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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83>

4월 7일 오후 4시에 나는 동대문운동장이 있는 광희빌딩 부근의 다방에서 30대의 박양씨를 만났다. 다부진 몸매에 크고 정열적인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비교문화 박사과정을 공부하고있다.

커피가 오자 그는 오래 전에 생각했던 문제인 듯 이렇게 말했다.

“조선족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어떤 좌표를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를 가야하며, 어떻게 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반경이 컸으므로 나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압록강변의 소년**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력을 이야기했다.

그는 압록강변에 있는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현급으로는 중국의 유일한 자치현임)에서 4남매중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80년대 초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15세였던 그는 교과서에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쳐 부셨던 거북선사건과 3.1인민봉기(3.1운동)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아주 짧은 단락으로 스쳐 지난 것이었지만 그가 접할 수 있었던 민족사의 전부였다. 이는 민족사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발동된 계기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압록강변에서 놀다가 미리 준비했던 포카 두 개로 “조선통사”를 밀수하여 탐독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개변시킨 대 사변이었다.

특히 을미사변을 읽으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통사’에는 반만년 역사의 민족, 이 민족의 신성한 황궁에서 민족의 국모가 정규부대도 아닌 한낱 일본 깡패들에게 처참하게 시해된 사건이 적혀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구절이 생생하게 보입니다. ‘국모의 머리 태를 끌어내 난도로 죽이고 후원에 끌어가 불로 태워버리고...’ 그 뒤 구절도 생각나지만 국모에게 욕이 될까봐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일제에 대한 치욕과 적개심은 그의 가슴 속에 처음으로 민족이라는 싹을 틔어주었다.

“진짜 쇼크를 했어요. 그런 격정은 2주일간 거의 같은 흥분상태로 지속됐어요. 앉으나 서나 국모가 일제 깡패에 당하는 모습이 떠오르고 그 충격에 어쩔 바를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이런 역사를 가르쳐주지 않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보는 눈길이 이상해지더군요.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민족이 이처럼 수난을 겪고있을 때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고 계셨을까? 이런 엄청난 사건들이 발생했는데도 왜 나에게는 한마디 말씀도 없으시고, 이렇게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마치도 그 역사의 책임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15살 어린 나이에 자아의식이 싹 트기 시작해서 그의 인생의 첫 목표는 자객이 되어 일본의 국모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는 벽보에 급진적인 글을 쓰고, 연설을 하고, 동아리를 무어 밤늦도록 열렬한 토론을 하고, 구호를 써서 붙이는 등으로 학교에서 문제아로 되었다. 네 번이나 학교를 바꾸었다. 17살에는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의 학교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 민족, 국가 등에 대해 온갖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중국의 권위적인 정치잡지인 “반월담(半月談)”잡지에 편지를 썼다. 당시 “반월담”에는 국제정치학원이 소개됐는데 그 명예회장이 영국 찰스 왕자라고 적혀있었다. 그의 꿈은 장차 국제정치학원에 가서 공부하여 큰 정치가로 되는 것이었다. 그는 “반월담”잡지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도 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담한 질문도 했다. 하지만 회답이 없었다. 그는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는 혼자 맑스의 <자본론>을 읽고 스스로 답안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인류는 전쟁과 무기만 없으면 그 군비비용으로 인류사회를 평화롭고 상호 공존하는 지상낙원으로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이론체계를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십대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에게 북경행 경비 지원을 요청했다.

친구들이 열성적으로 모금해주었지만 그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금방 결혼한 23세의 이모부를 설득했다. 그렇게 모금된 돈 150원을 가슴에 품고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은 기차로 왕복 일주일이 걸렸다. 그는 영국대사관에 찾아가 국제정치학원 입학을 신청할 생각이었다. 시골에서 기차도 구경 해보지 못한 소년은 북경에서 일주일을 방황하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곡절적인 일들이 많이 생겼지만 사정상 이 글에는 다 적을 수 없다...

사춘기소년이 겪은 십대답지 않은 고민과 방황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결코 한 천진한 남자애의 장난으로 생각하며 재미있게 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보다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나는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차분했다.

그후 그는 연변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모 신문사의 계약기자를 1년, 대련 개발구 중한북방합자기업 총경리(사장)의 통역을 하다가 상해국제여행사를 거쳐 북경대 역사학부에서 공부했고, 그후 회사를 꾸려 여행사업을 10년간 했다. 1997년에는 한국 세종회관에서 있은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참가한 국제여행업세미나에 중국 유일 대표로 참가하여 제1주제발표를 하기도 했다.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저는 협애한 민족주의에서 탈피하게 됐어요. 그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차차 냉정한 시각에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건**

그는 북경에서 한동안 여행업에 종사하면서 조선족의 특성을 살려 한국시장 개척을 하였다. 그는 한국에 중국관광단을 많이 보냈고, 중국에 한국관광단을 많이 유치시켰다. 어느 한차례 사건이 그에게 충격이 컸다고 했다.

한번은 한국에서 중국관광업계의 150명을 초청해서 큰 행사를 하였다. 그는 비교적 일찍 관광업에 종사했기에 중국에서도 한국시장 개척에는 손에 꼽히는 인물에 속했다. 그가 회사를 위해 명액 3개를 따왔기에 한족인 총경리(사장)도 그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뜻밖에 한국 초청 측에서는 그의 이름만 잘라버리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조선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총경리는 그가 가지 못하게 되자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대체 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국이기 때문에, 조선족이기 때문에 잘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냥 일이 바빠서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이듬해 한국 세종회관에서 관광분야 국제세미나가 있었다. 그는 중국의 유일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논문을 발표하고 저녁만찬이 있었는데, 한국의 관광업계 인사들이 왜 작년의 행사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일어나서 세 가지로 이야기했다. 1,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거절이 됐다. 하지만 고국이어서 조선족은 갈 수 없다는 말을 하기가 창피했다. 2, 중국에서 살아온 조선족 2세지만, 중국에서 아직 “조선족이기 때문에 안 된다”라는 공공연한 민족차별은 한번도 당해보지 못했다. 나는 고국으로부터, 동족으로부터 차별을 받고 충격이 컸다. 3. 앞으로 한국에 더 많은 관광객을 보내어 그런 이유가 얼마나 부당했느냐 하는 것을 알리겠다.

“그러자 높은 박수소리가 터지더군요.”

“노력으로 이해시키는 수밖에 없군요.”

“저는 그 후에도 중국 관광단을 한국에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하여 다른 여행사보다 더 많이 열심히 보내주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서 조선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조선족이라는 집단이 존중받자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요.”

“아직 조선족은 가난하기 때문에 고국은 조선족을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무척 고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존중의 차원에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족이라는 것 때문에 한국에서 동포대우도, 중국인대우도 아닌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아 무척 유감스럽습니다.”

“많이 힘드셨겠군요?”

“저는 냉정합니다. 이럴수록 한국에 해외 동포의 역할을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족이라는 존재의 가치와 위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한국 친구들도 많고, 사업관계로 한국에 여행단체도 많이 보냈습니다. 저는 한국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이 섰습니다. 그리고 조선족이 가야 할 길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보는 조선족의 좌표**

그는 조선족이 나가야 할 좌표를 정함에 있어 민족관, 국가관 정립이 중요하다고 했다.

“저는 저의 민족관과 국가관을 정립했습니다. 저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저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족사회는 격변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자 다양한 관점이 생기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포전인옥(抛磚引玉)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 개인의 견해의 정확성 여부에 대한 판단보다는 모순을 발견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사고하기 위한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따라서 한 견해의 정확성 여부는 논쟁과 실천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는 오래 동안 생각했고, 여러 사람들과의 토론에서 이 관점을 수없이 많이 천명했던 모양으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정한 리듬으로 강의하듯이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구태여 정리를 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기록하는 태도를 취했다.

“첫째, 저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국민입니다. 때문에 중국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합니다. 중국의 일등 공민이 되는 것을 첫 번째 사명으로 합니다. 따라서 공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 국가에 충성하고, 법규를 지키며, 합법적으로 납세하고, 국가이익을 수호합니다. 둘째, 저는 조선민족의 훌륭한 아들로 긍지를 가지고 있고 자부하며, 영원히 민족의 존엄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국수주의 등 협애한 민족주의는 반대합니다. 셋째, 저는 실력을 숭상합니다. 적극적으로 역사발전 진척에 참여하며 역사발전을 추동하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을 사명으로 합니다. 조선족이라는 것을 항상 가슴에 둡니다. 민족의 존엄은 어느 나라든, 어느 민족이든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기신그(키신저) 등은 자기가 유태민족이라는 것을 항상 명기하고 있지만 미국 국무경(국무장관)으로 국가사명을 지켰습니다. 미국 국무경이 되기 위해 난 유태인이 아니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 조선족도 중국에서 유태인같이 우수한 한 집단으로 꿋꿋이 살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민족문제를 풀기 위해 방법론적으로 접근해보겠습니다. 저는 엘리트주의를 숭상합니다.

중의(中醫)에 순세요법(順勢療法)과 역세요법(逆勢療法)이 있습니다. 역세요법은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치료하고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치료합니다. 하지만 순세요법은 머리에 열이 나면 열이 나는 원인을 캐서 치료합니다. 역세요법은 효과가 빠르고 요법이 간단합니다. 순세요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과가 금방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하게 됩니다. 조선족문제도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고치고 배가 아프면 배를 고치는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원견 있는 책략을 펴야 합니다. 저는 관건은 조선족 엘리트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족사회는 이 문제를 첫 자리에 놓고 중시해야 합니다. 조선족은 개인의 실현을 통해 민족이란 집단의 실력상승을 시도하고, 100년을 내다보는 안목과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고국이 조선족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동포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가 한국의 대 중국 관계 책략의 한 내용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 중의 한 가능성으로 조선족 인재양성이 한국에 큰 생산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혜자는 조선족이 되겠기에 먼저 고국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SK그룹에는 방문학자계획이 있어서 해마다 30명 중국인의 공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월 200만원이고, 일년 일인당 2400만원입니다. 이는 한중관계 안목에서 펴는 SK그룹의 방침이기에 이것에 조선족유학생문제를 연계시켜 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숫자를 모델로 정해 보려고 할뿐입니다.

조선족유학생은 1명당 일년에 300만원이면 공부과정 유지에 큰 힘이 됩니다. SK그룹에서 중국학자 일인당 지원하는 2400만원이면 4명의 조선족 석사(2년)를 양성할 수 있고, SK의 30명에 소요되는 경비는 120명의 조선족 석사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10대 명문대학에서 한국에 와 공부하고 싶어하는 조선족 대학생들을 한해에 100명만 받아서 양성한다고 합시다. 3년 후부터 중국의 가장 중요한 분야에 흩어지기 시작해, 10년만 되면 천명의 씨앗이 조선족 수만을 이끌어 인재로 만들 것이고, 그렇게 수렬적으로 파급되면 이 때에는 훨씬 강해진 조선족의 100년 미래가 보입니다.

이런 엘리트들을 통해 조선족은 중국의 유태인이 되어야 합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살펴보면 조선족이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 된다는 것이 미래의 한중관계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유학생들을 취재하면서 느낀 것인데요,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더군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어서 협애한 민족주의에서 탈피해서 대중국 주류사회에 들어가서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중국어를 본 민족보다 더 잘하고, 더 뛰어나게 실력을 키워서 그 분야의 전문가로 커야 합니다. 오직 실력만이 조선족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입니다. 조선족은 한국에 한민족이니 도와달라고 자꾸 기대지 말고, 스스로 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배워야 하고, 조선족으로 지켜야 할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어떤 조선족 젊은이들은 중국 현실에 맞지 않는 모임을 만들고 자꾸 주의만 부르짖는데, 저는 이것이 문제만 일으킬 뿐 조선족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젊음을 실천에 바쳐 대국제적인 안목을 키우고 성장해서 힘을 키워 조선족사회를 영향 시켜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요?”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겠느냐, 라고 한다면 저는 물론 계획이 많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아직도 조선족 중학교의 절반을 차지하는 일어 과목를 영어 과목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이 격정시대에 학과설치문제가 한 세대를 망치고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세계로 나가는 것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큰 죄를 저지른 결과로 나타납니다. 경제력만 있으면 영어교사를 청하고, 높은 상금이거나 영어권 국가 여행권을 내걸고 전국 영어콩쿨을 하는 것입니다. 영어실력이 가장 높더라도 우리 말과 글을 못하면 상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유태인이 비록 신앙 때문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저는 우리 민족도 절대 동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경제실력만 갖추면 먼저 조선족유학생 3년 장학기금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로 조선족을 사랑합니다. 우리 조선족은 수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다시는 흔들리고 떠돌아다니는 민족이 되지 않고, 중국에 뿌리를 굳게 내린 민족으로 크기를 바랍니다. 다른 민족을 배타하지 말고, 자기끼리만 어울리지 말고, 개개인의 실력으로 중국 주류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우리 민족은 진정 안정을 찾을 수 있고, 중국이나 한국에 다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조선족 개개인이 협애한 민족주의보다는 개인주의로 실력을 키워 전체적인 우리 조선족사회의 한 장의 좋은 벽돌이 돼야 합니다.

저는 조선족의 좌우명은 ‘실력만이 생존의 유일한 진리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고 실력을 키워 정치실권, 학술대권을 잡은, 어마어마한 부를 축척한 민족으로 돼야 합니다. 그 때면 고국도 중국의 주류사회에 뿌리 내린 조선족이 자랑스럽겠지요. 지금은 도움을 받지만 그 때면 우리도 고국에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지향적으로 볼 때 현재 LG그룹이 중국에 수억 투자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유학생들에게 조금만 투자하는 것이 그 이상의 결과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원하는 직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중한문화교류의 사신이 되고 싶습니다. 이 일은 이미 많이 해오고 있습니다. 둘째, 넓은 관계의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천재적인 기획가로 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자신의 기획력에 자부하는 편입니다. 셋째, 실력가로 되어 실력 있는 조선족을 묶어 세우고싶습니다.”

“현재 중국유학생연합회와 (주)한솔에서 합작하여 설립한 ‘황하기획(黃河企劃)회사에서 중국학생들이 한국유학을 올 수 있게 하는 중개업무를 개설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박양씨가 중국 측 대표로 ‘황하기획’ 경영이사로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인생의 목표와 관계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중국조선족 대학졸업생들을 한국에 많이 유학 오게 함은 기업의 발전방향이자 저 개인의 가치관이기도 하기에 비전을 두고 임합니다.”

현재 그는 성균관대학교 중국유학생회 회장, 제3기, 제4기 “재한국 중국유학생 연합회” 비서장을 역임하고 있다. 5천명이 되는 중국유학생 연합회는 특히 경쟁이 심하다. 비서장은 중국대사관에서 임명한다. 그는 임기 중 중국대사관을 통해 여러 차례 전국 유학생들의 큰 행사를 기획했고 3.8절 여성외교관기념행사는 연속 2년 기획했다. 그는 자신의 중국어실력, 기획실력 및 전문분야의 사업실력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오후 다섯시 반까지 두 시간 반이 걸렸다.

***빗속에서**

비가 내리고있었다. 박양씨는 빗속으로 멀어져갔다.

박양씨가 말한 민족관이나 국가관이나, 엘리트주의에 대해 다른 견해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논란은 조선족이 자기 진로를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큰 고민으로 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산업화에 직면한 농민들이 도시이주를 시작하여서부터 조선족 몇 세대가 가꾸며 살던 땅이 조금씩 타민족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한국기업의 진출과 함께 조선족의 중국 연해주에로의 이주와 한국 및 세계 각국으로의 조선족 인구의 이동으로 인해 조선족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 생육연령의 여성들의 한국결혼과 도시 진출로 인구 마이너스 장성이 초래되고있고 조선족이 영위해가야 하는 문화원의 소실이 우려된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조선족은 자연히 도시에서의 새로운 조선족 집거구 형성에 초점을 모으게 되고, 디지털경제, 네트워크화한 사회의 다원화한 생존수단에 기대를 걸게 한다.

이 밖에 조선족은 중국국민이면서도 뿌리는 한반도에 있는 것 때문에 스스로 흔들리고, 고국의 냉열변화로 인한 외부적인 충격에 의해 또 흔들린다. 이런 흔들림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 다 바람직하지 못한 이미지를 초래하게 된다. 조선족은 자신의 좌표계를 시급히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사항에는 여러 가지 방법론적인 문제들이 치열하게 제기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 박양씨가 주장한 엘리트주의가 어느 정도 합리적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는 아직도 논쟁과 실천이 증명해야 하는 부분이다.

소년시절에 을미사변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소년이 이른바 “협애한 민족주의자”로부터 “탈피”해 현재의 그의 “국가관”, “민족관”을 정립하게 된 과정은 그에게 있어서 무척 고통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의 민족관은 한편으로는 중국이라는 국가성을 강조하고, 한편으로는 한민족이나 중화민족의 큰 테두리에서 한결 작은 “조선민족(조선족)”을 강조한다. 어찌 보면 중국, 한국에서의 조선족의 현실에 근거해 조선족의 위치와 생존조건을 제시하고 민족(조선족)적인 주체성을 세우려는 성향일수도 있다. 강하게 자기가 속한 작은 집단에 애착과 긍정을 보이는 것은, 일면 한국에서 한민족의 당당한 일원으로 평등한 대화를 원하고, 중국에서는 중화민족의 당당한 일원으로 다른 민족과 어울려 책임과 의무를 다 하며 발전하려는 의지의 표출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박양씨의 견해에 대한 나의 설명일 뿐이다.

현재 조선족과 고국의 관계에서 보면 조선족은 한국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짐스러운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한국의 대 중국진출에 있어 저렴한 가격에 메신저 역할을 했고, 중국 각 대학의 한국어 교수, 한국에서의 중국어 교수, 강사 절대 다수가 조선족이 담당하기에 문화전파 역할, 상호교류 인재 양성 역할을 충분히 했다. 남북관계에 있어 한국은 북한과 같은 체제권의 조선족을 통해 북한을 더 많이 알게 되고 구체적인 사항들에서도 조선족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역할은 한국에 피동적으로 선택된 역할이기 때문에 주동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전에는 한국에 짐스러운 존재라는 인상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조선족은 자신으로의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고국에 평등 관계의 동포로 인정 받을 수가 없다. 한국의 해외 동포법이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족은 반드시 실력을 높여 중국에서 힘있는 공동체 존재 형식으로 고국을 마주해야 한다.

조선족에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거주국과 고국 사이에서 방황하며, 어느 쪽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로, 부평초같이 떠돌아다니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조선족은 중국 국민이다. 남북통일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한국 국력의 한계 및 외교의 현실에 있어서도 조선족은 중국 우수한 국민으로서, 또한 한국의 우수한 해외 동포로 성장하는 길만이 유일한 선택이다. 해외에 동포가 많을수록 고국은 국익신장이 될 수 있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도 사랑하고 한국도 사랑하며 중국 주류사회에서 힘있게 성장해야 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민족이라는 것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상호 사랑, 협력, 발전의 네트워크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포 관계는 한국에도 이익을 가져올 것이고 중국에도 이익을 가져올 것이다.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도 거주국 주류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동화되지 않는 해외동포야말로 성공한 동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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