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중국인의 상술 제3부 <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중국인의 상술 제3부 <3>

후베이 상인(上)―다이아몬드의 중심

***중국 최고위 한국통**

지난 4월 22일, 국내의 한 언론은 위졍성(兪正聲, 1945~) 중국 정치국위원 겸 후베이성 당서기가 방한했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여기서 중국에 이미 진출했거나 진출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위졍성이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방한한 중국 최고 수뇌부 인사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심층정보 두세 가지쯤은 포착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진3-1> <사진3-2> 위졍성 정치국위원 겸 후베이성 서기(왼쪽)와 정더장 정치국위원 겸 광둥성 서기.

첫째, 위졍성은 중국 최고위 인사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한국통이라는 사실. 중국 거상들의 본고장인 저장의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나고 하얼빈군사공과대학을 나온 그가 승승장구의 관운을 떨친 곳은 산둥의 옌타이(煙臺)와 칭다오(靑島)이다.

위졍성은 특히 칭다오에서만 부시장, 시장, 서기를 10년 가까이 맡으면서 중국에 진출하는 전체 한국업체의 3분의 1 가량을 칭다오에 유치하는 놀라운 위업을 쌓았다. 바로 그 덕분에 그는 일개 지방도시의 수장에서 일약 건설부 부장(장관)으로 승진했고, 다시 정치국위원으로 뛰어오르는 초고속 출세의 기염을 토해냈다.

참고로 지금 중국에서 외자유치 실적은 공직자의 승진인사평정에서 비중이 가장 큰 항목이다. 정치인과 관료, 기업가의 출세는 달러를 얼마나 유치했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시스템은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각급 지방 당과 정부도 당서기와 시장의 진두지휘 아래 외자유치 경쟁에 총력을 기울이게 만든다. 중국 수뇌부 가운데 위졍성에 필적할 만한 한국통을 한 명 더 찾는다면 역시 정치국위원이자 현재 광둥성 당서기인 장더장(張德江, 1946~)을 빼놓을 수 없다. 옌볜대학 조선어학과와 북한 김일성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의 한국어 실력은 웬만한 조선족 동포보다 유창하다.

지린성 당서기였던 장더장이 저장성 당서기로 막 부임했을 무렵인 1998년 가을 어느날, 나는 항저우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장더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통역 없이 자유자재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우리나라 어느 고위인사가 저 사람처럼 유창하게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까?’ 부러웠다.

위졍성과 장더장, 이 두 사람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쩡칭홍(曾慶紅) 부주석 등에 버금가는 차세대 중국 최고위층 한국통이다.

둘째, 신정부 수립 후 첫 번째로 방한한 중국고위인사가 왜 하필이면 후베이성 서기인가 라는 의문이다. 후진타오를 위시한 24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 정치국위원은 이른바 ‘중화인민공화국 주식회사'를 이끄는 이사회 격이다. 중앙에서는 부총리급 이상, 지방에서는 중국 양대 도시인 베이징과 상하이의 1인자, 동부연안의 주요 성인 광둥이나 산둥의 당서기나 되어야지만 넘볼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자리다. 연해지역에 비해 경제가 낙후한 편인 후베이의 당서기가 정치국위원에 선출된 경우는 1960년대 이후 중국공산당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이다.

방한 기간 중에 위졍성 후베이성 서기는 우리측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은 산둥에 진출한 한국기업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몇 번이나 표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후베이에 대한 한국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자를 줄곧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후베이는 어디인가?

***중국경제 마운드의 투수**

얼핏보면 중국대륙은 넓은 것 같지만 세계 인구 5분의 1을 차지하는 인구를 감안한다면 그리 넉넉한 것만도 아니다. 중국 땅 서쪽 절반의 대부분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사막과 황무지, 고산지대이고, 나머지 동쪽 절반에 중국 사람 머릿수와 경제력의 9할 가량이 쏠려 있다. 그 동쪽 절반, 중국경제지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성이 바로 후베이다.

후베이는 중국 경제의 네거리다. 우리의 경부선 격인 베이징에서 광저우를 잇는 징광선(京廣線) 철도 대동맥과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이어지는 창장(長江) 대수로가 후베이에서 서로 교차한다. 또한 후베이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하나, 세계 최대 규모의 다목적댐인 산샤(三峽)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1일, 산샤댐의 1기공사 완공으로 후베이는 상하이에서 서부대개발의 입구 충칭까지 이르는 2천 5백 킬로미터의 수상고속도로의 중심 나들목이 되었다. 내륙 깊숙하게 1만 톤급의 화물선도 운항이 가능해져 서부대개발의 물류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한국 전체의 발전량과 맞먹는 발전 시설을 갖춘 산샤댐은 중국 경제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으로도 빛을 더하고 있다.

후베이의 성도, 우한(武漢)에서 동서남북으로 1000킬로 정도를 가보자. 각각 상하이, 충칭, 광저우, 베이징이 나타난다. 이들 중국의 4대 주요도시를 야구장의 홈, 1루, 2루, 3루로 치고 이를 서로 연결하면 다이아몬드 모양이 나온다. 바로 그 다이아몬드의 중심부, 마운드에 후베이 우한은 투수처럼 우뚝 자리잡고 있다.

<사진3-3><사진3-4>

물길이나 뭍길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우한의 교통은 중국에서 가장 편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한은 ‘아홉 개의 성으로 통하는 네거리’라는 뜻으로 ‘구성통구’(九省通衢)라 칭해졌다. 3500년 전 상(商)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우한은 상업도시가 되었고, 명나라 때부터 중국의 4대 도시로 불릴 만큼 흥성했다. 지금도 우한은 중국 6대 도시의 하나이자 화중지방 제1의 중심도시로서 거대한 통상항구와 화물집산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도 우한사람들은 우한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탄식하며 안타까워한다. 마오쩌둥은 애당초 우한에 수도를 정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사람들이 우한은 중국 역사상 단 한번도 도읍지가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충칭, 난징과 함께 중국 3대 화로(火爐)로 불릴 만큼 한여름의 찜통더위가 견디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한사코 반대했다. 후베이 못지 않게 여름이 더운 동팅호(洞庭湖) 남쪽 건너편 후난(湖南)성 태생인지라 웬만한 더위는 참을 수 있는 그였지만 눈물을 머금고 우한을 수도로 하는 계획을 백지화했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중국이 구 소련과의 일전을 불사할 시기 우한사람들 몇몇은 수도를 소련과 가까운 베이징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 안전한 우한으로 옮기자고 연명의 서신을 마오에게 보냈다는 후문도 있다.

우한은 원래 한커우(漢口), 우창(武昌), 한양(漢陽)의 세 도시가 합쳐져 만들어진 도시다. 이름하여 우한삼진(武漢三鎭). 한커우는 상업중심지, 우창은 문화중심지, 한양은 공업중심지였다. 옛날 우창과 한양지역의 사람들은 물건을 구입하러 한커우로 갔다. 오늘날에도 우한의 주요 상가는 거의 모두 한커우에 몰려 있다.

<사진3-5>중국 최고의 상설시장이며 3대 도매시장인 우한 한커우의 한정지에(사진은 전 <한겨레신문> 베이징 특파원 하성봉 기자가 제공한 것임).

***중국 최고(最古)의 상설시장, 한정지에**

중국경제지도의 중심은 후베이. 후베이의 중심은 우한. 우한의 상업중심은 한커우. 한커우의 중심상가는 한정지에(漢正街)다. 이 중국의 중심의 중심에 거듭 자리잡은 이곳은 또한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이다. 한정지에 시장은 명나라 성화(成化)황제 때인 1465년, 한커우 나루터에 모인 배들의 갑판 위에서 벌어진 장터에서 그 첫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1573년 만력(萬歷)황제 원년에 후베이와 후난, 광둥과 광시지방에서 거두어들이는 모든 조운(漕運) 양곡의 집결지를 한커우로 정하고 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창장 최대의 지류인 한수이(漢水)는 중원의 싼시(陝西)에서 발원하는데 상나라의 후예들인 싼시상인들은 한수이 강물을 따라 창장과 만나는 곳까지 내려왔다. 한커우(漢口)라는 지명도 싼시상인들이 붙였다는데, 한수이의 강물이 창장으로 들어오는 입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물건을 싸게 구입해 다른 곳에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큰 이문을 남겼다.

한커우 큰거리에서 서쪽으로 한수이 강변으로 이어지는 이곳으로 천하의 무수한 상인들과 상품들이 소용돌이치며 흘러 들어왔다. 청나라 시대로 접어들면서 한정지에의 상업은 수공업과 나란히 발달했다. 상업과 수공업의 고밀도 집중으로 말미암아 이곳에는 금융, 전당포, 철물, 기름, 비단, 잡화, 약재, 종이 등 이른바 ‘8대 업종'이 형성되었다. 점포들의 깃발이 10리에 연이었고, 1만 개에 가까운 가게의 등불들이 밤새 꺼질 줄 모르는 상업의 장관을 연출했다.

<사진3-6>

중국 중부의 유통물류의 집산지로서의 한정지에는 위다이먼(玉帶門), 양쟈허(楊家河), 우성마요(武聖廟), 스마토우(石馬頭) 등 동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의 상가거리로 죽죽 뻗어나갔다. 외지의 상방(商幇)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고 나면 경영상의 편리와 상부상조를 위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회관을 건립했다. 안후이 상방의 신안(新安)서원, 싼시상인의 싼시회관, 광둥의 영남(岭南)회관, 닝보의 영파회관, 후난의 보경(寶慶)회관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상방들의 회관이 속속 들어섰다.

19세기 말 서구자본주의가 한커우에 들어와 무역항과 조계지를 설치하면서부터는 상업의 중심이 멀리 창장 북쪽으로 이동하자 한정지에는 한동안 침체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개혁개방 원년인 1979년, 한정지에는 다시 부활했다. 그해 이곳에 직업이 없는 청년 100여 명에게 작은 상점을 분양할 목적으로 소상품도매시장이 개설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9년, 이곳의 연간 매출액이 7억 달러를 돌파하자 중앙의 고위인사 하나는 “대외개방은 선전에서, 대내개방은 한정지에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친필휘호를 써서 축하해주기도 했다.

한정지에는 정부와 민간 공동으로 수천만 위안을 들여 수십 동의 전문상가 빌딩을 신축하고 인근의 교통과 환경을 개선해왔다. 초기에 저렴한 일상용품 시장으로만 입소문이 돌던 한정지에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저장의 이우(義烏), 푸젠의 스스(石獅)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소상품도매시장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의류, 문구, 신발, 완구, 가전, 잡화, 가방, 레저용품 가게 등 2002년 말 현재 기준으로 시장의 상점수는 1만 5천여 개, 전체 종업원의 수는 8만여 명. 취급 상품의 가짓수는 10만 개가 넘는다. 중국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제품이 이곳에서 불티나게 유통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유럽 각국, 중남미, 중동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상인들의 매장과 유통의 거점들이 속속 들어차고 있다. 36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베이징 동인당과 함께 중국 4대 한방제약회사에 손꼽히는 예카이타이(葉開泰)를 비롯해 우산가게 수헝타이(蘇恒泰), 비단점포 치엔상이(謙祥益) 등 창사한 지 100년 이상 된 업체만도 12개소나 들어서 있다.

한정지에는 중국 중심부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상품교역시장과 관광쇼핑센터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1세기 지금, 한정지에는 야심에 찬 깃발을 하나 내걸었다.

“세계를 사고 세계를 팔아라(買世界, 賣世界)."

<사진3-7> 한정지에의 야경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