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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만든 '어처구니', 박근혜가 길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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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만든 '어처구니', 박근혜가 길들여라!

[프레시안 books] 박재영의 <개념 의료>

풍문으로 들었었다.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 박재영이 2년간 미국 생활을 하면서 한국 의료 현실을 정리하는 책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아툴 가완디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김미화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부터 에릭 토플의 <청진기가 사라진다>(청년의사 펴냄)까지, 그의 감수 또는 번역을 거친 책을 즐겨 읽었던 터라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책을 펴자마자 한달음에 읽었다. 역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한국 의료를 쾌도난마로 정리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한국 의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의 원인을 국민건강보험이 최초로 시작된 197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 대목은 이 책의 백미다. 고령 사회, 과학기술이 바꿀 의료의 미래를 예측한 부분도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간 <프레시안>을 비롯한 진보 언론에서 당연하게 여겨왔던 의료 개혁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곳곳에서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 중 어떤 부분은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진영 논리에 기대며 침묵해왔던 것이었고, 다른 어떤 부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 <개념 의료>(박재영 지음, 청년의사 펴냄). ⓒ청년의사
예를 들어보자. 진보 언론은 한목소리로 박근혜 정부의 '4대 중증 질환 100% 보장' 공약 포기를 놓고서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지난 대선 때, 이 공약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라고 비판했던 이들은 누구인가? 입장을 바꿔서, 문재인 의원의 대선 공약이었던 '의료비 100만 원 상한제'는 과연 지킬 수 있었을까?

다들 안다. 현재의 국민건강보험료를 대폭 올리지 않는 한 '4대 중증 질환 100% 보장'이나 '의료비 100만 원 상한제'는 절대로 지킬 수 없는 공약이다. 그러니 지금 박근혜 정부의 '4대 중증 질환 100% 보장' 공약 포기를 놓고서 진보 언론이 핏대를 세우는 일은 진영 논리에 기반을 둔 화풀이일 뿐이다.

흔히 '특진비'라고 불리는 '선택 진료비'를 둘러싼 내용을 읽으면서도 뜨끔했다. <프레시안>이나 진보 언론은 그간 사실상 "선택 진료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를 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박재영은 선택 진료비를 폐지하거나 혹은 국민건강보험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능사인지 묻는다.

"선택 진료비를 없애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환자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좋지만, 병원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 이럴 경우, 병원들은 그 적자를 어디서 메우게 될까? (…) 결국 유일한 방법은 환자들에게 그만큼의 비용을 더 부담시키는 수밖에 없다. 고가의 검사를 더 많이 시행할 것이고, 상급 병실료와 같은 비급여 항목의 가격도 올릴 것이다.

(…) 선택 진료비를 급여화하는 경우는 어떨까? 환자들의 부담도 줄어들고 병원의 매출은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많은 부작용이 예상된다. 우선 국민건강보험 재정으로 선택 진료비를 지불하게 되면, 국민건강보험 혜택이 주어져야 할 다른 어딘가에 쓸 돈이 없어진다. (…) 지금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대형 병원 쏠림'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선택 진료비 폐지를 주장했던 이들도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부작용이다. 박재영은 한걸음 더 나간다. 선택 진료비를 없애라는 주장은 과연 합리적인가?

"갓 의사 면허 혹은 전문의 자격을 획득한 의사와 전문의가 되고 나서 10~20년 동안 경험을 축적한 의사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까,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까. (…) 대형 병원까지 찾아가는 것은 좀 더 전문적이고 수준 높은 진료를 받기 위해서인데, 대형 병원에서 선택 진료가 아니라 일반 진료를 받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은 어딘지 모르게 모순되는 것 아닐까?"

평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지식이 낳은 가치를 홀대하는 한국 사회에 문제의식을 가져온 사람이라면, 이런 박재영의 주장에 뜨끔할 수밖에 없다. 대형병원에 선택 진료비 부담까지 책임지라고 현실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면, 결국은 그의 지적대로 적절한 규제를 통해서 현재의 제도를 보완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이렇게 박재영은 의료 민영화("영리법인 병원을 허용하면 과연 <식코>와 같은 일이 한국에서 벌어질까?"), 의료의 공공성 강화("공공 의료 기관을 늘리는 것이 과연 공공성 강화의 유일한 해법인가?") 같은 난제를 놓고서 도발적인 질문을 책 곳곳에서 던지고 있다. 모두, 그의 시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것들이다.

그간 한국 의료를 개혁하는데 큰 역할을 해온 보건의료 사회운동의 입장에서는 이런 박재영의 주장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국민건강보험을 "사회주의 의료"라 칭하는 보수 언론의 여느 논객과 같은 선상에 놓으면 곤란하다. 많은 부분에서 박재영은 보건의료 사회운동이 어렵게 개혁한 내용을 긍정하고, 때로는 힘을 보탠다.

예를 들어, 그는 민간 의료 보험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국내의 민간 의료 보험 시장 규모가 약 17조 원(2011년 기준)으로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절반이 넘는 규모라는 사실을 개탄해 마지않는다. 시민에게 훨씬 이득인 국민건강보험이 "보험료도 조금 내고 혜택도 조금 돌려받는" 한계 때문에 민간 의료 보험에 비해서 홀대받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이 아니라 소득 분배의 평등성이야말로 건강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건강 불평등에 관한 통찰을 진지하게 숙고하자는 주장이나, 과학기술이 제공한 새로운 의료 기술이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의료비 급등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경고한 대목도 보건의료 사회운동의 활동과 공명한다.

물론 이 책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특히 2000년 '의료 대란'을 언급한 부분을 읽고서는) 의사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된 것은 아닌지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결정적인 대목에서 목소리를 흐린 점이 더 유감이었다. 한국 의료의 문제를 늘어놓긴 했는데, 정작 그것을 해결할 주체는 너무나 모호하게 처리한 것이다.

실타래를 풀려면 칼을 빼들 주체가 필요할 텐데, 도대체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의사를 개혁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의사 역시 이 책을 읽고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시민 사회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보건의료 사회운동의 논리를 비판하는데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한다. (역시, 유쾌하게 읽기는 힘들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그렇다면, 정부인가? 이 대목에서 박재영은 목소리를 흐린다. 하지만 <개념 의료>를 읽으면서, 나는 한국의 의료가 한차례 도약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련한 '1977년 체제'를 깨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그런 충격요법을 시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는 여전히 국가뿐이다.

<개념 의료>를 덮으면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버지가 꿈꿨던 '복지 국가'를 소망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70~80퍼센트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높이고자, 전 국민을 상대로 국민건강보험료를 현재보다 올리자고 설득에 나서는 건 어떨까? 당장의 저항이야 있겠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국민을 설득해서라도 시행하는 것이 지도자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당장 <개념 의료>를 정독할 것을 권한다. 아버지가 만든 어처구니(한국 의료)를, 이제 딸이 길들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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