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미군 사격연습장 무단 진입사건으로 한총련(한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은 사방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차라리 비판이나 욕만 들으면 좋으련만 아예 ‘또라이’여서 비난할 가치도 없다는 일부의 시각은 더 아플 수 있다. 하필이면 노무현 정부가 이들의 수배를 해제하는 한편 한총련을 합법화시키려는 논의가 무르익는 단계에 재를 뿌렸으니 많은 일반인들의 눈에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87년 오늘 충남대에서 결성된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은 시운이 좋은 셈이다. 그 전신인 서울지역의 모임(서대협)은 그 해 5월 결성돼 6․29를 주도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결성된 전대협은 6공기간을 통해 임수경의 북한 파견 등 남북화해에 앞장섰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수배자로 이름을 날리던 지도부 출신들은 지금 개혁세력의 선봉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전대협도 임수경을 보냈을 때는 극우파들만이 아니라 일반국민들도 놀라 비판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과격하다’는 식이었지 이번처럼 ‘이상하다’는 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임수경은 이제 우리 역사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전대협이 시운이 좋다고 한 것은 그들이 한총련의 전신으로써 사고도 사실상 같기에 당시 전대협 간부들이 오늘의 대학생이라면 그들도 비슷한 길을 걸어 수구언론의 표적이 될게 뻔했는데 용케 그걸 모면해서다.
물론 최근 한총련 사태를 두고 전경련의장 출신인 임종석은 그들의 운동방향에 충고를 하기도 했으나 그것으로 전대협과 한총련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총련 안에도 임종석 과 같은 생각을 가진 구성원이 없지 않고 이번 미군 사격장에 진출한 것도 한총련 전반의 생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문제는 그 ‘시운’이 통념과 배치되는 점이다. 전대협이 5공 말에 태어나 역시 6공이라는 군사정권 아래서 활동했다면 한총련은 93년에 전대협이 탈바꿈해서 생겨난 것이니 문민정권과 함께 태어난 셈이다. 아무리 삼당야합을 거친 문민이지만 그 수장인 YS는 전대협이 태어날 무렵 이한열의 죽음을 함께 애도했던 ‘우군’이었다.
따라서 한총련은 군사정권하의 전대협보다 호시절을 맞은 듯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96년 연세대에서 일어난 한총련 사태는 마치 5․18의 광주를 보는 기분이었다. 사건 배경을 두고는 이런 저런 말이 많으나 학생들을 해산시키기보다는 가두어서 잡는 데 주력한 것이 그렇고 그들을 잔혹하게 다룬 것이 그랬다. 보수언론이 이들을 폭도처럼 비판한 것도 그렇다.
그래서 YS가 삼당야합을 거치는 동안 완전히 변질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막상 집권하고 보니 한총련 같은 세력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는 분석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것이 설령 옳다 해도 한총련의, 아니 한국 젊은 지식인들이 겪는 고통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기성세대의 숙제를 떠맡는 것이 젊은이들의 숙명이라면 한국의 젊은이들의 고통은 분단이 극복되지 않는 한 그칠 수 없는 것이다. 군사독재도 분단이라는 큰 병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는 군사정권의 극복이 너무 간절한 과제였는데 때마침 그것이 수명이 다한 무렵에 결성된 전대협은 운이 좋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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