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던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저작인 <이론의 빈곤>이 올해 우리말로 번역(변상출 옮김, 책세상 펴냄)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뜻밖의 일이다. 무엇보다 알튀세르에 대한 가혹한 비판으로 잘 알려진 이 책이 2013년 한국에서 왜 번역이 되었을까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톰슨의 이 책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 후반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이론적·정치적 정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를 비판의 과녁으로 삼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의 실마리는 서두에 나오듯이 "역사 연구는 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가치가 없다"(19쪽)고 단언한 영국의 젊은 이론가들, 곧 폴 허스트와 배리 힌데스에 있다. 두 사람은 이미 당시에 알튀세르조차 경험론자 중 하나로 간주할 만큼 알튀세르를 훨씬 넘어서 극단적 이론주의로 치닫고 있었고, 또 그 이후 곧바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게 되지만, 톰슨의 눈에는 '그 놈이 그 놈'으로 비쳤던 것 같다. 아니면 이 "부르주아 룸펜-인텔리겐차"들의 원흉은 저 파리의 스탈린주의 철학자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책 도처에서 발견되는 비판의 격렬함과 어조의 신랄함은 톰슨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어쨌든 이 책은 1970년대 말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론의 빈곤>(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변상출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전통 유물론의 거대 서사적 주체"가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이는 "무한 질주하는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의 체계" 속에서 "부단히 주체의 부활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실성을 지닌다."(454쪽)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역자의 진단에 동의한다 해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의 체계"이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아닌가? 또는 "역사유물론의 '총체성' 개념이나 '계급 주체'를 해체하는 데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해체해야 할 '대타자', 즉 거대 '자본의 체계'를 해체하는 데는 실패한 듯"한 "리오타르를 위시한 해체주의의 전략"(같은 곳)이야말로 심문의 대상에 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아마도 역자에게는 이 모든 '이론의 빈곤'의 뿌리에는 또 알튀세르가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니 어딜 가든, 언제든 알튀세르가 문제인 것이다. 마치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마술피리로 아이들을 꾀어내듯 전 세계로 떠돌아다니면서 똑똑한 젊은 지식인들을 꾀어내는 알튀세르는 참으로 대단한 마법의 소유자인 듯하다.
어쨌든 알튀세르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해도, 이 책은 1990년대 초 무렵에 번역되었어야 적절한 책이 아닐까? 무엇보다 지금 한국에서 '알튀세르주의자들'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고 한국 학계에서 알튀세르의 영향력이란 미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자나 이 책을 기획·번역한 총서의 책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알튀세리엥의 한 사람인 필자로서는, 알튀세르가 역사적으로 이렇게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철학자로, 또 이미 죽은 줄 알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유령으로 활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니 무언가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해 말한 바 있지만, 알튀세르의 유령들에 대해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 물론 '톰슨의 유령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역시 데리다가 말했듯이, 유령들의 전쟁인 것이다. 유령들이여, 부디 만수무강하시길.
톰슨의 분노
▲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논쟁>(Arguments within English Marxism). ⓒVerso |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물론 페리 앤더슨이다. 1970년대 말~80년대 초의 영국 마르크스주의의 전개 과정에 조금 관심 있는 독자들은 <이론의 빈곤>이 늘 페리 앤더슨의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논쟁>(Arguments within English Marxism, Verso, 1980)이라는 책과 결부되어 논의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20세기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명의 역사가가 불과 2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서로 치열한 논전을 전개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실제로 앤더슨은 그의 책에서 <이론의 빈곤>에서 제기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과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하여, 또 역사학에 대한 톰슨의 관점에 대하여 정중하지만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반(反)비판을 제시한 바 있다. 앤더슨의 책을 흥미롭게 읽었고 또 그의 논박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는 시간을 절약한다는 핑계로 이 대가의 저작을 읽을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알튀세르에 대한 가장 혹독한 비판 중 하나를 직접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알튀세리엥으로서의 자기방어 심리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책을 진작 읽었더라면 알튀세르의 마법에서 일찍 풀려나 '역사의 주체', '계급 주체', '거대 서사적 주체'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든 결국 필자가 이번에,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던 그 책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겪게 됐으니, 역시 편지는 언젠가는 도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이 책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필요했던 것일까? 막상 이 책을 (영어 원전을 곁에 놓고) 한글로 읽고 나니, 필자는 다시 한 번 그 필요성을 부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필자가 보기에 톰슨의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또 훨씬 더 논의 수준이 조악했기 때문이다.
톰슨은 400여 쪽에 가까운 이 책에서 알튀세르 철학의 핵심을 '역사주의'와 '경험주의', '인간주의'와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규정하고(244쪽), 이러한 규정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알튀세르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조롱과 비난을 섞어가며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 공격의 절정은 아마도 "알튀세르주의는 이론의 패러다임으로 환원된 스탈린주의"(358쪽)이며, 알튀세르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신학의 전통"(22쪽, 370쪽)을 대변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이렇게 신랄하다 못해 저주에 가까운 폭언을 퍼붓는 이 책을 읽다 보면 필자 같은 알튀세리엥으로서는 당연히 모욕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게 정상일 텐데, 필자는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알튀세르의 철학 또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톰슨의 비판에 대하여 거의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히려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는 마치 범신론자이자 결정론자인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여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하는, 또는 마키아벨리를 간계와 모사로 점철된 악마적인 정치학자로 이해하곤 하는, 또는 데리다의 철학이 '해체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고 믿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철학이란 참으로 신기한(아니, 무용한?) 학문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이론을 가진 이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논쟁과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그토록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이론의 빈곤
▲ 생전의 에드워드 파머 톰슨. ⓒ출처 : www.nndb.com |
그런데 전자의 방식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미 30여 년 전에 페리 앤더슨이 나름대로 수행한 바 있다. 앤더슨의 이런저런 논지들에 완전히 동감하기는 어렵지만, 톰슨의 책이 출간된 지 2년 만에 영국 마르크스주의의 전통과 당시 상황, 내부 논쟁에 친숙한 앤더슨이 써낸 책보다 더 좋은 책을 쓸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새삼 그 일을 다시 수행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가 앤더슨의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논쟁>을 번역해서 소개한다면, 한국의 독자들은 톰슨의 이 책에 대하여, 또 1970년대 후반 영국 마르크스주의의 상황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필자로서는 이 서평 이후에는 <이론의 빈곤>에 관해서는 그냥 침묵한 채, 톰슨의 <윌리엄 모리스>(윤효녕 외 옮김, 한길사 펴냄)나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이 글이 서평인 만큼 톰슨의 논지 한두 가지에 대해 한두 마디 정도는 해두는 게 좋을 듯하다. 톰슨은 역사학자답게 역사학에 관하여, 역사적 논리에 관하여 이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학은 '역사논리학'을 필요로 한다. 역사논리학은 "물리학의 학문적 방법과는 같지 않"으며, "철학자의 논증담론인 분석논리학의 범주 같은 것에 종속시킬 수도 없다."(90쪽) 왜냐하면 역사학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논리학"(같은 곳, 강조는 톰슨)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학에 입각할 경우 특수한 증거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만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분석의 일반적인 항목들 … 은 고정불변적일 수 없으며, 역사적 사건의 운동에 따라 흔히 변하기도 한다. 조사 대상이 변하듯이 문항들도 적절하게 변해야 하는 것이다."(같은 곳)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뒤에서 좀 더 분명히 밝혀진다. 그에 따르면 "역사유물론이 채택하는 몇몇 비판적 범주들과 개념들은 오직 역사적 범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즉 이 범주들이나 개념들은 조사의 순간에서조차도 형태를 바꾸거나 (또는 형태를 유지하지만 '의미'를 바꾸거나) 다른 사실들 속으로 용해되기도 하는 '사실들'에 대한 정밀한 탐구, 다시 말해 과정의 연구에 적합한 범주들이나 개념들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정태적인 개념적 표상으로 쓰일 수는 없으며 오직 발현이나 모순을 나타낼 뿐인 증거를 다루는 데 적합한 개념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02쪽. 강조는 톰슨의 것이고 번역은 수정했다.) 왜냐하면 "대상들이 변화함에 따라 범주들도 … 변"(124쪽)화하기 때문이다.
반면 알튀세르는 역사논리학이 아닌 철학에나 적합한 논리학에 따라 역사유물론을 이해하려고 했으며, 이에 따라 역사의 범주들은 현실 역사가 변함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실 역사를, 역사적 증거들을 정태적인 개념적 표상들로 환원시키고 말았다. 또는 현실 대상을 사유 대상, 이론 대상으로 바꿔치기 했는데, '이론적 실천'이라는 그의 유명한 개념이 실제로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에서 앤더슨을 따라 한번 질문을 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역사학의 대상만이 변화하는가? 오히려 물리학의 대상은 역사학의 대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하지 않는가? 또는 기상학의 경우는 어떨까? 기상학의 대상인 대기의 움직임이야말로 역사학의 대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톰슨에 따를 경우 기상학의 범주들은 그 대상이 변화함에 따라 계속 변화해야 마땅할 것이다.
요점은 이렇다. 대상이 변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대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또 대상이 변하니까 우리는 엄밀한 인식이 아니라 개략적인 인식, 막연한 경험적 증거들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과학의 활동에 대한 적절한 인식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역사유물론을 발전시키는 데 또는 개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이라고 할 수도 없다(톰슨의 역사학의 실천이 낳은 업적이 어떤 것이든 간에).
오히려 대상이 예측 불가능하고 가변적이면 가변적일수록, 더 많은 (또는 더 정교한) 개념적 규정들이 필요하며, 더 많은 분석 기법들이 요구될 것이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이나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 또는 '지배소를 갖는 구조'(structure à dominante. 영어로는 structure in dominance) 같은 개념들을 도입한 것은 아마도 역사적 변화의 움직임을 조금 더 정교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이라고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해두고 톰슨이 비판의 주요 표적으로 삼는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을 보자. 톰슨은 이 개념에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시도한다. 곧 이 개념에서 알튀세르가 스탈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라는 증거를 잡아내려고 한다. 가령 다음 대목을 보자.
"지금의 요점은 스멜서와 스탈린 두 사람의 전제 속에 함축되어 있고 그 분석 어휘들로 확장된, 역사의 과정에 대한 동일한 사물화에 주목하는 것이다. 둘 다 역사를 '주체 없는 과정'으로 제시하고(또는 제시한다고 가정하고), (인간 행위자(human agency)가 그 이면에 존재하는 구조적 규정의 '담지자'나 벡터로서 간주되지 않는 경우에는) 인간 행위자를 역사에서 축출하는 데 동의하며, 둘 다 인간의 의식과 실천을 자체 동기 유발된 사물들로 간주한다. 아직 한 가지 더 지적할 점이 남이 있다.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라는 이 명시적 개념은 스멜서나 스탈린의 고안물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발견물이라는 점이다."(166쪽. 강조는 톰슨의 것이고 번역은 수정)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제 알튀세르가 인간 행위자를 역사로부터 축출하고 역사는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인간은 오직 배후에 존재하는 구조적 결정들의 함수 내지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자로 만들었다는, 그리고 역사유물론을 '정태적 범주들'의 다발로 환원시켰다는 톰슨의 고발과 탄핵이 뒤따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애초부터 스탈린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형선고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해악스러운 개념일까? 우선 알튀세르가 이 개념에서 말하는 '주체'가 어떤 주체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역사 그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따라 이끌어가는 어떤 주체일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의 신이 이 주체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헤겔의 정신 개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이 개념을 헤겔에게서 이끌어왔으며, 따라서 이 개념은 헤겔을 역사 신학 또는 역사 목적론으로부터 구해내려는 시도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주체 없는 과정'이 없다고 말하는 주체는 바로 역사 배후의 주체, 역사를 자기 실현의 장으로 만드는 신학적이고 초월적 주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그와 동시에 인간적인 행위 주체들 역시 배제한 것 아닌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 가지 사실만 지적하겠다. 알튀세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존 루이스의 글에 답변하는 작은 책에서 "역사 속의 행위자-주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독자들이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에서 영역본에서 해당 대목을 인용해보겠다. "문제는, 개인들은 생산과 재생산 관계들의 존재 형태에 대한 규정 아래에서 역사 속에 존재하는 행위자-주체들이라고 말하는 역사유물론의 성과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와 전혀 다른 것이다. 문제는 역사가 그 규정 양식들 속에서, 대문자 주체라는 관념론적 범주에 따라 철학적으로 사고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Louis Althusser, "Reply to John Lewis", in Essays in Self-Criticism, Translated by Grahame Lock, NLB, 1976, pp. 96~97. 강조는 알튀세르) 아마 이 주제 하나만 가지고도 작은 책 한 권을 쓸 수 있겠지만, 더 이상 이 글에서 논의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톰슨의 거울
간혹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저작이나 글은 그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주기보다는 그 주체 또는 저자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곤 한다. 가령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라는 하버마스의 책을 이른바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독자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음을 시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톰슨의 이 책 역시 이러한 저작들과 같은 부류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알튀세르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주기보다는 톰슨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가 마르크스주의와 역사학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톰슨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씩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반면 이 책이 알튀세르에 대하여 무언가 중요한 진실을 밝혀준다거나 아니면 결정적인 비판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알튀세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반면 알튀세르에 대한 개인적 증오심은 얼마나 대단한지 이외에는 우리에게 달리 밝혀주는 바가 없을 것이다.
알튀세르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연구서와 비판서가 나왔고, 그보다 더 많은 논문들이 쓰였으며, 또 최근에는 알튀세르의 유고들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알튀세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에 있었던 영국에서의 몇몇 논의를 제외한다면, 이러한 연구와 비판, 논의에서 톰슨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최근의 알튀세르 연구에서는 더 그렇다. 톰슨처럼 가혹한 비판가의 이름이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서조차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만큼, 톰슨의 이 책의 성격과 값어치가 어떤지 잘 말해주는 것이 있을까?
번역에 대하여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옮긴이 해제'로 미루어보건대 역자나 이 책을 기획한 총서 책임자들은 이 책에 대해 상당히 애정을 지니고 있고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가 읽어본 바에 따르면, 그러한 애정과 기대에 걸맞지 않게 이 책의 번역은 심각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필자는 처음에 국역본만 가지고 몇 쪽을 읽다가 뜻을 파악할 수 없어서 원서를 들춰본 뒤에야 겨우 그 의미를 파악해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원서와 대조하면서 번역본을 읽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 혹시 이 책이 2쇄를 찍게 된다면, 번역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만한 애정이 있다면 그만한 노고는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