 타자마자 쇼핑백을 또 다시 선반 위에 던지듯이 올려놓은 게 문제였다. 그리고 고새를 못 참고 다시 책을 펼친 것은 더 큰 문제였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왜 이렇게 늦느냐며, 집에서 오는 전화를 받았다. 파란만장했던 쇼핑 얘기를 하려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쇼핑백을 또 한 번 열차 선반에 놓고 내린 것이다! 이미 열차는 떠났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열차 몇 칸 거리를 이동해버린 상황이어서 내가 몇 호 칸에 탔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아무튼 정말로 창피를 무릅쓰고 다시 역무실로 갔다. 아까 그 머리 지긋한 역무원과 저녁 식사를 하고 온 또 다른 역무원이 같이 있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아까 물건을 찾아준 역무원 아저씨가 하는 말. 또 그 얘기를 듣고서 다른 역무원이 대꾸로 하는 말.

"내 짧지 않은 역무원 생활에 연속해서 두 번 같은 물건을 잃어버린 손님은 처음이요." (한숨)
"스마트폰이 문제지…." (쯧쯧)
(혼잣말로) "스마트폰 아니라 책 읽었는데요…."
"무슨 책이에요? <개념 의료>네? <개념 의료> 읽으시면서 개념은 놓고 다니셨네." (하하하)


더한 말을 들어도 쌌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또 그때부터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 그 역무원. 시내로 진입하기 전에 물건을 찾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며 몇 번이나 전화를 돌렸지만, 결국 쇼핑백은 찾지 못했다. 그 와중에 서너 군데 역의 역무원이 열차가 멈출 때마다 이 칸, 저 칸을 샅샅이 훑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연합뉴스

쇼핑백도 잃어버렸고 또 그 과정에서 정말 보기 드문 바보 같은 짓을 한 터라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야간에 한두 사람밖에 없는 역을 지키면서 얼빠진 손님의 분실물을 찾아주느라 동분서주한 코레일과 서울메트로 직원의 정성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외국 출장을 가서 철도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우리나라를 떠올린다. 왜냐하면,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데를 가 봐도 철도나 지하철이 우리나라만큼 쾌적하고 친절한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도 도로에 비해서 갈수록 철도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나는 내심 '철도'가 사회 공공성의 한 지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지극히 개인화된 자동차 문화를 전제로 한 도로에 비해서 철도가 수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또 철도를 공공재로 인식하는 나라일수록 공동체에 기반을 둔 복지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야간에 얼빠진 손님의 분실물을 놓고서 고군분투한 코레일과 서울메트로 직원의 모습은 이런 생각을 더 강하게 해줬다. 코레일과 서울메트로가 갈가리 찢겨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훨씬 많은 그런 회사가 되었을 때도 저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철도나 지하철이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이미 그렇게 된 다른 나라를 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철도 파업이 끝났다. 정부는 정부대로, 코레일 경영진은 경영진대로, 노동조합은 노동조합대로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철도 파업을 통해서, 여전히 많은 시민은 오랫동안 '서민의 다리'였던 철도 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다시 한 번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열차에서 잃어버린 분실물을 찾고서 기뻤던 경험이 있는 이들, 술 마시고 열차에서 자다가 종착역에서 역무원에게 따뜻한 보리차를 얻어 마셨던 경험이 있는 이들, 갈 곳 없었던 청춘에 지하철 또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서 데이트를 하거나 실연의 상처를 달랜 경험이 있던 이들은 모두 다 호흡을 한 번 크게 쉬고 철도 지킴이로 나설 일이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일손을 놓고서 파업에 나섰고, 또 앞으로도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는 철도 노동자에게 따뜻한 새해 인사를 전한다. '지난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참, 그 쇼핑백은 나흘 후에 내 손으로 들어왔다. 반대편 종착역의 또 다른 야간 코레일 역무원이 챙겨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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