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유학의 이유와 역사의식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유학의 이유와 역사의식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82>

서울의 모 대학에서 현재 한국철학을 전공하는 30대의 강경수 씨는 4월 8일 오후 6시 반에 혜화동 지하철 4번 입구에서 만났다. 훤칠한 키에 초록색 잠바를 입고 상고머리를 한 얼굴에 미소를 짓는 그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온화해 보였다. 한족지구의 모 조선족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사를, 할빈의 모 대기업 홍보실에서 홍보담당을, 북경의 국제교류단체에서 한중교류에 연관된 활동을 한 경력이 있었다.

***유학의 이유와 갈등**

"저도 이전엔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무작정 짐을 싸들고 문창남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지요.”

나는 눈이 크고 정열적인 경상도태생 시인을 떠올렸다. 문화혁명 때에 조선간첩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10년 하였었다. 그 때 헤어졌던 처녀와의 첫사랑을 잊지 못해 사무치는 시를 많이 써서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타계했다.

”문 선생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철학으로 바꿨습니다...”

갑자기 나를 의식한 듯 미안스레 웃었다.

”가족과 함께 북경에서 살았어요. 8년간 사업을 하면서 돈은 벌어졌지만 마음이 불안했어요. 그 때 저는 민족에 관심이 있는 뜻 있는 조선족청년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었어요. 산업화 진척과 함께 우리가 그처럼 아름답게 간직했던 도덕가치와 미풍양속이 많은 부분에서 무너지더군요. 분명히 민족의 정신세계에 어떤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봤어요. 루루 수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기에 오늘까지 한반도가 아직도 악착같이 분단되고, 우리 조선족사회는 왜 이렇게 흔들리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토론도 하고 선배님들을 모시기도 했지만 중국 땅에서는 답이 안 보였어요. 그러면 100년 전 우리가 이민 오기 전의 영육의 뿌리로 가보자. 그 근본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추적해보고 싶었어요.”

”아, 그랬군요.”

”그렇다고 그 동안의 업적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병든 부분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가다보니 오늘날 역사, 문화, 철학 연구가 활발한 남한으로 흘러들게 되더군요. 경영학이나 IT쪽처럼 돈이 되는 것이 아닌 한국철학을 선택한 것도 이 원인입니다.”

”저는 우리가 민족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기에 고국 앞에 떳떳하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왜곡돼있는 것 같아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조선족은 친일파가 많다던데, 일제가 침략했을 때 조선족이 앞장섰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일본 놈보다 조선족을 더 미워했다고 알고 있다, 라고 합니다. 한국학생들은 자기들끼리도 언쟁합니다. 조선족은 독립군 후예이기 때문에 나는 돕고싶다, 아니다, 조선족은 대한민국이 어려웠을 때 도망간 사람들이다, 라고 말입니다. 직접 총을 메고 일제와 싸우면서 피 흘린 독립운동은 중국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하여 조선족 모두가 독립군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독립군에게 식량과 군비를 지원한 것이 조선족 백성들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잠깐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나는 30세가 지난 어느 단오 날에야 비로소 할아버지도 반일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에 나는 큰할아버지가 함경북도 어랑군에 있던 한산 이씨 선산을 팔아 항일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었다. 큰할아버지의 아들도 반일지사여서 일제의 총에 맞아 희생됐다. 그 날 밤에 할아버지 형제는 아직 식지 않은 시체를 눈 속에서 파내어 다시 묻었고, 고모는 죽은 사람의 혼백을 업고 절규를 하여 굿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할아버지는 1935년의 단오 이튿날에 일어난 연길 감옥 탈옥사건에서 반일지사 4명을 감추어 산 속으로 보내준 분이었다. 마침 단오 날이 아버지 생일이어서 고모는 자연스레 이 일을 상기했다. 지하 교통원인 할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키면 고모는 숱이 많은 머리 속에 비밀쪽지를 넣고 아기를 업고 동네를 다니며 쪽지를 날랐다고 한다. 아무 집에 손님이 왔다 갔어, 라고 하듯이 범상한 기분으로 이야기하는 고모를 보며, 나는 비로소 역사에 기록된 독립지사들의 뒤에 할아버지나 고모처럼 수많은 무명영웅들이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결코 할아버지가 겸손해서 공을 인정해달라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반일운동은 백성들에게 있어 생존과 관계되는 절실하고 보편화 된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적 운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묵묵히 백성으로 살다가 돌아갔다. 백성들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독립운동이고 항일운동이었다.

”한국학생들은 조선족이란 이름부터 북한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거부감이 있다는 것이죠. 김구선생도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계셨더라면 이름이 조선족입니다. 만일 한반도가 통일이 되었더라면 우리 이름은 통일된 이름에 <족>자를 붙여 지어졌을 것입니다.

6.25문제에서도 조선족이 왜 동족상잔에 참전했냐고 아주 나쁘게 보고 있습니다. 조선족은 미국이 한반도를 침략한다고 하여 동원되었고 반도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그 때 연변에서만 해도 6천9백여명의 희생자가 나타났는데 98%가 조선족이었다. 남북 상잔의 비극이 엄청났거니와 그 사이에 끼인 조선족의 비극도 이중 삼중으로 엄청났었다.

"저는 한국학생들이 조선족 역사에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조선족에 대한 대한민국의 이해가 아닌지, 라고 생각하면 무척 착잡합니다. 할아버지들은 중국에 들어서자 먼저 학당부터 만들고 민족교육을 했습니다. 광복 전에 쭉 조국을 위해 싸운 역사가 있고, 그후 끊임없이 정치운동이 일어나 민족동화정책이 실시되었지만 민족공동체를 잘 지켰습니다. 고국에서 조선족의 이미지가 이렇게 인식되는 것이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고민, 그리고 고국관에 대한 충격**

”조선족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친구가 정판룡 교수님을 찾아가 뵌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는 8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 때 정교수님은, 나의 고민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산업화 격변기에 농경민족으로부터 상공위주의 민족으로 탈바꿈하는가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저의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정판룡 교수는 저명한 학자이고 연변대학에서 부총장을 지내셨던 분이다. 그는 항일투사이고 작가였던 김학철 선생님과 함께 10일을 사이 두고 2001년도 가을에 나란히 타계하셨다. 두 분은 조선족사회에서 정신적 지주의 위치에 있었다.

김학철 선생은 조선의용군에 참가해 태항산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고 일제의 감옥에서 다리를 잘랐다. 새 중국 창건 후 극좌노선을 비판하는 작품을 썼다가 반당, 반사회주의 죄명으로 중국의 감옥에서 10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만년에 병에 시달려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골회를 두만강에 뿌려 고향인 북한 원산으로 보내라는 유언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러시아 유학생출신이었던 정판룡 교수는 조선족사회에 사상적인 영향을 크게 일으킨 분이다. KBS 해외 동포상 수상금으로 대학생 장학금을 만들고 평생을 한글교육에 바치셨다. 김학철 선생은 마지막까지 불의에 항거하신 비판의 지성이고, 정판룡 교수는 복잡한 중국의 정치환경 속에서 지혜롭게 조선족문제를 풀어 가신 지혜의 지성이다.

”개혁개방 전에는 조선족이 자치주를 이루고 사는 연변 연길이 조선족의 마음의 성지였었지요. 한족지구 조선족은 연길로 간다고 하면 조선족의 수도에 간다고 마음이 설레이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조선족의 인구유동이 심해져서 연길의 구심점이 예전보다는 못하지요. 조선족 지식인력은 지금 북경에 많이 쏠리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고 지식도 있고, 일정하게 경제력도 갖추고 있지요. 저번에 한 교수님의 집에 갔더니 지성인과 기업인들이 모여 한창 심양, 할빈, 천진 등 대도시에 산재한 조선족을 응집하는 공동체 모델 구성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방황상태인 조선족 농촌에는 녹색야채기지를 만들고, 컴퓨터를 보내고....성공도 실패도 있겠지만, 조선족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학생들을 두루 만나보면서 지금 조선족 젊은이들이 특히 민족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족은 한국을 통해 다른 민족보다는 쉽게 경제를 춰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고국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기에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조선족의 경쟁력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 중국 진출 및 관광을 통해 통역이거나 서비스업, 여행업으로 돈을 쉽게 벌었던 제1차의 기회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족사회는 인구분포로부터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러한 고민이 새롭게 확인하는 고국관과 조선족관에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쭉 만났던 유학생들에게도 똑같은 고민이 있었다.

조선족의 고국관은 외부로부터 세 차례의 큰 충격을 받았다.

첫번은 중국의 극좌노선이 실시될 때인 1958년에 전국적으로 진행된 정치운동인 ”민족정풍”이다. 민족정풍은 이른바 소수민족은 조국관을 정리하고, 한족은 대한족주의를 정리한다는 내용이다. 연변대학 교수 김창걸, 리민창 등을 비롯해 민족주의를 주장했던 이들이 모두 적대적인 대우를 받고 노동개조를 하고 시골에 쫓겨갔다. 후에 극좌노선이 시정되기는 했지만 조선족은 비로소 ”조선족”이라는 대명사가 가지는 정치적인 의미를 알았다.

두 번째는 1966년부터 1976년 ”문화혁명”시기인 중국의 극좌노선의 고봉시기다. 유소기, 등소평 등 수많은 우수한 지도자들이 타도되었었다. 한족들도 물론이거니와 소수민족들은 민족차별, 동화정책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당했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썼던 누명은 ”조선 간첩”, ”남조선 특무”였다. 연변에서만 해도 그 숫자가 3천명, 연루되어 박해받은 사람까지 만 명이 된다. 그 동안 기관총에 포위되어 사상자가 나고, 조선족 정법간부들의 70%가 시골에 쫓겨가는 등 수많은 끔찍한 일들이 발생했다. (”연변 40년 기사”) ”문화혁명”은 등소평의 정확한 노선에 의해 부정되었다. 하지만 ”혁명”중에 조선족은 파란만장한 길을 걸으면서 점차 ”조선족”으로 되어갔다.

세 번째는 1979년부터 시작되어 90년대 전후 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한과의 만남이다. 처음에 서로를 얼싸안았을 때 고국과 조선족은 ”조선이주민”이었던 반세기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동포라는 것에 격동하여 국가소속의 개념이 희미했다. 친척방문자와 약 장사들이 물밀 듯 한국에 입국했을 때 수많은 고국인들이 동정과 사랑의 손길을 뻗쳐주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지나가고 약 시장, 인력시장 등 한국 국익과의 갈등이 빚어지면서 한국은 부득불 한 나라의 질서대로 조선족을 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족은 불법체류자라는 새로운 낱말을 접하게 되고 고국에서 체류시간이 지나면 불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이 늦었던 것은 북한과의 내왕에서 미리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1962-63년, 탄압이 가장 심했던 정치운동기간에 수만의 사람들이 북한으로 갔다. 한 연변사람은 신부와 함께 두만강에 가서 건너편에 서있는 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것으로 결혼식을 했다. 지금 조선족이 북한 친척들에게 지속적인 식량지원을 하는 것에는 그 때의 고마운 감정이 한몫 하고 있다. 해마다 10만 인차의 방북자들 중 대부분이 조선족이며, 94년부터는 방문자의 90%가 무상지원을 목적으로 방북하고 있다.(”남북통일에 있어서 중국조선족사회의 역할”) 현재는 북한도 그 때와는 다른 상황일 것이며 동포들이 어떤 사유로 대거 몰리게 되면 그들도 국법에 따라 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족의 국적개념이 모호했던 또 다른 원인은 국적을 선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조선족 2백만에서 1백만이 귀국했다. 남은 사람들은 여비가 없거나, 부모 3년 제가 끝나지 않았거나, 일본군에 잡혀갔던 아들을 기다리거나 그 외 무슨 사정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중국은 땅을 주고 국적과 정치권리를 부여했다. 물론 조선족이 동북 수전 개발과 항일투쟁 및 새 중국 정권확립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하지만 당장 오도가도 못하고 헐벗고 굶주렸던 1백만의 조선족은 중국에 감사했고 공산당에 감사했다.

조선족은 한국과의 만남에서 ”조선족”의 의미를 다시 알게 된 셈이다. 특히 남한 출신의 조선족들에게 충격이 컸다. 그들에게 고국 행은 다만 철길이 끊어져 갈 수 없었던 집으로 철길이 이어져 다시 가는 과정으로 여겨졌던 것인데 역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한국인들이 조선족을 도와주고 있다. 조선족은 힘들었던 60년대에 도와준 북한에 감사하듯이 힘든 산업화 초기에 도와준 남한에도 감사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조선족이 한국의 국익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국의 일부 기업들이 조선족의 이익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한류가 중국에 불어들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타민족이 늘어났고, 이에 타민족 채용정책을 쓰는 일부 한국기업들의 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조선족은 무척 곤혹스러워졌다. 이제 조선족은 동포의 차원뿐이 아닌 자신의 경쟁력으로 한국에 마주해야 하는 시대에 직면했다.

”특히 대학학력 이상의 젊은이들이 고민을 많이 합니다. 대학생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고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국과 조선족의 이익갈등, 현재 조선족사회에 잠재해있는 여러 가지 위기 때문에 조선족은 어떤 시각에서 고국을 바라 보아야 하고 조선족의 좌표계를 어떤 위치에 확립할 것인가, 라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조선족의 우세 및 역사의 의미**

”우리의 경쟁력은 공부로 키워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유학의 기회를 잡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2백만 겨레에게 애족이란 것이 그렇게도 생명존재의 발판이요, 피같이 절실한 것임을 알고 있다면 한국에만 기대지 말고 스스로 해야 합니다. 조선족은 스스로 주어진 상황을 잘 활용하여 내실을 다져서, 중국 땅에 진짜로 뿌리를 내린 엘리트 그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학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고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다른 민족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중국과 한국의 활무대에 우리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자신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국의 국민으로서 동시에 한민족의 구성원으로서 한중 양국에 환영받는 인간 군체로 되고자 노력한다면, 여러 모로 우세를 가진 진짜 힘있는 조선족 군체가 중국 땅에 우뚝 설 날이 우리 세대에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유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국유학을 우선 순위로 고려해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봅니다. 미국, 일본이나 영국, 독일 등 선진국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경제적으로 상당히 힘에 부칩니다. 한국유학은 필수적이고 건전한 민족문화에 접할 수 있어 금후 민족사회에 이바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갈등이 다른 나라보다는 적고, 경로를 찾기도 좀 더 쉽고, 요금도 저렴하고, 아르바이트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고, 언어에 익숙하기에 우리에게는 지름길입니다. 우리의 우세를 활용해야 합니다. 한국이 있다는 것은 중국의 다른 민족에게 없는 조선족의 우세입니다. 현재 한족들도 수천 명이 한국에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조선족은 경쟁 위기를 느껴야 합니다.”

”한국 유학을 위해서 어떤 부분의 준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중국과 한국 그리고 조선족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고 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학생들마다 역사에 대한 질문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이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한국에 조선족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우리는 한국이라는 거대한 벽에 마주서게 됩니다. ”

그 동안 취재를 받았던 유학생들 거의가 강경수 씨처럼 역사에 대해 강조했다.

1992년도에 문우 6명이 연변조선족문화연구회를 만들고 조선족 이주노선을 답사했던 일을 떠올렸다. 얼어붙은 두만강 가에 서서 우리의 증조부와 조부님들이 막연한 표정으로 이국에 들어설 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연변을 3등분으로 나누어 취재하고 조선족 백년 이주실록을 만들었으나 경비부족으로 출판이 무산되고, 원고도 잃어졌다. 그후 문화답사기, 역사독물, 조선족 인물사 발굴, 장편역사소설 등으로 그 부분에 대한 나름대로의 작업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때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 큰 유감이다. 우리는 종교가 없는 2백만 조선족이 13억 인구대국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생존해 가자면 반드시 역사교육으로 구심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알아야만 민족의 자존과 자긍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급 회의 때에 어떤 소수민족들은 자기 민족 옷이 예쁘지 않다고 입지 않는다. 예쁘다, 예쁘지 않다의 차이는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있냐 없냐의 차이이다. 국가 급 회의에 참가할 때 조선족은 반드시 한복을 입는다. 요즘 예문통신 사이트에 아이디가 ”춘”이라고 하는 조선족유학생이 일본에서 졸업식을 맞아 한복을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떠서 가슴이 찡해 났었다. 일본 애들이 일본복장을 하고 졸업식에 참가하는데 나는 떳떳이 한복을 입고 졸업식에 참가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인 것이 눈물겹도록 자랑스럽다고 했다. 역사를 알아야 중국이나 모국에서 조선족인 것이 자랑스러울 수 있다.

”자신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아야 시공간적으로 자신의 뚜렷한 좌표를 알 수 있고, 중국보다 발달한 모국에 와서 올바르고 효과 있는 '영양보충'을 해갈 수 있습니다.”

강경수 씨가 강조했다.

현재 조선족의 역사교육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성인들은 역사교육의 부진이 조선족의 정신력 부진에로 이어질까봐 걱정하고 있다. 조선족사회는 물론이거니와 모국에서도 해외 동포 역사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해외 동포들에 대한 현재 세대의 왜곡된 인식은 한국과 해외 동포사이의 협력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밤은 깊어 10시 반이 되었다. 기어코 나를 지하철까지 안내하고서도 걱정하는 강경수 씨였다. 같은 생각이라는 것이 초면의 인간을 이처럼 아름답게 만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귀로에 올랐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