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해방 전에 출생한 한인 동포 1세로 제한된 한국으로의 영주 귀국이 또 다른 가족의 이산 상황을 낳고 있으며, 최근에 강제 동원 당시의 우편 저금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되는 등 사할린 동포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2006년 이후 사할린 동포의 피해 구제 및 영주 귀국 확대와 정착을 지원하는 특별법 제정이 추진되어 왔지만, 정부와 여론의 무관심 속에서 번번이 무산되어 왔다.
그런데 사할린 동포 중에는 일본으로 가는 이들이 있다. 물론 일본이 사할린 한인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사할린 동포가 한국도 아닌 일본에 '귀환'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사할린 한인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와, 양국의 사할린 귀국자를 대하는 정책적인 차이가 놓여있다.
지난 9월 7일부터 열흘간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집단 일시 귀국 방문이 있었다. 올해 들어 7월에 이은 두 번째 행사이다. 주최자는 23년간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일시 및 영주 귀국 지원활동을 펼쳐온 '일본 사할린 동포 교류 협회'의 후계 단체로 금년 3월에 발족한 '일본 사할린 협회'이다. 사할린 귀국자 중 다수가 홋카이도에 정착하고 있어서 행사는 주로 홋카이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일시 귀국자 명단을 보면 한국인 이름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일본인의 한인 배우자나 그 가족들이다. 놀라운 것은 한인과 결혼한 대부분 일본인 부인들이 한국어에 능통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어보다 한국어가 유창하기도 한다. 일본인 남성들도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기도 한다. 이는 어릴 때 한인 가정에 입양되어 민족학교를 다닌 경우인데, 한인 부인과 함께 일시 귀국 하는 것이다.
부모 중 한 쪽이라도 일본인이면 일시 귀국 및 영주 귀국 대상이 되는데, 자녀 1세대를 동반하여 영주 귀국이 가능한 일본에서는 귀국자의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일본인인 경우, 한국 성을 가진 사할린 동포 자녀가 외조부모 중 하나가 일본인이라는 것만으로 일본으로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녀가 결혼했다면 자신의 아이들도 동반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할린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전후 사할린의 많은 일본인이 한인 커뮤니티에 포섭되었다. 그 역사적 경위를 돌이켜 봄으로써, 현재 한국과 일본이 각각 진행하는 영주 귀국 사업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한국에 있어서의 '사할린 특별법' 제정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사할린 잔류 일본인은 1946년 말의 '소련 지구 미소 인양 협정'과 1956년의 '일소 공동 선언'에 따라 대부분 일본인이 귀환하는 속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남게 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중국 잔류 부인이나 잔류 고아와는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규모도 많지 않아 국가적 지원도 행정적으로 '중국잔류방인(邦人) 등'에 포함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이 사할린에 남게 된 것이 한인과 가정을 이루거나 양자로 들어가게 되어 민족학교를 다니는 등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국 이름과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사할린 한인 사회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러한 다민족 가족이 최근 한국과 일본의 영주귀국 사업 속에서 어디를 정착지로 삼을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여기서는 두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하코다테에 거주하는 C는 1944년생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어머니와 단 둘 사할린에 남게 되어 홋카이도 탄광에서 일하는 아버지와도 떨어지게 된다. 1946년부터의 집단 귀환을 위해 항구로 향했지만 C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탄광 노동자의 숙사 식당에서 일하는데 거기서 C에 애정을 쏟는 한국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윽고 C는 민족학교를 다니고 한국 이름으로 살아왔다.
C의 어머니는 1957년부터의 일소 공동 선언에 의한 집단 귀국 시에 일본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일본인 처와 함께 많은 한국인 남편과 자녀들이 일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국인 남편과 많은 자녀를 데리고 가더라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처지가 못 된 C의 어머니는 귀국을 포기했다. 이때 어머니는 둘만이라도 일본으로 가겠냐고 C에게 물었지만 동생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거부했다. 그 후 C는 한인과 결혼해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2000년에 영주 귀국 하는데, 남편으로서는 많은 지인들이 있는 한국이 편리했지만 C 부부는 결국 일본을 택했다.
K는 가족이 함께 귀국하기 위해 일본을 선택한 경우이다. 2005년 일본에 영주 귀국한 K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결혼한 한인 배우자도 어머니가 일본인이었지만 민족학교를 다녀서 일본인의 의식은 없었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 방문을 거듭하며 영주 귀국을 결심했는데 K는 가족 전원이 함께 귀국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2005년에 장남과 그 가족(처와 두 자녀)을 데리고 일본에 '귀환'했다. 얼마 후 장녀 가족과 차남도 일본에 불러들였다.
K가 한국에 영주 귀국 했더라면 일가에게는 많은 곤란이 뒤따랐을 것이다. 가족을 동반하고 귀국하는 경우가 많은 일본에서는 귀국자를 대상으로 한 일본어 및 일본 문화 연수와 정착을 지원하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먼저 6개월간 도코로자와 시의 중국 귀국자 정착 촉진 센터(1차 센터)에 생활하고, 각지에 정착한 후에는 지역의 자립 연수 센터(2차 센터, 2013년 3월 폐쇄) 및 지원 교류 센터(3차 센터)에서 일본어 수업 과 취업 및 생활 상담 등 지원을 받는다.
안산 고향 마을의 귀국자처럼 주택을 제공받지는 않지만, 1994년에 중국 귀국자를 대상으로 제정된 이른바 '중국 귀국자 지원법'이 2007년에 개정되어 귀국자는 생활 보호 대상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에 준하는 금액을 수령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개정된 법률에는 귀국자가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배려를 하고, 친절하고 공손하게 행하는 것으로 한다'라고 하는 조항이 있다. 이러한 표현이 행정 담당자의 과도한 동화 압력이나 오만한 태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원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들 귀국자는 사회적 마이너리티로서 생활상의 차별과 고립 속에 놓여있다. 하지만 한국이 중국 귀한 동포나 사할린 동포에 대한 제도적 차원의 대응이 부재한 것을 감안하면 일본의 지원 체계는 참조할 만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할린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던 한인과 일본인의 다민족적인 생활 공간이 있었다면, 그것이 파괴되지 않는 귀국에 대한 공동의 논의이다. K는 일본을 택했지만 장인이 한국에 영주 귀국을 했듯이 한일 양국의 귀국 정책의 차이와 한국의 제도적 미비로 인해 가족이 사할린과 한국, 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속에서도 이들은 단지 자국 중심적인 정책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원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름의 생활공간은 구축하고 있다.
사할린 동포의 고난의 역사는 일본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할린 동포의 귀환 촉진을 위한 일본과의 1960~70년대 외교 교섭 과정을 보면,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고 한국 정부의 움직임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사실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것으로 지금까지 교섭은 없는 것으로 하고 한국이 자국민을 받아들이기 거부한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밖에 없다"라고 '협박' 받기도 했다.
일본에 모든 책임은 전가해 왔던 자세를 넘어, 이제라도 한국이 적극적으로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 제정에 나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무암 훗카이도대학원 준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 연구원)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8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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