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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제3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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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제3부 <6>

산시 상인(하) 중국의 월가, 그 영광과 몰락


①핑야오(平遙) 거리에 줄지어 있는 옛 중국의 금융기관, 퍄오하오(票號)

***상인의 신, 관우의 고향을 찾아서**

중국에 살면서 나는 틈이 날 때면 여행을 떠나곤 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상하이 체류 시절에는 장쑤와 저장을, 베이징에 머물 때에는 산둥과 산시를 많이 찾았다. 대개 2박 3일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도 충분히 보고 돌아올 수 있는, 광활한 중국 땅 치고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였다. 베이징 시절에는 낯익은 산둥보다는 좀 생소한 산시를 더 많이 찾았다. 산시는 나를 세 번 놀라게 했다. 산시가 내게 주는 감흥은 그곳을 찾는 방향, 즉 북에서 남으로 갈수록 버전업되었다.

처음에는 여느 관광객들처럼 산시 북부를 찾았다. 중국 오악(五嶽)의 하나인 헝산(恒山). 중국 불교 4대명산의 하나인 우타이산(五臺山), 중국 3대석굴의 하나인 윈강(雲崗) 석불 등등의 명산과 명승지를 둘러보았다. 관광안내 책자의 묘사가 과장이 아니었다. 평균 해발 2,000미터의 산악지대의 붉은 황토 위로 난 검은 아스팔트 길을 굽이굽이 달리며 찾아가는 즐거움은 말할 수 없는 색다름이었다. 황막한 산등성이로 떨어지는 일몰을 뚫고 일제히 무리지어 오르내리는 새떼와 산 아래 마을에서 밤새 타오르는 들불의 황홀함은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엔 산시 중부로 달렸다. 영화 「홍등」의 무대인, 치시엔(祁縣)의 챠오자다웬(喬家大院)을 비롯한 핑야오, 타이구에 수없이 널려 있는 옛날 산시 갑부들의 저택을 목격하고, 옛 중국의 풍요로움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끝으로 산시 남부를 찾았다. 중국 민간신앙의 메카인 관우의 고향 윈청(運城) 시에저우(解州)에 가서 나는 완전히 산시의 매력에 압도당했다.

복숭아 꽃밭 아래서 유비ㆍ관우ㆍ장비가 의형제를 맺기 전에 그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유비는 돗자리와 짚신장수, 장비는 푸줏간 주인이었다는 사실은 『삼국지』의 앞머리를 펼쳐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만 보아서는 관우의 원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관우의 이력을 산시 시에저우에 가서 중국 최대규모의 관디먀오(關帝廟: 관우사당)를 보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관디먀오의 입구 안내판에는 관우는 말 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철물점과 두부장사를 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고 적혀 있다. 결국 『삼국지』의 유비ㆍ장비ㆍ관우 세 의형제 모두 상인이었던 셈이다.

당시 시에저우는 지금의 석유와 석탄의 가치에 맞먹는 귀중한 자원인 소금을 생산하는 염정(소금우물)이 있었던 덕택에 상업이 발전한 편이었다. 관우는 아버지 밑에서 말 장사를 도우며 중국식 복식부기를 창안해냈다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원래 관씨가 아니고 펑(馮) 씨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 악한들을 처치하였던 관우가 관군에게 쫓겨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 닭피를 얼굴에 바르고 성을 관씨라고 속여 위기에서 벗어났었다. 그때 한번 얼굴에 칠한 닭피는아무리 애써 지워도 평생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대춧빛 얼굴의 내력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고향을 떠나 각지를 유랑하던 관우는 지금의 허베이 주어저우(꟔州)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은 후 평생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했을때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하여 조조에게 귀순 종용을 받았다. 조조는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금은보화를 듬뿍 주었으나 관우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조조의 후한 대접에 보답했을 뿐 기어이 유비에게 돌아갔다. 유비 진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관우는 후일 장링을 지키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공에 걸려들어 후베이 당양에서 목이 베어졌다. 관우의 머리는 소금상자 속에 저려져 허난 뤄양으로 보내진다. 조조는 그것을 열어보다가 관우의 입이 호통을 치고 삼각수염이 솟구치는 모습에 대경실색한다.

“관우는 살아도 무서웠는데 죽으니 더욱 무섭구나"

조조는 관우의 수급을 단향목으로 만든 관에 모시고 뤄양의 남문 안에 성대히 장례를 치렀다. 그래서 어쩌면 다음과 같은 민요가 중국의 민간에서 전해내려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머리는 뤄양을 베개삼고,
몸은 당양에 갇히어 있으나,
영혼은 고향 시에저우로 돌아왔네

②산시 시에저우에 있는 관우의 생가터

***관우의 신의, 공자의 신용**

현재 중국인의 최다 신앙의 대상은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나 마호메트도 옥황상제도 아니다. 관우다. 관우는 무신이자 재신(財神)이며 문신이자 농신(農神)이다. 전세계 대다수 중국인에게 관우는 이른바 전천후 전방위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인의 신앙대상은 유ㆍ불ㆍ도뿐만 아니라 기타 등등이 전부 융합되어 있다. 불교의 절이나 도교의 도관이나 신앙대상의 구분은 모호하다. 이곳들에서 부처님이나 옥황상제보다 가장 많이 모시고 있는 상은 『삼국지』의 관우상이다.

사원 뿐만이 아니다. 일반 상점이나 가정집에서도, 집안의 가장 신성한 곳에 관우상과 그의 신당을 차려놓고 조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절에는 항상 대웅전보다 재신각이 더 붐빈다. 중국의 남부 지방에서는 관우를 무신보다는 재신으로 모셔놓고 있다. 관우는 신의의 상징이어서 성실과 신용을 생명으로 받드는 중국 상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다. 관우에 대한 중국상인들의 신앙은 각별하다. 세계 어느 나라의 차이나타운을 가더라도 반드시 관우 사당이 있다. 그렇다면 거의 모든 중국상인이 관우의 상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지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관우는 평생동안 신(信)과 의(義)를 가장 중시했다. 젊어서 유비에게 의지한 후 죽을 때까지 초지일관했다. 중국식 복식부기를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관우의 칼이 날카로웠다(날카로울 이(利)자는 아울러 이익 또는 이윤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 상인들은 어릴 때부터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철저히 교육받아왔다. 그런 점에서 관우는 신의를 지킨 인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모델이고 그를 재신으로 떠받드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외지에서나 외국에서 상업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만 한다.

그저 얄팍한 지식에서 나오는 가벼운 입놀림이나 어줍잖은 먹물 행세나 하는 것이 아니라 칼과 선홍빛 피로써 지킨 관우의 신의를 배워서 역경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터득할 필요가 있다. 세계 굴지의 동남아 화교 상인들과 미국ㆍ일본 화교계 재벌의 치부술(致富術)의 노하우는 바로 관우가 평생 실천 덕목으로 생각했던 신의였다.

산둥 상인은 공자를 스승으로 삼았으나, 산시 상인은 관우를 신으로 받들었다. 공자의 고향 산둥의 상인들은 신용을, 관우의 본향 산시 상인들은 신의를 비즈니스의 제1덕목으로 삼았다. 얼핏 생각하면 신용과 신의란 말은 엇비슷하지만 뉘앙스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약속에 정직함이 신용이고, 의리에 정직함이 신의다**

신용이 유생의 붓과 말[言]이라고 한다면, 신의는 무사의 칼과 행동이다. 산둥 상인이 논어를 읽듯 상업을 했다면 산시 상인은 청룡언월도에 묻은 피를 햝듯 장사를 해왔다. 예리한 칼끝에 목숨을 건 신의가 뭉툭한 붓털에서 나오는 신용보다 한차원 준엄한 느낌이다. 중국전체 민간신앙에서 산시의 관우는 산둥의 공자를 철저히 제압했다. 관우는 뜬구름잡기의 행운의 신이 아니라 천재지변 전란 시에 궁핍한 백성을 돕고 보호하여, 기도하면 즉시 응한다는 영험이 각별한 세속적 신앙대상이다.

③ 중국상인의 신으로 받들어모시는 관우

***상인은 1등, 선비는 꼴찌**

1위 상인, 2위 농부, 3위 군인, 4위 선비.

이는 청나라 옹정제 시대의 대신 유우의(劉于義)가 황제에게 올린, 산시지방의 독특한 사회적 신분서열에 관한 보고서 중 핵심내용이다. 산시 상인은 여타 지역의 옛날 중국사람들과는 달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봉건적 서열의식에서 자유로웠다. 상농병사(商農兵士)라고 할까. 그들은 남방의 안후이 상인처럼 자기비하나 자기학대 의식이 없었다. 온몸과 온마음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을 으뜸으로 받들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시 상인은 곤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뚫고나가는 개척정신과 한번 약속한 것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신의로 충만하였다. 이를 가리켜 서방의 학자들은 ‘산시 정신'이라고 이름하였다.

‘산시정신’ 말고도 산시 상인이 중국 제일의 상인으로 수백년 동안 숭앙받을 수 있었던 객관적 이유는 지리적ㆍ역사적인 배경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매마른 산악지대 골짜기에 그나마 있는 토지라고는 워낙 척박해서 외지로 나가 생계를 도모하지 않고는 입에 풀질조차 하기 어려웠다. 마침 국경에 근접해 있고 북방의 유목민족과 중원의 농경 위주의 한민족과의 교차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남북 물자교류의 요충이 되었다.

석탄과 철광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수공업이 발달하고 철제품이 소비자의 환영을 받았다. 산시의 바느질은 멀리 북아시아 제국까지 팔려나갔다. 명나라 초기 1370년에, 이른바 개중법(開中法)이 실시되었다. ‘개중법’이란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소금전매권을 상인에게 조건부로 넘겨주는 것이다. 상인이 군용식량을 국경지방의 창고까지 운반해주면 정부는 소금판매 허가증을 발급해주고 상인은 염전에서 소금을 인수받아 각지에 소금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말한다. 이 정책의 실시로 제일 먼저 이득을 본 상인은 국경 부근 산시지역의 상인들이었다.

후일 산시 상인은 식량을 국경지역으로 운송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현지사람을 고용하여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게 했다. 그러한 땅을 상둔(商屯)이라고 한다. 나중에는 산시 상인들은 소금판매 허가증을 싼 가격으로 사가지고는 바닷가 염전에 직접 가서 소금을 대량으로 인수하여 거액을 벌어들였다. 수많은 산시 상인은 오늘날의 상하이 격이자 당시 소금 집산지인 양저우(揚州)까지 가서 거기에 눌러앉아 소금도매상이 되었다.

④박물관이 된 르성창
⑤르성창의 지하금고

***옛 중국의 월스트리트, 그 비전의 상술**

관우와 고향이 같은 산시 상인들은 관우의 신의를 각별히 실천했다. 오너(財東: 차이둥)와 전문경영인(掌櫃的: 장궤이더) 사이에는 신의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담보로 삼지 않았다. 전문경영인과 모든 점원들은 점포의 규장과 행위준칙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하나만 들자면 중국근대은행의 전신인 산시 퍄오하오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환어음을 취급하는 여수신업무의 민간 금융기구인 퍄오하오는 주인과 전문경영인의 합작으로 경영된다. 오너는 경영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은 투자하지 않는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퍄오하오는 네 가지 차이로 돈을 벌었다. 첫째 수속비와 환수수료의 차이, 둘째 저울과 은량의 순도에 따르는 차이, 셋째 저축과 이자의 차이, 넷째 은량을 저축해두고는 인출하지 않은 기간의 차이를 이용해 고리대를 놓았다.

퍄오하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핑야오의 르성창(日昇昌)이다. 이곳은 제일 높은 봉급으로 점원들을 대우하였다. 부정을 방지하고 청렴과 정직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또한 점원들의 연봉은 최하 12은량에서 최고 100
은량까지 차이가 있었고, 실적이 가장 나쁜 종업원은 퇴출하는 도태제를 시행했다.

르성창은 매년 섣달 그믐날 밤 모든 점원들에게 성대히 만찬을 베풀었다. 8명씩 한 조가 되어 팔각형 모향의 팔선(八仙)교자상에 앉았다. 자리 서열은 그해 실적에 따라 정해졌다. 말석에 3년 연속 앉게 된 점원은 그 다음날 새해 설날부터는 퍄오하오에 나타날 수 없었다. 점원의 채용은 개인의 이력과 그의 가문의 내력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3대를 거쳐 범죄 이력이 없는 자만이 채용되는데, 모든 신입 점원은 3년의 수습기간을 좋은 실적으로 근무해야만 정식 점원으로 일할 수 있다. 전성기 중국 전체의 퍄오하오의 수는 모두 51개로 산시에만 43개가 있었다. 특히 핑야오 성내 400미터도 안 되는 시다제(西大街)에만 무려 22개의 퍄오하오가 웅거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깔린 지점망을 통해 옛 중국금융계를 호령하였다. 핑야오는 명실상부한 옛 중국의 월가였다.

정보를 중시하고 시황을 예측하여 시장을 장악한다. 이것은 산시 상인이 부자가 된 비결 중 하나다. 장사를 잘 하려면 정보에 밝아야 한다. 싸게 구입해 비싸게 파는 수단에 능한 산시 상인은 상품정보를 매우 중시했다. 그들은 지금의 저장 상인이나 옛날 안후이 상인처럼 혈연을 활용한 네트워크는 없었지만 각종 통로를 이용해 시황을 확보하고 각지 물자의 과잉과 결핍이 상업경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정보를 분석하고 파악하였다. 본점과 각 지점 사이네는 최소 5일에 한 번씩 서신을, 3일에 한 번씩 엽서로 정보를 교환하게 하였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는 산시 상인으로 하여금 돈벌 기회를 잡게 하고 투자를 결심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산시 상인이 고액의 이윤을 벌어들인 비결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 말고도 시황을 틀어쥐고, 특정 품목을 사서 쟁이고 시장을 농단하고 고리로 착취하고 외상판매에 능수능란함이었다. 이를테면 타이구 차오 씨는 선양에 수수가 병충해로 흉작이 들것이라는 정보를 접수하고 즉각 대량으로 묵은 겨와 보리싸라기를 포함, 양곡이란 모든 양곡을 싹쓸이 해서 사재기 하였다. 그리고 추수 후에는 곡물가가 폭등하자 차오 씨는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⑥ 르성창 본관에 걸려 있는 청나라 도광황제의 친필 편액

***산시 상인이 망한 까닭**

산시 상인은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산시 성은 지금 안후이 성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북쪽에는 산시 상인과 남쪽에는 안후이 상인, 왕년의 중국상업의 리그전에서 오랫동안 챔피언 결정전에 단골로 진출하여, 패권을 다투던 팀이 오늘날에는 꼴찌에서 1, 2위를 다투는 형국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첫째, 산시 상인의 상업자본은 여전히 유통영역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명청시대 각종 산업의 이윤이 상업의 이윤보다 훨씬 낮았다. 강희황제 때 전국 22,357개소의 전당포 중에 산시에만 4,659개소로 전체 21퍼센트를 산시 상인이 차지했다. 그들의 고리대 자본은 서민에게 뼛골을 쪼개어 골수를 빨아먹는 듯한 악랄한 착취로서 수많은 수공업자의 자본을 고갈시켜 확대재생산의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산시 상인의 상업자본은 고리대 자본으로 전화되었으며 기형적인 발전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둘째, 산시 상인은 벌어들인 돈을 다른 곳에 재투자하지 않았다. 상인겸 지주가 되려고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황토굴에 파묻어 숨겨두는 습관이 있었다. 청나라 말엽 산시의 거부 하나는 집 한 채만 남겨두고 전재산을 팔고 남는 돈 500만 냥을 황토굴에 숨겨두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본은 재투자하는 것보다 은닉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요즘처럼 세상이 불안할 때는 더욱 그렇다. 특히 산시 지역의 황토는 무기물이 적어 잘 썩지 않아 돈을 파묻는 데는 적격이다.”

셋째, 산시 상인들의 금융업은 청대 말엽에 들어온 서구의 은행 시스템에 무너졌다. 완고하기만 했던 전통적인 금융체계의 폐쇄성이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다.

끝으로 관상결탁이다. 이게 가장 근본적인 산시 상인의 패망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봉건시대 상인들은 정부와 결탁을 해야만 했다. 정부가 수립하고 실시하는 정책은 상인의 경영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상인은 애써 그의 재력으로 벼슬아치와 교분을 맺으려고 하거나 정부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산시 상인도 예외가 아닐 수 없었다.

청나라 중반 이후 산시 상인은 남방의 안후이 상인을 닮아갔다. 그들은 라이벌 안후이 상인을 억누르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관리들을 구워삶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그 방면에서 아무런 손색이 없었을 뿐더러 더구나 독특한 점이 있었으며 아교풀처럼 정부와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산시 상인은 우선 가난한 과거준비 유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생이 일단 과거에 급제하면 산시 관계망을 통해 그를 산시 상인과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지방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공작을 펼쳤다. 산시 상인에 의해서 출세한 유생은 산시 상인을 위한 관리로 전락해버렸다.

어떤 산시 상인들은 돈으로 관직을 샀다. 청나라 중엽 정부가 군대의 급료와 위문품을 모금하기 위하여 돈으로 살 수 있는 관직의 문호를 활짝 열었다. 돈만 바치면 누구라도 순전한 명예직이지만 각성의 성장, 각부의 낭중 2품 벼슬까지 살 수 있었다. 산시 상인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각종 관직을 대량으로 샀다. 그리고 그들 상호간 비밀을 철저히 지켰고 권력의 비호를 받았다.

한편 현직의 왕공대신은 산시상인과 수단과 방법을 다해 교제를 맺으려고 애썼다. 관료는 산시 상인의 재력에 기대어 상급자에게 뇌물을 바치고 자리를 보전하거나 승진했다. 산시 상인은 관료의 권세에 의지하여 탐욕스럽게 폭리를 취했다. 청나라 정부는 재정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산시 상인에게 자주 손을 내밀었다. 산시 상인들은 대외적으로도 러시아혁명, 몽골의 독립으로 넓은 시장과 자본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중화민국의 재정권을 장악한 ‘쿵상시’(孔祥熙: 1880~1967)의 등장으로 산시 상인의 재기가 이루어질 듯했으나 일본의 베이징 점령, 국민당의 몰락과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수 백년간 상권을 잡았던 산시 상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발안마로만 남은 영광**

지금 중국 전역의 도시에는 발안마(足底按摩: 주디안모) 센터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베이징 한 도시만 해도 2002년 말 현재, 발안마 센터 수는 500여 개소가 넘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이며 원조격인 발안마 센터는 중국 외교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족부건강’(足部健康)이라는 곳으로 종업원만 해도 200여 명이나 되는 초대형 규모다.

나는 한중 양국의 손님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러 번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손님들의 발을 아무 말 없이 온힘을 다해 정성스레 안마하는 애띤 여종업원들이 안스러워 ‘고향이 어디냐' 로 말을 붙이면 그녀들은 예외 없이 “산시에서 왔다” 라고 말했다.

나이는 몇 살이냐고 물으면 대개 18세에서 21세라고 잘 대답하지만 ‘하루에 몇 시간 일하고 월급은 얼마냐’ 는 질문에는 끝까지 묵묵부답이다.

그런데 어디서 발안마 기술은 배웠느냐고 물으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을 모아 답한다.

“산시 타이웬안모쉐웬!”(山西 太元按摩學院)

나중에 알고보니 그 안마학원은 중국 현대 안마업계의 대부이자 6.25전쟁 때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두 눈을 잃은 차오디치우(曹荻秋)라는 맹인이 설립했다고 한다.

산시 챠오자다웬. 그날 밤 주인과의 잠자리를 선택된 여인의 방에는 홍등이 걸린다. 홍등을 올리게 된 여인은 발바닥을 두드려 몸 전체의 긴장을 풀어주는 발 안마를 받게 된다. 발바닥을 비단 천으로 감싸 두드리는 소리가 나머지 여인들을 비탄으로 몰아넣는 영화 『홍등』의 따뜻한 불빛 장면이 점점 검붉은 팥빛 이미지가 되어 나의 전신을 아프게 감싼다.

산시의 옛 영광은 발안마로만 남았는가?

⑦ 『홍등』의 무대였던 산시성 차오자다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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