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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온도 -20도 찍는다"…'거짓'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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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온도 -20도 찍는다"…'거짓'이라 할 수 있을까?

[상보적 과학의 발견] 장하석의 <온도계의 철학>에 주목하는 이유

'프레시안 books' 167호는 화제의 책 <온도계의 철학>(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동아시아 펴냄)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이 책의 감수자인 이상욱 한양대학교 교수의 서평과 저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와의 인터뷰로 구성된 기사를 마련했습니다. <편집자>

과학이 실재를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방식
글 / 이상욱 한양대학교 교수


과학은 우리에게 세계의 여러 현상과 그들 간의 '연결'에 대해 알려준다. 그 중에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명백한 현상이나 연결도 있지만, 보이기는 하지만 과학적으로 훈련받지 않고서는 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거나 아예 정밀한 도구의 도움 없이는 볼 수 없는 현상이나 연결도 많다.

예를 들어, 모든 낙하하는 물체는 공기 저항을 무시할 때 일정한 비율로 속도가 증가하는 현상은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일반인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가 보편중력 법칙으로 주어지는 일정한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이 있다고 가정하면 잘 설명된다는 점도 체계적인 관찰과 실험으로 확인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연결'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편중력의 '효과'는 볼 수 있지만 보편중력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원칙적으로 보편중력의 '효과'는 신의 개입이나 다른 종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가정해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아이작 뉴턴은 자신이 '가설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선언했다.

자연 현상의 현상적 패턴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자신의 중력 법칙만이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할 수 있지만, 그 현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메커니즘에서 나오는 수없이 많은 대안적 '가설'이 존재하기에 어떤 '가설'이 옳은지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뉴턴은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위대한 과학철학자였다. 근대 과학 혁명 시기에 이미 그는 과학 이론이 세계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여럿 있을 수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현상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이나 수학적 이론화를 통해 증명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 중요한 인식론적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들면 우리가 오감을 통해 관찰하는 것 모두 세상의 물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감각 기관과 반응하여 일으키는 '효과'를 보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게다가 눈으로는 직접 볼 수도 없고 그 효과 역시 과학적으로 훈련받지 않고서는 관찰할 수 없는 과학적 주장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예를 들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원자나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원자나 분자를 직접 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물론 첨단 장비를 이용하여 원자의 '이미지'를 일반인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원자의 인과적 효과를 컴퓨터가 처리하여 구성해낸 인공물이다. 이런 이미지는 분명 실재 세계와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우리가 일상적인 사물로부터 얻는 이미지와 동등하게 취급되기 어려운 여러 차이점이 있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과학적 질문은 철학적, 특히 과학철학적 질문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 <온도계의 철학>(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오늘 소개할 <온도계의 철학>의 저자 장하석도 정확히 이런 질문들을 탐색하면서 물리학에서 과학철학으로 연구 주제를 바꾸었다. 그러고서 오랜 연구 끝에 구체적인 과학적 실천과 근본적인 철학적 분석이 만나는 지점을 '온도' 개념과 그것의 측정의 역사를 중심으로 탐색하는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주제를 과학철학에서는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의 문제라 한다. 과학적 실재론이란 최신의 과학 이론이 세상에 대해 말하는 내용 모두가 참이거나 최소한 근사적 참이라는 입장이다. 철학자들이 과학적 실재론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한다는 사실 자체에 분개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과학적 실재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연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라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생각이다. 자신이 열심히 연구해서 오류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제거해가면서 치밀하게 검증한 과학 이론이 거짓일 가능성에 대해 따져보고 있는 철학자들이 참으로 한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과학적 실재론 논쟁의 핵심을 오해한 것이다. 철학적 전문 용어로 '참'이란 일상용어의 참보다 의미가 훨씬 더 엄격하다. 예를 들어, 특정 건물의 높이가 정확하게 143.2미터라고 할 때 삼각법을 이용해 측정한 높이가 143.1미터라면 누구나 이 값이 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의미에서 143.1미터는 1.431미터와 동일하게 '거짓'이다. 즉, 조금이라도 존재론적 '참'에서 어긋나면 거짓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근사적 참 개념으로 문제를 우회할 수 있다. 143.1미터는 실제 건물의 높이에 대해 근사적으로 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사적 참 개념은 숫자로 표현되기 어려운 대부분 과학 이론의 내용에 대해 적용하기 어렵다. 경쟁하는 과학 이론 중 어느 것이 '더' 참에 가까운지에 대한 판단은 어떤 이론적 관점을 택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양자역학의 파동함수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 양을 근사한 것인가? 아니면 현상을 근사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에 불과한가? 어떤 부분이 근사인가? 파동이라는 부분이? 확률적이라는 부분이?

게다가 모든 과학 이론이 근사적으로 참이라면 과학의 진보를 설명하기도 어려워진다. 과학의 진보는 과거 이론에서 틀린 부분, 즉 거짓인 부분을 제거해 나감으로써 얻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과학 이론이 근사적 참이면서 동시에 과학이 항상 진보하려면 과거부터 모든 과학 이론이 일관된 흐름을 갖고 차근차근 쌓여 더 참에 가까워져왔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과학의 실제 역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과학 혁명 시기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과학적 틀이 크게 바뀌게 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동역학 이론과 함께 혁신적으로 바꾼 상대성 이론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예전에 현상을 잘 설명하고 현상 뒤에 숨겨진 '연결'을 성공적으로 밝혀냈다고 평가받던 이론 중에 현재 우리가 보기에 참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이론이 많다는 점이다. <온도계의 철학>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플로지스톤(열소) 이론이 대표적이다. 현대 과학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당시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의 이런 터무니없는 이론을 믿었을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플로지스톤 이론은 정교한 이론 체계를 통해 당시 알려진 수많은 물질 변화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했다. <온도계의 철학>의 장점 중 하나는 이처럼 현대 과학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만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특히, '뜨거움'만이 아니라 '차가움'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마크-오귀스트 픽테의 실험은 물리학 전공자에게는 놀랍고 신기하게 느껴질 것이다.

▲ 온도를 눈에 보이도록 '형상화'하면… ⓒ동아시아

장하석은 <온도계의 철학>에서 과학자들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를 어떻게 힘겹게 교정하면서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이론에 도달하는지에 대해 풍부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원제인 'Inventing Temperature'는 시사적이다.

이 제목은 온도는 과학자들이 우리가 느끼는 뜨거움과 차가움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역으로 우리가 현재의 온도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근사적으로 참인 이론을 차곡차곡 쌓아왔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다양한 그리고 대개 서로 상충하는 방식으로 경험적 자료를 축적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보다 나은 온도 기준을 확립하고자 노력해 왔음을 강조한다.

▲ 빅토르 르뇨. ⓒ동아시아
이 과정에서 너무나 근본적인 온도를 어떻게 정확하게 측정할 것인지 어려운 문제를 다양한 인식론적, 방법론적 기법을 활용하여 해결했던 장 앙드레 드 뤽이나 앙리 빅토르 르뇨 같은 '영웅적' 과학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영웅적이었던 이유는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즉 온도계로 온도를 측정한다면 그 온도계가 정확하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할지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를 최소한의 존재론적 가정 하에 해결하면서 우리의 모든 이론을 그 해결책과 정합적일 수 있도록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싫어하는 정당화의 순환 고리를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과학자들이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철학>이 과학적 실재론이 보다 현실적이고 생산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면 그러한 논의 자체는 철학인가 과학인가? 저자는 이를 '상보적 과학'이라 칭한다. 상보적인 이유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충분히 탐색할 만한 주제인데도 현대 과학 연구의 주류에서 벗어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주제를 탐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여전히 과학인 이유는 물이 어떤 조건에서 끓고 어는지와 같은 흥미로운 현상과 그 형상 배후의 숨겨진 연결을 경험적이고 이론적으로 탐색하기 때문이다.

나는 장하석 교수의 '상보적 과학' 프로그램이 매우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특히 현재 학계에서 너무나 커져 버린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간극을 메워 줄 수 있는 좋은 시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상보적 과학'을 하려면 저자가 <온도계의 철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학문 분야 모두의 학문적 기준을 만족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보적 과학'을 실행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일 수 있다.

<온도계의 철학> 펴낸 장하석 케임브리대 대학 석좌교수

▲ 장하석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 ⓒ동아시아
장하석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이 곳곳에서 화제다. 책깨나 읽었다는 과학자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이 책이 화제에 오른다.

국제 과학 기구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는 매년 과학자의 추천을 받아서 '올해의 과학 책' 10권을 선정한다. 그런데 올해 추천 위원으로 참여한 다수의 과학자가 <온도계의 철학>을 주목할 만한 과학 책으로 꼽았다. (<온도계의 철학>이 포함된 10권의 최종 선정 결과는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다.)

<온도계의 철학>이 이렇게 주목을 받는 일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국내의 출판 시장에서 주목을 받은 과학 책은 대부분 과학자들 사이에서 '정통'으로 인정을 받은 과학 지식을 쉽게 풀어쓰거나, 혹은 최신의 과학 지식을 발 빠르게 소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정반대다. 최신의 과학 지식을 소개하는 책도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지금 믿는 '정통' 과학 지식의 기반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수의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듯이 이 책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온도를 온도계로 잰다. 그렇다면, 온도계가 정확하다는 사실, 혹은 온도를 재는 물질(수은 등)이 일정하게 팽창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이것은 과학 상식이다. 왜냐하면, 물이 끓을 때 온도계가 100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이 끓을 때 가리키는 그 온도계의 숫자 '100'은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온도계가 없었던 시절의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온도에서 물이 끓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런 현상을 눈금을 매기는 '고정점(fixed point)'로 사용할 수 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이것은 과학 상식이다. 그런데 그 '100'은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동아시아

이런 당혹스런 질문에 답하면서 이 책은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우리가 흔히 '과학'이라고 통칭하는 '전문가 과학'에 대비해 '상보적 과학(complementary science)'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장하석 교수가 <온도계의 철학>에서 보여줬듯이, 상보적 과학은 정통의 과학 지식이 확립되는 논쟁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전문가적 과학에서 배제된" 것들에 주목한다.

장하석 교수는 이런 상보적 과학이 "전문가 과학이 발전해온 지배적 전통에서 벗어난 과학 연구의 (또 다른) 전통을 창조할 수 있으며" "그 중 성공적인 일부는 (전문가 과학이 지배해온) 우리 과학 지식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형을 촉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런 상보적 과학에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역사학자, 철학자 또 다수의 대중이 참여할 길도 열린다.

"우리는 옛 과학의 재생, 과거와 현대 과학에 대한 새로운 판단, 그리고 대안의 탐색을 결합하는 상보적 지식 체계를 더 많이 창조할 수 있다. 이런 지식은 본래 비전문가들도 접근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과학 지식의 기초 내용이 받아들여진 그 이면의 이유를 보여줄 수 있기에 현재 전문가들에게도 유익하거나 또는 적어도 흥미로울 수 있다.

그것은 근본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침식한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의 연구에 간섭이 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이 실제로는 이로운 효과를 전반에 만들어 내리라고 믿는다. (…) 상보적 과학은 과학 교육의 버팀줄이 되어 전문가 훈련의 사전 교육뿐 아니라 일반 교육의 수요에 기여할 수 있다." (482쪽)


자신이 <온도계의 철학>에서 제기한 상보적 과학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있는 장하석 교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11월 18일부터 22일 사이에 이메일로 진행되었다.

- <온도계의 철학>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10월 말에 출간되고 나서 만만치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이 책이 상당히 화제가 되었습니다. 책의 머리말에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만, 과학을 둘러싼 수많은 소재 중에서 하필이면 온도 측정법 또 온도계에 주목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동아시아
온도계라는 시시한 것이 어떻게 훌륭한 철학 책의 주제가 될 수 있나 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과학과 철학 공부를 하던 시절에 무슨 온도계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던 시절에 우연히 가지게 된 관심이 커졌던 것인데, 그 경위를 짤막히 말씀드려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들을 정말 어떻게 알지?' 하는 의문을 갖고 논의하는 것을, 철학자들은 공연히 거창하게 '인식론'이라고 하지요. 이 책은 아주 실용적인 종류의 인식론 논의입니다. 제가 박사 학위 논문은 양자 역학 철학으로 썼었는데, 박사 후 연구 과정에서는 그 정반대로 과학에서 가장 쉬운 내용을 파고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예가 온도계였습니다. 우리가 다들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사용하는 온도계. 이 온도계들이 진짜 온도를 틀리지 않게 말해준다는 것을 우리가 정말 어떻게 자신할 수 있는가? 온도계에 넣은 수은이, 온도가 올라가는 그대로 균일하게 팽창하는 것인지, 어떻게 시험해볼 수 있는가?

이런 순진한 질문들이 의외로 대답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책의 연구는 시작되었습니다.

- 한국에서는 과학 지식의 본질을 '자연에 숨어 있는 실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과학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통념입니다. 이런 통념에서 과학 활동은 (전문가 과학자들이) 오류를 서서히 없애가는 단선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죠. 또 어떤 사회보다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맹신도 크고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묻겠습니다. '온도'처럼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과학 지식의 기반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한국뿐만 아니라 과학을 신봉하는 문화에서는 다들 그런 통념을 가지고 있지요. 첨단의 연구 주제, 또 최신의 이론이나 기술만을 의미 있는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과학에서 정말 기초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들입니다. 온도를 측정하고 조절할 수 없다면 아무런 첨단적 실험도 할 수 없고, 온도 개념이 정립되지 않으면 현대 과학의 이론적 기반도 흔들릴 것입니다. 쉽다고 무시하는 부분을 가끔씩이라도 재검토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선생님께서는 <온도계의 철학>에서 했던 작업, 그러니까 정통 과학 지식이 확립이 되는 과정의 논쟁에 눈길을 주고, 더 나아가서 채택되지 않은 과학 지식의 흔적을 되짚어보는 일을 '상보적 과학'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혹시 이런 상보적 과학의 다른 예가 있나요? 2012년에 <Is Water H2O? : Evidence, Realism and Pluralism>을 펴냈죠?

그렇습니다. 제가 온도계 연구를 마치고 나서 그 다음에 파헤친 과학 상식이 '물은 H2O'라는 것입니다. 현대 화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지요. 그 간단한 것을 알아내는데 존 돌턴이 원자 이론을 내놓은 후 무려 50여 년이 걸렸습니다. 돌턴 자신은 물의 화학식을 HO로 간주했었거든요. 작년에 그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고, 지금 타임북스에서 번역 중입니다.

지금 현재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필수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건전지 이야기입니다. 1800년도에 볼타가 전지를 발명하고 나서 전 유럽의 과학계는 흥분의 도가니로 들어갔습니다. 전기 회로에 전류를 흘릴 수 있게 되면서 전자기학과 모든 전기 기술의 시초가 되었고, 전기 분해로 시작해서 화학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지가 발명된 후에도 몇 십 년 동안이나 그 작동 원리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었습니다. 볼타 자신의 이론은 결국 배척되었는데, 그 과정이 아주 복잡하고 재미있습니다.

- 선생님께서 <온도계의 철학>에서 제기한 상보적 과학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언급한 경쟁하는 두 패러다임 간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를 들어, 천동설은 천동설대로 지동설은 지동설대로의 내적 논리 속에서 평가해야지, (오늘날 정통으로 인정받는) 지동설의 논리로 천동설을 평가하면 곤란하다는 주장이죠.

각 패러다임이 내적 논리 속에서 평가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쿤은 정상과학에서 한 가지 패러다임만 지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쿤은 어떤 지식 체계가 폐기되었더라도 그것을 간단히 틀렸다고 선언할 수 없다고 설득력 있게 논증을 하고서도, 이 이론이 발전할 가치가 있다고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못했죠.

저는 다양한 패러다임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 더 성숙한 과학의 상태로 봅니다. <Is Water H2O?>에서 더 자세히 논의한 과학의 다원주의입니다. 전문가 과학자가 한 가지 패러다임밖에 보지 못할 때 과학사, 과학철학의 (또 다른 비전문가의) 상보적 기능이 발휘될 수 있다고 봅니다.

- 이어지는 질문이 되겠습니다만, <온도계의 철학>에서는 흔히 과학철학의 전통 속에서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쿤과 카를 포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상보적 과학은 쿤과 포퍼의 화해를 시도합니다. 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 특정한 토대(fundamental)와 규약(convention)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며 여러 비판에서 보호될 때에만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과학 혁신조차도 그처럼 전통에 결속된 연구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생겨날 수 있음을 강조했죠. 동의합니다.

하지만 쿤이 말하는 지배적인 패러다임 하의 정상과학이 효과적임을 인정하되, 현재 유행하는 패러다임이 유일한 관점은 아니라는 포퍼의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포퍼는 과학을 이상적 지식 형태이며 심지어 사회문제를 관리하는 길잡이로 여기는 것이 우리 문명에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견해를 펼쳤었죠.

▲ 토마스 쿤. ⓒ동아시아

- 그런 견해를 듣고 나니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이 떠오르네요. '선택과 집중'은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입니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하지만 '상보적 과학'의 가치를 강조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이런 흐름을 상당히 우려스럽게 볼 것 같습니다만….


집중해야 일이 잘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사회 전체가 똑같이 외곬으로 나아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위험합니다. 유연성이 결핍된 집단은 언젠가 멸망할 것입니다.

- 1970년대 이후에 등장한 과학지식사회학의 전통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과학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블랙박스를 열고서 과학 지식 자체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이런 접근은 선생님의 상보적 과학의 핵심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런 흐름은 과학 지식의 본질을 둘러싼 입장 중에서 '구성주의(constructivism)'로 불리죠.

그렇습니다. 과학에서 받아들여지는 믿음에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측면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적 믿음의 정당화를 사회적 원인으로 환원함으로써 과학 전반이 지니는 특별한 권위를 수축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상보적 과학에 있는 회의론과 반독단주의의 목표는 과학 지식의 특정 측면을 더욱 증강하는 것이죠.

- 그럼, 구성주의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구성주의,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회적으로 결정한다면 과학에서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다고 천박하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과학 지식은 궁극적으로 자연이 허락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 한국의 독자를 위해서 개인적인 질문을 덧붙이겠습니다. 전에 형인 장하준 선생님도 인터뷰 중에 언급했습니다만, 장하석 선생님을 둘러싼 전설 같은 일화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학교 2학년 때 <코스모스>를 원서로 열한 번 읽었다는 일화도 그 중 하나죠? 정말입니까? (웃음)

보통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에는 사실과 과장이 범벅되어 있습니다. 이 기회에 사실을 확실히 밝히고자 합니다. (웃음)

중학교 2학년 때 <코스모스> 다큐멘터리를 애청했고, 중학교 3학년 때 번역본을 사서 열심히 여러 차례 읽었습니다. 몇 번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일 마지막 장 '누가 지구를 위해서 말하나'는 정말 열 번쯤 보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군사 독재 하에서 받던 국수주의적 학교 교육에 막연히 반발하고 있던 저에게 칼 세이건의 세계주의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중학교 3학년 때 원서를 구해서, 꼭 1년 걸려서 다 읽었습니다. (한 번이요!) 1980년대 초 한국 중학생의 영어 실력이란 또 요즘과는 달리 형편없는 것이라, 엄청난 무리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 번역서를 통해 내용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전문을 수동 타자기로 쳐 내면서 미친 듯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코스모스>를 읽고서 물리학자를 꿈꿨다가, 학부를 마치고서는 과학철학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왜인가요?

▲ <Inventing Temperature>. ⓒ동아시아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론물리학을 너무나 사랑했고, 아인슈타인이나 적어도 파인만 정도의 큰 이론을 내놓는 학자가 되겠다고 야심을 (환상을!) 키우면서, 꿈에도 그리던 캘리포니아이공대학교(Caltech)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물리학과, 학부 교육에서 접하는 물리학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제 머릿속에 꽉 차 있었던 것은, 예를 들자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대로 시간과 공간이 정말 절대적인 기준이 없고 관측자의 상태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것인가, 양자 역학에서 나오는 대로 빛이나 전자가 동시에 입자와 파동이라는 것이 정말 무슨 의미인가, 또 우주가 어느 한 순간 빅뱅으로서 생겨났다면 그 바로 전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들은, 그런 의문을 참을성 있게 들어준 분도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부생 주제에 철학적인 소리 지껄이지 말고 숙제나 해라, 그런 반응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저는 '이 세계 최고라는 대학에서 왜 이럴까' 하고 반감을 느꼈었는데, 쿤의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정상과학의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아주 당연한 것이고, 도리어 제대로 강훈련을 시키는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을 것입니다.

결국, 제가 알고자 하는 것이 다 철학적 질문이라면, 철학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온도계의 철학>을 읽으면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감사의 글에서 미국 고등학교 은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대목이었습니다. 이름을 열거하고 나서 또 이렇게 말했죠.

"내 생애에서 이 책보다 더 나은 무엇을 성취하지 못할 수 있기에 여기에서 그것을 말해야겠다. '이것이 다 노스필드 마운트 허만 덕분입니다.'"

모교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선생님께 특별했나요?

우리가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는 '전인 교육'을 정말로 실행하는 학교였습니다. 단순한 지식보다는 올바른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는 철학이 탄탄히 깔려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는 진정한 인간관계였습니다. 공부뿐 아니라 모든 인생의 고민들을 선생님들께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여러 분들과 교류가 있습니다.

또 개인의 개성을 살려주고, 마음껏 자기 방향을 잡아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학교였습니다. 게다가 금상첨화로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있었고, 서로의 문화에 대해 가르쳐주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저 같은 유학생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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