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내전(內戰)'이다.
언론 보도만 보면,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표를 줬던 과반수의 시민과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던 나머지가 1년 가까이 팽팽히 맞서는 중이다. 한쪽에서는 부정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핏대를 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종북' 딱지를 붙이는 것도 모자라 공권력이라도 동원해서 진압할 기세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원로신부의 22일 강론을 놓고서,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대목에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다소 과한 발언으로 들리더라도, 한 원로 종교인을 향해서 저렇게 증오를 표출하는 것이 과연 대통령으로서 할 일인가? 그 원로 종교인은 박 대통령이 챙겨야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총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서로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지금 이념 전쟁을 벌이는 박근혜 대통령-청와대-새누리당, 또 그에 맞서 "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야권과 누리꾼 일부는 과연 대한민국 일반 시민의 시각을 대변하고 있을까?
한 번 따져 보자. 한쪽에서 그토록 대통령 자격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상황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여론 조사 지지율은 50~60%를 유지하고 있다. 임기 첫 해 이맘때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첫해 3, 4분기) 지지율 29~22%,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 24~32%와 비교해보면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통령의 자격을 문제 삼는 일부 누리꾼 중에는 여론 조사 결과 자체를 불신하는 이들도 있다. 공공연하게 청와대가 여론 조사 기관을 장악해 그 결과를 조작하고 있다는 '음모론'도 고개를 든다. 하지만 <프레시안>과 여론 조사 기관 '더 플랜'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여론 조사마저도 그 지지율이 57.6%(10월 28~29일)로 나타나는 건 어쩌란 말인가?
물론 다수의 여론 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대통령 자격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징후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40%대에 가까운 시민이 대통령 자격 자체를 문제 삼는다면 2008년 촛불 집회 뺨치는 저항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럴 기미는 없다.
상황은 정반대다. 장외 투쟁을 선언하며 서울시청 앞으로 나섰던 민주당은 시민의 호응이 없자 슬그머니 천막을 철거했다. 일부 시민 단체가 계속해서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지만, 2008년 촛불 집회처럼 지역 세대 계층을 초월해서 "선거 무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전쟁 중이란 말인가?
여기서 지난 대선을 둘러싼 상황을 되돌아보자. 지난 대선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로 대표되는 사이버 공간과, 투표를 하고 대통령을 뽑는 리얼 공간의 '정치'가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삶의 중요한 근거지를 사이버 공간에 놓고 살아가는 이들은 유감스럽게도 리얼 공간의 정치를 대표하지 못했다.
대선 직전에 <나는 꼼수다>로 대표되는 (야권 지지 성향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사이버 공간의 누리꾼은 야권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들은 선거 당일 투표율이 높아지자 야권 승리의 청신호로 해석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삶의 근거지가 사이버 공간이 아닌 리얼 공간이었던 이들은 평소대로 투표장에 나가서 여권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사실 이런 착시 현상에 홀린 것은 야권뿐만이 아니었다. 댓글을 조작해서 대통령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국가정보원의 행태야말로 사이버 공간의 여론을 리얼 공간의 여론으로 착각한 대표적인 예였다. (역설적으로, 국가정보원의 이런 행태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리얼 공간의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혹시 지금도 지난 대선 때처럼 사이버 공간의 정치를 마치 리얼 공간의 그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쪽에 대선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목소리 큰 누리꾼 일부가 있다. SNS 여론에 의존하는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등이 이에 부화뇌동해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상황은 종합편성채널을 비롯한 보수 언론과 '권력 중독'에 빠진 일부 진보 언론을 통해서 지상 중계된다. (이 과정에서 종합편성채널 등은 자극적인 보도로 시청률을 올리고 광고 수익을 얻는다.)
이런 극한의 대결 상황을 박근혜 대통령이나 국회의 다수당을 점하는 새누리당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아니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것이 공론 장에서 진지하게 토론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저 큰소리에 큰소리로 답해주면, 최소한 '집토끼(보수층)'는 지킬 수 있다.
정작 이런 적대적 공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바로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비로소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보통의 시민이다. 하지만 지금 사이버 공간에 포획된 대한민국의 정치에서 이들의 삶은 어디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들끓는 가상의 내전 상황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기울이는 이들은 누구인가?
지금, 리얼 공간의 권력자-재벌, (금융-부동산) 자산가, 투기 자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