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속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양억관 옮김, 민음사 펴냄)이 포함된 것을 놓고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노벨문학상에 다가가기 위한 작가의 야망과 출판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세계문학전집 수록이 결정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인데, 이는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할 질문임은 분명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제공 |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하루키는 서구문학의 서구 중심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한국문학의 이념논쟁에 은근히 질려 있던 젊은이들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엇'의 대명사로서 수용되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서 세계사적 혹은 한국사적 과제와는 상관없는 삶도 충분히 옹호 가능하다는 '대안적' 내러티브를 발견하고 열광했던 것이었다. 물론 바로 그 점이 하루키에 대한 비판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쏟아지는 많은 비판은 역설적으로 하루키의 문학적 포지션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루키 작품의 세계문학 수록은, 무엇보다도 하루키 현상의 거품을 빼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열광적인 하루키 팬들에게는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펭귄북스를 통해서 읽게 되거나 POP 명곡 선집 속에서 너바나를 처음 발견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니까.
특히 세계문학을 고리타분한 교양의 집적이나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장치로 생각하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도스토예프스키나 토마스 만과 같은 '문호'의 지평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 기존의 작가들에 대한 모욕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유일한 작가'에 대한 모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2. '세계문학'에 대한 강한 열망의 고백
실제로 수년 만에 다시 읽은 세계문학전집 <노르웨이의 숲>은 12시간 전에 뚜껑을 딴 콜라처럼 김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다 읽었을 때 세계문학 전집 속의 하루키야말로 매우 어울리며, 어떤 의미에서 매우 '하루키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루키만큼 드러내놓고 세계문학에 대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 작품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소설 전반부에 자신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즈음 내가 좋아했던 작가는 트루먼 커포티, 존 업다이크,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등이었는데, 학교에서나 기숙사에서 그런 종류 소설을 좋아해서 읽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애들은 주로 다카하시 가즈미, 오에 겐자부로, 미시마 유키오, 또는 현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당연히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묵묵히 책만 읽었다."(<노르웨이의 숲>, p57)
▲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물론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정신병 치료차 숲으로 요양을 간 순수하지만 어두운 나오코와 매우 현실적이며 발랄한 여대생 미도리 사이에서 대학생 와타나베가 갈팡질팡하는 내용을 주로 하는 청춘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나오코는 <위대한 개츠비>의 윤리성과 토마스 만의 <마의 산>으로 대표되는 매우 이상적인 세계문학적 세계를, 미도리는 '미스터리나 역사물, 성인물(…) 실용서. 바둑 정석, 분재, 결혼식 스피치, 반드시 알아야 할 성생활, 담배 끊는 방법'밖에 팔리지 않는 '불쌍한 고바야시 서점'과 '오럴 섹스의 쪽쪽, 철벅철벅, 그런 의성음'이 크게 메아리치는 연속 상영관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언어 세계를 대리=표상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오코가 자살하고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전화를 거는 결말로 끝나는 <노르웨이의 숲>은 실은 학생운동의 후일담 소설이라기보다는, 교양소설로서의 세계문학의 멸망을 진지하게 애도하는 문학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세계문학전집은 이제, 자기 안에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을 또 하나 챙기게 된 셈이다.
3. '세계문학'을 주크하거나 스스로 '세계문학되기', 그리고 그 한계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로 등단한 이래, 우리가 통상 세계문학을 떠올릴 때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거리감이 있는 스타일의 작품들을 써왔다. 물론 초기 작품들 속에서도 <감정교육>과 <전쟁과 평화> 같은 세계문학의 서명도 간혹 나오지만, 그것들은 하트필드의 <화성의 우물> 같은 SF 소설이나 핀볼 머신 만큼도 화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이러한 초기작에 비한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분명 하루키의 세계관의 변화라고 할까, 자신의 취향에 대한 전면적인 커밍아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세계 속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 <해변의 카프카>(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
물론 세계문학에 대한 하루키의 노골적인 구애를,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개인적 영광을 위한 기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끝내 노벨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약 하루키의 사후 전집이 출간된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그의 문학세계가 세계문학과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하루키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피츠제럴드, 챈들러,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을 차례로 번역하고 있는데, 만약 작가의 전집 안에 이러한 번역이 포함된다면(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의 작품 세계의 반 이상이 그들의 이름으로 채워질 확률이 높다. 그것은 20세기 문학 전집 중에서 매우 특이한 형태로, 이를 목도한다면 누구라도 하루키의 문학적 이념이 문자 그대로 '세계문학되기'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왜 그토록 세계문학에 매달렸을까.
▲ <1Q84>(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하지만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은 하루키 세대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이바지했던 팝과 재즈와 세계문학전집, 레닌과 헤겔 대신 현재 유행하고 있는 자국 소설과 아이돌 그룹에 열광한다. 그러한 변화가 '세계성'의 존재양식의 변모만이라면 문제는 단순하겠지만, 옴진리교 사건과 고베연속살인 사건, 그리고 일본 전자회사들의 몰락 같은 큰 사건들은, 일본인들이 보편 가능한 '세계'를 상정하는 능력을 이미 상실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낳게 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하루키의 '세계문학되기'는 일본사회에 대한 하루키 특유의 개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의 개입은 소비 욕망을 잃어버린 세대들에게 책과 음악, 자동차에 대한 소비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낳았지만, 근원적인 문제로서 '세계성'의 창출에 이바지했는지는 미지수이다. 거기에는 그가 만들어가는 '세계'가 실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매우 분명히 이유가 자리한다. 실제로 하루키의 '세계문학' 속에는 한국문학도, 중국문학도, 아프리카나 중동의 문학도 빠져있고, 김사량 같은 이중 언어 작가들도 빠져 있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세계문학'은 영미문학이 인증해준 '세계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의 '세계'는 언제나 1960년대 냉전을 이끌었던 미국에 갇힌 일본이 꿈꾸었던 '세계'의 이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좀 더 시니컬하게 말한다면 그러한 하루키의 '세계'는 아베 신조의 세계관과 그리 다를 바 없으니, 결과적으로 그의 '세계문학'에 대한 열광은 어느 틈에 그의 가장 큰 결점이 되고 만 셈이다.
4. '세계문학'이라는 색채를 지울 때 남는 것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하지만 '세계문학'이라는 반짝거리는 장식을 떼어 낸 하루키의 소설은, 매우 일본적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르는 채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죽음을 결심할 만큼 좌절했던 다자키 쓰쿠루의 현실을, 오늘날 동북아에서 배제된 일본국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읽으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결말부에 다자키 개인의 '잃어버린 역사'가 복원되고 아픔이 치유되는 방식으로는, 동북아의 '역사'가 복원되고 아픔이 치유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물론 순례의 의미가 진정한 자기의 발견에 있다고 한다면, 하루키 안의 일본적인 스타일, 그러니까 잔잔한 자기옹호 방식의 발견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와 같이 먼 길을 걸어온 한국독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방금 딴 콜라에 탄산이 다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듯한, 그런 느낌의 하루키를 만나는 건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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