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완료된 <중국인의 상술> 제2부에 이어 제3부 연재를 시작한다. 필자 강효백씨는 현재 경희대학 교수로 있으며, '중국통상법'을 강의하고 있다. 편집자
***고추와 혁명가, 설탕과 상인**
<사진9-1> 쓰촨의 유일한 동쪽 통로, 창장삼협(長江三峽)
사람들에게 쓰촨(四川)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 둘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대개는 쓰촨요리의 알싸한 맛과 <삼국지>의 비장한 멋을 꼽는다. 중국인들 사이에 흔히 오가는 우스갯소리에는, "구이저우(貴州) 사람들은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不怕辣], 후난 사람들은 매워도 겁내지 않으며[辣不怕], 쓰촨 사람들은 맵지 않을까 오히려 두려워한다[怕不辣]"라는 말이 있다. 쓰촨 사람들이 얼마나 매운 요리에 열광하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다.
매운 것을 즐기는 이 세 지역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장사에는 젬병, 혁명에는 귀신'이라는 세간의 평을 똑같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와 반대로 단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 지역 사람들도 있을 텐데, 말해보자면 광둥ㆍ푸젠ㆍ저장ㆍ장쑤ㆍ상하이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 지역 음식들 가운데는 설탕을 아예 봉지째 들어붓다시피해서 만든 설탕조림에 가까운 요리들이 많다. 이처럼 매운 것은 딱 질색이지만 그들은 모두 유대상인도 두 손 번쩍 들고 마는 상인의 기질을 지닌 중국상인들이다.
'고추와 혁명가, 설탕과 상인'의 상관관계(?)는 두고두고 연구해볼 흥미로운 과제이지만, 우선 여기서는 쓰촨상인의 진면목과 상인으로서 그들의 가능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울러 그들을 상대로 한 우리의 대응전략도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쓰촨 성은 분지다. 사람들은 하나의 완전한 지리적 유닛(unit)으로서의 쓰촨 분지를 넓고 두터운, 그러나 양옆이 물 홈이 팬 욕조에 비유한다. 쓰촨의 서쪽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티베트 고원이 우뚝 서 있다. 동쪽은 창장삼협(長江三峽), 북쪽은 친링바(秦嶺巴) 산, 남쪽은 운궤이(雲貴) 고원이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험준한 산맥과 고원, 협곡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욕조의 벽은, 수천 년 동안 무정하게 쓰촨 사람들을 정치ㆍ경제ㆍ문화 모든 면에서 외부세계와의 교류를 단절시켰다.
쓰촨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일종의 '분지 의식'을 갖는다. 쉽게 분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이들의 기질 때문에 쓰촨은 아직도 변방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쓰촨 분지는 천혜의 복지(福地)다. 기후는 온화하고 하천은 종횡으로 흐르며, 토지는 비옥하기 이를 데 없다. 때문에 쓰촨은 자급자족, 자아순환의 경제 능력을 지닐 수 있었다. 더구나 쓰촨은 삼국시대를 제외하면 중국 천하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화로움을 유지해왔다. 쓰촨은 시안ㆍ뤄양ㆍ베이징 등 북방의 정치 중심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들 중원문명과 어깨를 견줄 만큼 당당히 파촉(巴蜀)문명을 이루어냈다. 여기에 다시 토착화된 도가의 신선사상과 안빈낙도의 유가사상이 조화를 이루어 오늘날의 쓰촨 사람들을 낳았다.
개혁개방 이후에도, 절대 다수의 쓰촨 사람들은 아직도 따뜻한 물이 담긴 쓰촨의 욕조를 뛰어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현재 상하이나 베이징 등 대도시에 나가 사는 쓰촨의 남자들은 대부분 건설노무자로, 여자들은 식당종업원이나 가정부로 매일매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폄하되어왔다. 그래서 중국의 전문학자들조차 "쓰촨상인은 사장이 될 수 없고 노무자로 입에 근근히 풀칠이나 하면서 살 팔자다"라는 막말에 가까운 말을 내뱉는다.. 근래 10여 년 동안, 쓰촨 사람이 돈을 벌러 외지에 나간 숫자는 중국의 모든 성 가운데 가장 많지만 사장이 된 사람은 가련할 만큼 적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국 제일의 갑부 류용하오(劉永好) 형제를 비롯해 적지 않은 거부(巨富)들을 배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2002년 중국 100대 부자 출신지별 순위**
1위 저장 19명
2위 베이징, 광둥 각 10명
4위 상하이, 장쑤, 랴오닝 각 8명
7위 산둥 6명
8위 톈진, 헤이룽장, 쓰촨 각 5명
11위 충칭, 허베이, 후난, 푸젠, 싼시 각 3명
16위 산시, 안후이, 장시, 허난, 신장, 궤이저우 각 2명
22위 후베이, 하이난, 네이멍구, 홍콩 각 1명
※광시, 윈난, 칭하이, 간쑤, 시장(티베트) 출신은 단 1명도 없음.
※1997년 쓰촨에서 분리된 충칭 출신의 기업가를 합한다면 쓰촨 출신의 100대 기업인은
8명으로 상하이ㆍ장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동 4위로 랭크된다.
<사진9-2> 쓰촨 청두 시의 전자상가
***그들은 농업을 하듯 상업을 했다**
그땐 정말 그랬다. 쓰촨 사람들은 개혁개방 이전은 물론 개혁개방 초기까지도 욕조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중국의 어느 사회조사기관은 1985년 덩샤오핑의 고향 쓰촨성 광안(廣安)현 출신으로 광둥에 건설 노무자로 나가 있는 100명에게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중 50명은 고향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게 꿈이었고, 40명은 고향에 작은 가게를 하나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나머지 10명은 외지에 계속 남아서 돈을 벌겠다고 대답했다. 이는 외지에 나가 있는 쓰촨 사람에 대한 조사일뿐만 아니라 쓰촨에 붙박여 사는 주민에 대해 조사를 해봐도 아주 현실적이고 정확한 비율이다.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고 술이 항아리에 그득하면 황제도 부럽지 않다."
"장사는 육십 년, 농사는 수만 년, 어떤 맛도 소금 맛보다 못하고 천 가지 업종도 농사만은 못하네."
쓰촨은 사농공상의 수구적인 서열화가 온존해왔다. 그만큼 낙후되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쓰촨은 광둥이나 저장에 명함도 내밀 수 없을 만큼 상업적인 전통이 없었다. 쓰촨에서는 천 가지 만 가지 업종 중 그저 농사가 제일이었다. 쓰촨 사람들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경시하며, 화합을 추구하고 경쟁을 기피했다. 승패는 버리고 중용을 구하고 자급자족하려고만 했다. 사고 팔려고 하지 않는 게 쓰촨 사람들의 골수에 뿌리깊은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쓰촨상인은 농업을 하듯 상업을 해왔다.
이러한 낡은 관념과 소극적인 태도는 쓰촨상인들에게 얼마간 돈을 벌게 해주었지만, 외부사람들은 종종 이들을 거상이 될 재목은커녕 건설 노무자나 구두닦이 정도의 천한 직업에나 어울린다고 멸시했다. 그래서 '상업 전쟁'에서 선제공격의 귀재로 통하는 광둥상인들은 쓰촨에서 사업하려면 가만히 앉아서 그쪽에서 오기를 마냥 기다리지 말라고 외치며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지근한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지그시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그들을 이쪽에서 먼저 찾아 나서는,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그들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생각을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결국 적시에 기회를 잡아 쓰촨에 남보다 한발 먼저 진입한 그들은 쓰촨상인을 아랫사람으로 고용하며 떼돈을 모았다.
<사진9-3> 쓰촨 청두의 거리의 이발사
***쓰촨상인의 잠언 18조**
쓰촨상인들 사이에는 예로부터 다음과 같은 잠언들이 전해 내려온다. 대개 잠언이라는 것은 매일매일 실제 경험과 오랜 시행착오에 바탕을 둔 교훈을 담고 있는 말이다. 쓰촨상인의 잠언에서 우리는 한눈에 그들의 장단점을 파악해볼 수 있음은 물론 그들과의 비즈니스에서 관한 대응전략의 대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장사를 할 때는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따라 처리해야지 고지식해서는 안 된다.
2. 재물은 노출시키지 말고 집안에서조차 깊이 감추어 두어야 한다.
3. 손님을 대할 때는 반드시 부드럽고 기쁜 얼굴로 대하며 교만해서는 안 된다.
4. 흥정할 때나 물가를 물어볼 때 즉시 대답하면 대개 정상가격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말이 느리고 얼버무린 듯하면 필경 사기치는 것이다. 주인이 물건을 사는 사람과 사담을 나누고 절대 값을 깍지 않으면 반드시 이중장부나 이중가격이 있는 것이다.
5. 같은 배에 탄 사람의 짐이 별로 없으면 그는 불량배임에 틀림없다.
6. 날이 아직 밝지 않으면 일찍 일어나지 말고, 해가 서쪽에 떨어지면 바로 보따리를 싸야 한다.
7. 수금할 때에는 오로지 부지런하고 입이 무거워야 하고, 시기를 놓치거나 게을러서는 안 된다.
8. 수입과 지출은 제때에 기입하여 잊거나 착오가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9. 일이 발생하면 남과 상의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10. 술자리에서는 절대 함부로 헛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11 중간상인에게 속지 말고 거래는 스스로 판단해서 한다.
12. 가게의 장식을 너무 화려하게 하여 남의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된다.
13. 재산을 맡길 경우에는 반드시 믿을 만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고, 자금을 방출하려고 할 때는 먼저 거둬들여야 한다.
14. 길거리에서 만난 미녀나 동행자를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15. 거래상대를 만날 때와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하라.
16. 거래상대를 만날 때 반갑게 하는 인사말을 믿지 말고, 상대방의 얼굴 모습과 말과 행동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17. 거래할 때 말을 영리하게 잘 엮어대는 사람은 반드시 사기꾼일 것이고 행동이 소박하면서 조용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다.
18. 거래에는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며 적당한 이익을 보았으면 바로 손을 털어야 한다.
<사진9-4> 쓰촨 청두의 밤의 노점상
***중국에서 제일 성실ㆍ정직ㆍ강인한 쓰촨상인**
예로부터 중국상인 가운데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평을 받아온 상인으로는, 동쪽의 산둥상인과 서쪽의 쓰촨상인이었다. 그러나 산둥은 개혁개방 후 돈맛을 본 다음으로는 떼가 많이 묻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평판을 에누리없이 받아들이기에는 그들 스스로도 계면쩍은 듯 '이제는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 대신 성실하고 정직한 상인을 찾으려면 쓰촨으로 가보라"고 권한다.
쓰촨상인의 또 다른 특성은 단단하고 인내심 강한 근성이다. 백절불굴, 좌절할수록 분발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중도포기 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이다.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그들은 절대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자신의 역량에 의존하고 앞길을 개척한다. 숨통이 약간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들은 바윗돌처럼 강인하게 살아간다. 절대로 용기를 저버리지 않는다. 3전 4기의 오뚝이 인생 덩샤오핑을 떠올리면 된다.
동작은 느려도 크고 힘차고 확실하다. 누가 뭐래도 자기 나름대로 나아간다. 유순한 편이나 비위를 건드리면 근본적으로 야성적이 되며 고집을 내세우기도 한다. 정직하고 인자해서 남에게 신용도 잘 얻는다. 특히 인내력이 있기에 모든 일에 꾸준한 노력가다.
<사진9-5:> 충칭 시가지의 방방쥔
얼핏 쓰촨상인은 키도 작고 꾀죄죄한 게 남성미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난관 앞에서도 겁을 집어먹거나 기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침이 심한 상업의 험난한 바다에서 비범한 용기와 의지력을 발휘한다. 일단 하기로 약속한 이상 자기가 어떠한 손해를 보더라도 달성하고야 마는 근성을 지녔다.
수천 년 동안 쓰촨사람은 부지런히 일하여 전국에서 최대로 많은 인구(충칭 시 포함)를 먹여 살렸다. 1970년대 말 일단의 젊은 쓰촨 여인들이 허난 성으로 밀려들었다.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쉬지 않고 일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자만심 많고 허풍떨고 빈둥거리기 좋아하는 허난의 여인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뤘다.
충칭의 방방쥔(棒棒軍: 어깨에 목봉을 얹어 물건을 나른다 해서 붙어진 별명)은 아주 좋은 예다. 충칭에서는 중국의 다른 도시와 달리 자전거를 보기 힘들다. 언덕과 비탈길이 많아서다. 부두에서 정류장에서 서성거리다가 고객이 부르기만 하면 아무소리 하지 않고 물건을 지고 몇 시간만에 나른다. 하루종일 그렇게 일하고 밤에는 좁고 누추한 숙소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새벽이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또 일터로 나간다. 충칭의 방방쥔은 어림잡아 20여만 명에 이른다. 인기 TV연속극 <충칭 방방쥔>은 그들의 힘든 일상생활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필자 소개**
지은이 강효백은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타이완 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국립 타이완 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와 중국화동정법대에서 수년간 강의를 하기도 했다. 주 타이완 대표부와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대사관 외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주로 중국의 경제와 문화 관련 업무를 맡아왔다.
지은 책으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협객의 나라 중국』(2002), 『차이니즈 나이트 1ㆍ2』(2000), 『협객의 갈끝에 천하가 춤춘다』(1995)를 비롯하여 『중국? 중국, 중국!』, 『동양스승, 서양제자』와 동인시집 『야간열차, 바닷가에서』 등이 있다. 「중국의 경제특구 발전전략」, 「중국 중심항구 선정 논쟁」, 「영수증 복권제」 등 여러 편의 중국 관련 논문과 칼럼을 썼으며 『중국 내 한민족 항일독립운동 100대 사적』(2001)을 시디롬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또 『런민르바오』(人民日報)로 하여금 상하이 임시정부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1999)케 했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기고문이 실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베이징 대학 연구교수를 거친 그는 현재 경희대학 교수로 있으며, '중국통상법'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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