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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제3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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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제3부 <5>

산시 상인 (上) 적도 동지도 돈궤는 산시 상인에게

***나에게는 돈을 사랑한 맏딸이 있다**

①왼쪽에서부터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나에게는 세 딸이 있다. 하나는 돈을 사랑했고 또 하나는 권력을 사랑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을 사랑했다.”

홍콩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 The Soong Sisters, 1997)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혁명지도자 쑨원의 동지이며, 재정적 후원자인 저장의 재벌 쑹야오루(宋耀如)는 중국 근대 역사상 자녀교육을 가장 잘 시킨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평소 주위사람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백 명의 아이들 중에 하나만 위대한 인재로 키운다면 중국은 4백만 명의 위인이 생긴다. 그러면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현재 중국 대다수의 가정은 살림형편 때문에 전심전력을 기울여 자녀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불평하지만 나는 그 어떤 사업보다 자녀교육에 투자할 것이다."

쑹야오루의 세 딸 가운데 돈을 사랑한 첫째 아이링(藹齡)은 산시(山西) 최대의 금융재산가 쿵샹시(孔祥熙: 1880~1967)와 결혼하였으며, 중국을 사랑한 둘째 칭링(慶齡)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과 결혼하였으며, 권력을 사랑한 막내 메이링(美齡)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와 결혼하였다.

쑹야오루의 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20세기 전반 중국사는 쑹씨의 세 딸과 그녀들의 남편들이 쓴 역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맏딸 아이링과 쿵샹시의 결혼은 중국 남부를 대표하는 재벌과 북부를 대표하는 재벌간의 결합을 의미하였다. 아이링은 정치나 경제방면의 뛰어난 수완가이며 사랑다운 사랑을 할 줄 알았던 살림꾼이었다. 산시뿐만 아니라 화베이 지역 최대의 자본가인 쿵샹시와 결혼한 그녀는 한발 앞서는 감각으로 은행업을 시작, 중국 전역의 경제력을 장악하였다. 그녀의 남편 쿵샹시도 훗날 장제스의 2인자 격인 행정원장겸 재정부장을 맡아 돈줄을 한 손에 거머쥐고 국민정부를 좌지우지하는 중국 경제계의 대부가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하나 있다. 장제스의 영원한 맞수, 마오쩌둥도 공산정부의 재정부장 자리를 보이보(薄一波: 1908~)라는 산시 출신에게 떠맡겼던 것이다. 보이보는 지금 생존한 유일한 중국혁명의 제1세대 원로로서 그의 큰아들 보시라이(薄熙來: 1949~)는 현재 중앙위원겸 랴오닝 성장(省長)을 맡고 있으며 제5세대 지도자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하여튼 국민당이거나 공산당이거나 불문하고 20세기 중국의 금고는 모두 산시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②보시라이 랴오닝 성 성장

***참새가 날 수 있는 곳에 산시 상인이 있다**

“10년 동안의 중국을 보려면 선전을 보라. 100년의 중국을 보려거든 상하이를, 1,000년의 중국을 보려면 베이징을, 3,000년의 중국을 보려거든 시안을, 5,000년의 중국을 보려면 산시를 보라"는 말이 있다.

산둥의 타이산(泰山)에서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남북으로 약 400킬로미터, 평균해발 2,000미터가 넘는 타이항(太行) 산맥이 떡 하니 가로막는다. 우리나라의 태백산맥보다 훨씬 험준한 이 산맥의 준령을 넘으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산시다. 산시는 타이항 산맥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시에는 이미 발견된 중국 최초의 고대문명 발원지의 하나인 ‘딩춘런’(丁村人) 유적을 비롯해 구석기 시대 유적지만 20여 곳에 달한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귀에도 익숙한 요ㆍ순ㆍ우임금의 사적지가 모두 산시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곳의 상인은 옛날 ‘진상’(晉商)이라 불리며 남쪽의 안후이(安徽) 상인과 나란히 중국 전통상인의 양대 거두로 불려져 왔다.

지금도 창장(長江) 이북의 중국상인 중에는 산시 상인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세계의 경제사학가들도 산시 상인을 두고 “경영능력, 기업가 정신, 계산적 두뇌 등 금융감각이 탁월해 중국의 베네치아 상인으로 부를 만하다"고 평한다. 지금도 중국에서 경리와 회계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실제 산시 출신이 월등히 많다. 은행ㆍ신탁ㆍ증권ㆍ전당포 등 금융과 관련된 업무역시 산시 출신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해 왔다. 명나라 시대든 청나라 시대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중국의 금융권ㆍ재정권은 산시 상인에게 장악되어 왔다.

한마디로 비단에서 차(茶)ㆍ전당포ㆍ고리대금업에 이르기까지 산시 상인이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다. 서쪽으로는 카슈미르와 아라비아,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의 인천과 일본의 고베,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와 모스크바, 남쪽으로는 홍콩과 자카르타까지 산시 상인이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적지 않은 산시 상인들은 몽골어와 카자크어와 위구르어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중국의 여러 지방도시에는 산시의 오랜 업체의 이름을 딴 도로가 많다. 그래서 산시 상인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참새가 날 수 있는 곳에는 산시 상인이 있다."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 산시 상인의 금융기관이었던 산시퍄오하오(山西票號)는 전 중국의 금융시장을 석권했다. 산시사람은 관리와 군인을 적게 배출한 반면 가장 오래 상업문화의 보유자로 존재하여 왔다.

③산시 성. 붉은 테두리 안이 진상(晉商)의 핵심 발원지

***고생은 먼저 사고 물건은 나중에 판다**

산시 상인들 대부분은 맨손으로 출발했다. 악전고투를 불사하는 창업정신으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타이항 산맥 동쪽의 비옥한 산둥과는 정반대로 산시는 메마른 산악지대의 연속이며 농지는 비좁고 척박했다. 당연히 농사만으로 산시 주민들 대부분은 이듬해 초봄을 넘길 수 없었다. 뼛속까지 저며드는 이른 봄의 삭풍은 그들을 머나먼 타향길로, 장사의 길로 내몰았다. 그러나 애지중지 고향을 못 잊는 산둥 상인과는 달리 산시 상인은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잘도 참아냈다. 그래서 청나라 시대의 명사였던 기윤(紀鈞)은 이렇게 말했다.

“산시사람은 대부분 상업에 종사한다. 그들은 열 살이 채 안 되어 무역을 배우고, 재산을 모아야만 장가를 든다고 생각한다."

역시 청나라의 문인 하추도(何秋濤)도 “창장 이북의 무역은 모두 산시 상인이 주름잡고 있다. 그들은 매우 검소하고 부지런하면서도 큰돈을 버는 데 능하다"고 평했다.

산시 타이구(太谷)의 차오(曺)씨네는 농사로는 살길이 막막해 멀리 랴오닝으로 장사를 떠났다. 랴오닝 서쪽인 삼좌탑(三座塔: 지금의 차오[朝陽])에 정착해 황무지를 일궈 채소를 심고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었다. 또한 콩나물 장사 등 온갖 영세한 규모의 생업에 종사했다.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히자 그들은 자신의 양조장을 개설하여 술을 팔면서 일용잡화상을 겸업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온갖 고달픔과 어려움을 이겨냈다. 삼좌탑이 상업으로 번창하자 청나라 조정은 그곳에다 차오양 현을 설치하고 나중에는 차오양 부로 승격시켰다. “차오씨네 상점이 먼저, 차오양 현은 그 다음" 이라는 속담이 오늘날까지 나돌만큼 차오가(家)의 상점이 없었다면 21세기 랴오닝의 주요도시의 하나로 발전한 차오양의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라는 게 일반의 평가다. 훗날 차오가는 츠펑(赤峰), 링웬(凌源), 선양(沈陽), 스핑(四平), 진저우(錦州) 등지에도 지점을 개설하였다.

청나라 중엽에 이르러서는 차오가의 상업세력 판도는 동북쪽의 랴오닝에서부터, 서북쪽의 간쑤․신장(新疆)에서 멀리 알마아타․모스크바․이르쿠츠크까지 뻗어나가 그곳들은 전부 차오가의 상업제국의 판도에 들어갔다. 전성기 차오가의 총 지점수는 640개였으며 고용인 수는 3만 7천여 명이나 되었다.

위의 차오가를 비롯한 산시 상인에게는 의지할 만한 객관적 환경은 별로 없었다. ‘고생을 먼저 사고 물건은 나중에 판다'라는 오로지 부지런하고 알뜰한 창업정신뿐 밖에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자신과의 혈투를 즐기는 것처럼 자수성가의 길로 나아갔다.

④차오가(曺家) 박물관의 순금시계

***천하의 서태후도 무릎을 꿇다**

차오가에는 전설과도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온다. 그 가운데 실제 있었던 일 두 가지만 골라서 소개해본다.

“청나라 황실 제일의 보물은 산시의 갑부 차오가 저택에서나 찾을 수 있네."

“황금시계가 서태후를 보고 웃는구나, 차오씨네가 아니었다면 어찌 서태후가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랴."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범하자 서태후는 시안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끝내 연합군에게 굴복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돌아올 여비가 없었던 서태후는 할수없이 산시 최고의 갑부 차오씨에게 10만냥의 백은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차오씨는 그에 상응하는 금액의 담보물 없이는 빌려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그 누구던가? 식사시간에 황제와 황후를 양옆에 부동자세로 보초 서 있게 한 여자 아닌가. 동서고금 인류사에 전무후무한 권력의 화신인 서태후도 어마어마한 재력을 배경으로 가진 차오씨의 배짱에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서태후는 가격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순금 괘종시계를 담보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가지 이야기는, 1923년 그러니까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섰던 때다. 차오가는 외국에서 발전기 한 대를 수입해왔다. 그리고 저택 전부에 전등을 걸어두었다. 차오가의 여러 첩실 가운데 하나는 사치롭기로 말한다면 가히 황당무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곳에 기거했던 어느 첩은 그야말로 낮과 밤이 뒤바뀌는 생활을 하였다. 태양과는 무슨 원수가 졌는지 낮에는 잠만 퍼 자고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고 난 한참 후인 저녁 8시에야 일어났다. 밤 9시경에 아침식사를 하고 밤 12시에 점심을 먹고 아침 6시에 저녁식사를 하고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 침대로 올라갔다.

그녀는 주위사람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참 이상도 하지. 너네와 나는 같은 하나의 태양 아래 사는 데, 어째서 너네는 밤만 되면 칠흑같이 어둡고 우리집은 대낮처럼 밝으냐? 참 이상도 하다 그치?"

그 시절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太原)의 고관들도 사두마차를 타던 시절이었다. 시골 타이구(太谷) 현에는 이미 꽁무니에서 연기가 나는 ‘전기 노새'가 등장했다. 차오가가 승용차를 구입했던 것이다. 그러자 산시 군벌 옌시산(閻錫山)은 눈알이 빨개지도록 질투심에 불타 심각한 불면증에 걸렸다. 옌시산은 권력을 총동원하여 그 ‘전기 노새'를 강제로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든 후에야 잠을 이루었다고 한다.

***「홍등」의 무대, 부자는 나쁜 놈인가?**

⑤영화 「홍등」의 포스터
⑥챠오자다웬(喬家大院)

장이머우 감독, 궁리 주연의 중국영화 「홍등」(紅燈: 원제목은 大紅燈籠高高掛, Raise the Red Lantern, 1991)]을 보셨나요?

1920년대 중국. 대학을 중퇴한 여주인공은 어느 대가집의 늙은 주인에게 넷째 첩으로 들어간다. 주인은 첩들 가운데 매일 한 명을 택해 잠자리를 같이하는데, 그가 고른 여인의 방에는 그날 밤 홍등을 높이 거는 가풍이 전해져 내려온다. 여인들은 서로 주인과 잠자리를 하기 위해 질투와 음해를 일삼는다. 처음에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하던 여주인공은 차츰 자신도 한낱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감에 빠진다. 그러던 중 외간남자와 부정을 저지르다 들킨 셋째부인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미쳐버린다. 그러나 늙은 주인은 젊고 아리따운 다섯째여인을 또 맞아들이고, 이제 그녀의 방에 매일 밤 홍등이 높게 걸린다.

이러한 줄거리를 담은 영화 「홍등」의 무대가 바로 산시 치시엔(祁縣)의 챠오자다웬(喬家大院)이다. 모두 313칸이나 방들이 성벽처럼 둘러싼 이 대저택은 중국의 전통 건축양식인 복합 사합원(四合院)으로 전세계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치시엔에는 송ㆍ원ㆍ명ㆍ청나라 시대의 전통가옥이 천여 개나 남아 있지만 챠오자다웬이 가장 유명하다. 그래서 현대 중국의 저명한 건축가 정샤오시에(鄭孝燮)는 “베이징에 자금성, 시안에 병마용이 있다면 , 치시엔의 챠오자다웬이 있다" 라고까지 극찬하였다.

2000년 겨울 어느 주말, 나는 산시 출장 끝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챠오자다웬(당시 입장요금 25위안)을 찾아가보았다. 뜻밖에도 우리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을 여럿 만날 수 있어 반갑고 즐거웠다. “이곳을 본 소감이 어떠냐?"는 나의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황실 못지 않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누린 변학도 같은 xxx", “중국 귀족들도 정말 많이 들 해드셨군, 그러니 망할 수밖에 없었지" 등등 욕설에 가까운 비판을 하였다. 그러면서 ‘부자=놀부=나쁜 놈'이라는 등식을 강조하였다. 나도 마침 머릿속에 영화「홍등」의 장면이 오버랩 되고 가슴 어귀에는 불그스레한 등 같은 게 자꾸만 치밀어 올라 실컷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에게 “챠오자다웬의 호화로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열 중에 아홉은 “남보다 몇십 배의 노력으로 돈을 벌었으니 그만큼 쓰는 것이 뭐 어때요. 편하게 돈을 벌고 주제넘게 방탕하게 쓰는 것이 나쁜 일이지요"라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데 내심 놀랐다.

원래 챠오자다웬의 역대 주인들은 「홍등」의 주색잡기가 전공(?)인 늙은 남자주인공과는 전혀 달리 근면성실하고 금욕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 대저택의 초대주인은 약 250년 전 챠오궤이파(喬貴發)라는 치시엔 출신의 상인이다. 그는 사람됨이 온후하며 무던하였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는 데다 찢어지게 가난해 주위사람들의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던 그는 치시엔의 여느 소년처럼 만리장성 북서쪽 관문을 넘어가는 낙타 대상(隊商)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낙타를 먹이는 낙타소년이 되기도 했다가 위구르족 주인의 머슴살이를 하는 등 천신만고의 고생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고향 출신인 성이 친(秦)씨인 머슴 하나와 의형제를 맺었다. 둘은 머슴살이 10년 동안 모은 돈으로 내몽고의 바오터우(包頭)로 갔다. 거기서 둘은 사료가게를 열고 전병을 굽고 두부를 갈고 국수를 뽑는 등 먹을 것 덜 먹고 입을 것 안 입는 근검절약으로 장사를 했다. 건륭황제 20년, 마침내 그들은 광성공(廣盛公)을 창립했다. 얼마 후 푸성공(複盛公)으로 바뀌어 불린 광성공은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일종의 종합무역상사로 크게 성장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챠오자다웬에 홍등을 높이 내달았던 사연은 영화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챠오가의 지점이 새로 개설될 때마다 홍등을 내달았던 것이며, 그해 장사가 잘 되든지 집안의 경사나 명절 때 홍등을 높이 내건 것이었다.

***우리는 자수성가가 좋다**

자수성가, 근검절약의 표본으로 산시 최대의 몽골과 러시아 무역상 ‘다성퀘이’(大盛魁)의 창업자 왕상칭(王相卿)를 빠뜨려서는 곤란하다. 어렸을 때 생활이 곤궁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왕상칭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하여 청나라 군대를 자원 입대하였다. 군대 막사 안에서 그는 벼룩시장 같은 것을 열어 돈을 쏠쏠히 모았다. 왕상칭은 생김새가 우락부락하고 키는 8척장사였지만 끈기 하나는 천하무적이었다. 그는 장지에(張杰), 스다쉐(史大學)등과 함께 타향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곤란도 함께 행복도 함께 죽을 때까지 평생 셋이 힘을 합쳐 험난한 인생길을 개척하기로 천지신명께 맹세했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모든 일이 처음에는 쉬워도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실상을.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장씨와 스씨는 고향 치시엔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왕상칭만 홀로 국경의 요충지-사후커우(殺虎口)로 가서 짐꾼장사들을 동원하여 벼룩시장을 계속하였다.

몇 년 후 상황이 좀 나아지자 왕상칭은 행상들을 추가 모집하고 치시엔으로 돌아가서 장씨와 스씨를 설득, 셋이 공동으로 지성탕(吉盛堂)을 창업하였다. 얼마 후 그들은 업체 이름을 지성탕에서 다성퀘이로 바꾸었으며 몇 년후 다성퀘이는 19세기 몽골 러시아 시장을 석권하는 초일류 브랜드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들이 창업부터 성공에는 약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창업과 성공의 노상에서 그들이 겪었던 고생이란 필설로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 빚을 다 갚지 못하자 채권자들이 점포로까지 들이닥쳐 설날 만두를 빚을 밀가루조차 앗아가버렸다. 그들 셋은 설날 아침식사로 한 그릇의 죽을 나누어 먹어가며 주린 배를 달래야 했다.

후손들은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지금도 다성퀘이 사당 앞에 죽 한 그릇, 멜 대 한개, 궤짝 두 개, 저울추로 썼던 돌멩이 한 개를 모셔놓고 있다. 다성퀘이 전성기에는 사원수만 해도 6천여 명, 낙타는 2만여 마리였고 무역총액은 연간 1만 금이 넘었다.

남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고생을 먼저 사고 물건은 나중에 판다는 정신’, ‘어떠한 고통도 참을 수 있는 끈기’에는 중국상인들 가운데 산시 상인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다. 산시 상인은 각고면려ㆍ근검절약을 대대로 이어지는 최고의 상술로 삼았다. 산시상인과 거래할 경우 최선의 정책은 역시 각고면려, 근검절약으로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이로움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가살스러운 약바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난 후는 아주 성심성의로 대우하며 둘도 없는 친구로 삼으려고 하게 된다. 또한 산시에서의 사업이 술술 잘 풀리게 될 것이며 혹시라도 사업에 곤란을 겪을 경우 그들로부터 예기치 않은 도움을 받을 수 도 있을 것이다.

⑦다성퀘이 창립자 왕상칭의 치시엔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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