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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멀어지는 노벨상, "정치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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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멀어지는 노벨상, "정치가 문제다!"

[서남 동아시아 통신] 노벨 문학상

올해도 어김없이 노벨 문학상 관련 보도들이 소나기처럼 지나갔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던 노벨 문학상이 한국 문인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나온 지 벌써 오래지만, 번번이 비켜간다.

그래도 이 상에 관한 한 예전에 비하면 우리 사회가 촌티를 꽤 벗었다. 장폴 사르트르도 거부한 상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는 냉소도, 수상자들을 마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대하듯 하던 그 기이한 열광도, 이제는 우리 사회의 여론이 되지 못하는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노벨 문학상이 별건가?

일찍이 임화(林和)는 노벨 문학상이 서구 문학의 변방 스웨덴의 소박한 문학 취미를 반영한다는 취지의 견해를 밝힌 바 탁견이다. 타면 좋지만 뭐 못 타도 너무 서운할 건 없다는 평상심을 지닐 일이거니와, 노벨 문학상을 빙자해 한국 문학이 어떻게 언어의 국경들을 넘을 수 있을까, 는 한번 생각해 봄직한 주제이겠다.

흔히들 번역 탓을 하지만 그렇게 전가할 일은 아니다. 원작보다 번역이 좋을 수는 없는 법, 문제는 역시 원작이다. 훌륭한 작품만 써내면 되는가? 한국의 경우 특히, 이것만이 다는 아닐 터이다. 한국 문학은 노벨상처럼 서양에서 수여되는 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좋지 않은 조건을 타고났다. 한국어가 영어 불어 독어를 중심으로 한 서양 주류 언어들에서 머나먼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노벨상이 서양 중심적인 건 태생적이다. 물론 비서구권에서도 수상자가 없지 않았다. 비서구권 최초의 수상자로 유명한 인도의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를 비롯하여 한때 아프리카와 남미 문학에서 꽤 배출되기도 했던 터다. 그런데 모국어가 아니라 (구)식민지 모국의 언어로 창작되었기에 좀 야박하게 말하면 유럽 문학의 식민지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국어와 자국 문자로 이루어진 문학을 영위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나라들의 문학은 노벨상에 불리한 가운데, 한국이 더욱 어렵다. 중국은 워낙 중국어 가능 인구가 많은 대국이고, 일본은 요즘 좀 기울어서 그렇지 동양 속의 서양이었다. 한국은 인구도 크지 않고 인지도도 높지 않다. 서양 독서계가 이제 좀 알아볼까말까 하는 정도가 아닐까? 이런 나라가 매년 노벨 문학상에 오르내린다는 건 대단한 일이거니와, 그럼에도 2%가 부족하다.

우선 후계 문학의 생동성 여부가 떠오른다. 현재 거론되는 한국의 후보는 고은 시인이 압도적이다. 더러 소설가 황석영 씨도 섞여 나온다. 이 두 분은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축으로 한 1970년대 민족/민중 문학을 대표한다. 만약 이분들이 수상한다면 그건 그들의 기원으로 되는 한국 민족/민중 문학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세계가 주목하는 후배 한국 문인은 적막한 편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펴냄) 영역판에 대한 돌풍이 그래서 반가운 것인데, 전체적으로는 뚜렷하지 않다. 나무 하나하나를 보면 개성적이지만 숲으로 보면 1970년대와는 다른 차원에서 탁월한 성취로 대두한 문인군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1970년대 이래 형성된 두터운 독자층이 최근 들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형국에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남은 독자조차 외국 문학에 뺏기고 있다. 뭔가 일대 회심(回心)이 절실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이와 함께 동아시아 지역 문학이 부재하는 점이다. 유럽 문학 남미 문학 아프리카 문학 등등 느슨하든 긴밀하든 교류 속에 주제와 형식을 공유하면서 형성된 지역 문학의 집합성이 동아시아에서는 희미하기 짝이 없다. 동아시아, 특히 한중일이 포함된 동북아시아는 오래된 문학 전통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내지 한국 전쟁 이후로는 각기 모국어 안으로 퇴행함으로써 일종의 갈라파고스제도(諸島)로 전락했다.

사실 서양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과 일본도 문학적 변방이다. 일본과 중국 합쳐 수상자 총 4인인데, 그중 서양 망명 중 수상한 중국 작가 1인을 제외하면 겨우 3인이니 초라하다. 탈냉전 시대의 도래 속에 세 나라 문학 사이의 교류도 활발해져 다른 동아시아를 꿈꾸는 동아시아 문학의 출현 가능성도 점쳐졌거니와, 안타깝게도 북핵을 빙자한 분쟁의 확산 속에서 최근 다시 실종의 위기에 처했다.

역시 정치가 문제다. 노벨 문학상도 아시다시피 '문학 더하기 무엇'인데, 그 '무엇'이 정치다. 한국 문학은 특히 '문학'에 정치가 실려야 수상에 가까울 수 있다. 요새처럼 국내 정치가 유신 근처에서 방황하면 가망이 없다. 동아시아 공동의 집을 향해 고투한 그동안의 이상주의를 일시에 포기하고 다시 각자 고립의 길로 퇴행할 위기를 방치한다면 역시 가망이 없다.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고 그래서 더 우애로운 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평화적 분단 극복을 성수하는 것이 한국 문학을 살리고 동아시아 문학을 건설할 지름길이다.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좋은 문학을 창조하는 일로 되는 그때 노벨 문학상은 아주 자연스럽게 선물처럼 우리를 찾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를 놀라게 한 20세 이하 축구 대표 팀 주장의 말이 의젓하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최원식 인하대학교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장)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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