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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예능,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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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예능,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있다

[편집국에서] 정치의 예능화가 무섭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어서 손을 멈췄다. 저건 또 무슨 예능 프로그램이지, 하면서 채널을 고정했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이름깨나 날렸던 여야 정치인이 해발 3800킬로미터 높이의 코카서스 산맥을 오르며 생기는 일화를 예능처럼 편집한 다큐멘터리(?)였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기획 취지야 이해할 만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죽기 살기로 헐뜯었던 이들이 밀어주고 끌어주며 험한 산을 오르는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번갈아가면서 바뀌는 서로 다른 스타일의 리더십, 또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시청자에게 신선하게 보일 법했다. 아이들도 모자라 70대 '할배'까지 동원된 마당에, 정치인이라고 등장 못 시킬 게 뭔가.

발톱이 빠지도록 고생한 그들에게는 못할 소리지만, 카메라 앵글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을 보면서 안쓰러웠다. 그렇게 백날 (다큐멘터리라고 우기는) 예능 프로그램을 기웃거려봤자, 그들이 대중에게 지도자로서 각인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도자'와 '인기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판단착오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반론이 들린다. '무릎팍 도사'가 점지한 아무개 국회의원은 대중의 지지로 대선 후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꼽히지 않은가. 또 다른 아무개 전 국회의원은 어떤가. 파렴치한으로 찍혀서 금배지를 잃었지만, 예능인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이 예능 프로그램을 기웃대는 게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SBS

그렇다. '인기'와 '존경'와 다르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슈퍼스타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스타들이 지고 또 뜬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금배지를 달아보고자 정치권을 기웃대던 왕년의 스타들을 떠올려 보라!

정치인이 예능 프로그램을 기웃대면서 드물지만 인기는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인기는 연예인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대중이 지금 당장 즐겁게 소비하지만, 언제든지 다른 '신상'으로 갈아탈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이다. 길거리를 오갈 때 대중이 알아본다고 해서, 그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존재감이 강화된 것으로 착각하면 오산이다.

그렇다면, 무릎팍 도사가 점지한 아무개 국회의원은 어떻게 저토록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바로 그가 이전에 쌓은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의 컴퓨터를 지켜주는 백신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나눠준 '업적'이 없었다면 그 국회의원이 저토록 뜰 수 있었을까? 또 그의 이름을 딴 벤처 기업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그렇게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은 <정치의 몰락>(민음사 펴냄)에서 지도자의 조건으로 '업적', '이미지', '비전'을 꼽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업적이다. 호오가 갈리고, 공과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하지만 현대사 속의 지도자는 어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성장 업적이 없었다면 그를 둘러싼 신화도 없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들의 업적이 없었다면, 그들이 과연 민주화 이후에 잇따라 대통령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둔다면 국회의원, 장관 심지어 대통령을 꿈꾸는 미래의 지도자들이 고작 예능 프로그램이나 기웃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까 지도자의 조건 중에서 '비전'을 언급했다. 인기인은 대중보다 한 걸음 아니 반걸음도 앞서갈 이유가 없다. 그저 대중의 욕망을 예의주시하면서 뒤만 좇으면 그만이다. 대중이 돈을 원하면 돈을, 섹스를 원하면 섹스를, 폭력을 원하면 폭력을…. 로마제국 말기의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남쪽 대중의 정서만 놓고 보면 휴전선은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 하지만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반도의 보통 사람들이 전쟁 걱정 없이 미래를 개척하려면 분단 체제의 극복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중에 남북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는 승부수를 던졌다. 평화를 향한 담대한 비전이다.

이렇게 지도자에게는 대중의 상식을 넘어서는 담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대중과 어떻게 소통하고, 얼마나 신뢰를 얻는지에 따라서 그의 지도자로서의 깜냥도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그 프로그램에 나온 일곱 명의 정치인을 포함한 여의도 정치인 중에서 이런 비전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당장 박근혜 대통령부터 문제다. 옷을 곱게 차려 입고 외국을 갈 때마다 상대방 언어로 인사말을 몇 마디 해주는 것은 인기인이나 할 일이지, 지도자가 할 일은 아니다. 기초 연금 공약 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신이 대선 때 약속했던 비전이 하나씩 폐기되고 있는 것이야말로 지도자로서 심각하게 대응해야 할 일 아닌가?

지금 우리는 지도자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도자가 연예인과 다를 바 없이 예능 프로그램이나 기웃대는 나라. 지도자가 대중보다 반걸음이라도 앞서는 담대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나라. 그래서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모조리 예능이 되어 버린 나라.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지도자가 제 역할을 못하는 나라일수록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다. 정치가 부재하고, 지도자가 안 보일 때 대중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똬리를 튼다. 그래서 정치인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낄낄 댈 때마다 무섭다. 귓가에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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