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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81>

강희연씨의 소개에 의해 나는 그녀 친구 김의 전화번호를 확보했는데, 내가 미처 연락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낭낭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만나고싶다고 했다.

2003년 4월 11일 점심, 그녀와의 만남은 지명의 글자 하나 차이로 무척이나 곡절적이었다. 그녀는 충무로 1번 출구에서 기다렸고 나는 충정로 1번 출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여러 차례 통화를 하고서야 겨우 만남이 이루어졌다.

까만 정장을 하고 후배친구와 함께 서있는 20대 후반의 그녀는 첫눈에 무척 활달해 보였고다.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왔다. 내가 소속해있는 연변작가협회에서 전국 조선족중소학교 백일장을 주최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낙선했다고 울며 따졌던 고등학교 소녀가 자기였다며, 그 때 나를 본적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즐겁게 웃었다.

우리는 나란히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는 동국대로 향했다. 그녀는 연변 태생이었고 서울 모 대학에서 국어교육과 박사학위를 전공하고있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플래카드가 가득 걸린 동국대 문에 들어섰다.

층계가 가파로웠다. 동국대정원은 벚꽃이 한창이고 비가 내리어 한결 정취가 있었다. 그녀는 삼면이 큰 유리창으로 된 학교 식당으로 안내했다. 짙은 운무 속의 벚꽃 풍경이 그림같이 보이는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바빴으므로 점심을 먹으며 바로 취재를 시작했다.

***갈망했던 한국유학**

연변1중은 연변에서 최고의 고등학부이다. 그녀는 연변1중 출신이었다. 한글로 문학을 하고싶은 일념에서 조문학부에 지원했다. 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가 한국유학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래 전부터 갈망했던 한국유학인데, 오고 보니 너무 복 받았구나 싶군요. 그 동안 너무 작은 울타리에서 산 것 같아요. 고국문화를 접촉하고 보니 배울 것이 너무 많고, 그려보기만 했던 고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한다는 것이 가끔은 꿈같이 생각되곤 해요.”

그녀는 다른 유학생들보다는 행운스러운 케이스였다. 학교 파견 유학생이기에 등록금이 면제되고 생활비도 일부 지급받을 수 있었다.

“일부의 생활비를 지급 받는다고 해도 책값, 교통비 등을 해결하자면 힘들텐데 어떻게 해결했나요?”

“중국에서 떠날 때 저는 400불밖에는 없었어요. 곧 바닥이 났지요. 각종 비용을 해결하려고 첫 방학에는 갈비집에서 일했어요. 중국에서는 부모님이 다 해주셨기에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자랐어요. 한국에서는 절로 해결해야죠.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사장님이 금방 받아주셨어요. 사장님은 조선족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월급만 정한 대로 어김없이 주면 몸이 아파도 쉬지 않고 일을 잘해주고,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주고 과일 하나라도 더 주면, 몸이 부서져도 아끼지 않고 일을 잘한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노동시간이 12시간이고, 초보자이기 때문에 월급 80만원으로 정했어요. 저는 일을 해본 경험이 없기에 정한 월급에 만족하고 일을 시작했어요. 제가 일 할 줄을 너무 몰라 사장님이 무척 실망했어요. 하지만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때문에 많이 봐준 셈이었어요. 그래도 저는 자존심 하나만은 살아서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끔 삐지는 때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이것도 공부라고 생각하니 힘든 나날을 이길만 했어요.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정말 기뻤어요.”

“지금은 중국어강의를 하니까 공부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겠군요.”

“박사과정은 등록금을 자비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국대, 시청, 구청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일자리는 많이 얻을 수 있지만 논문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양했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중국어 강의를 하는데, 등록금과 공부에 필요한 비용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이 아닌 부분에서 오는 갈등**

“유학 중에 갈등에 부딪치는 경우는 없었나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연변대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변에 오는 한국손님들에 대한 가이드를 한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인지 김포공항에 들어설 때만 해도 외국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었고, 고국 땅을 밟는 순간 마음이 마냥 울렁이기만 했어요. 마음을 활짝 열고 공부하는 자세였기에 그냥 부딪치는 모든 문화적인 갈등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한국어교육학과뿐이 아닌 고국문화를 공부하려고 했어요. 제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전부 교수들과 대학생들이었기에 예의가 밝고 수양이 있고 깍듯하게 잘 대해주었어요.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별로 갈등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일상생활이 아닌 부분에서는 갈등이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 한국어 교육과에는 중국의 타민족 유학생들도 있어요. 그들과도 부딪치고 한국인들과도 부딪치는데, 표면에 심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저는 항상 한가지 문제 때문에 갈등하죠.”

“어떤 문제인데요?”

“우리는 누구냐... 라는 문제입니다.”

이어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중국 현지에서 한국어를 교수하는 한 한국인교수가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 중국유학생이 이런 문제를 제기했어요. 중국에 조선족들이 많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면서도 실의를 느낄 때가 많다, 다른 외국어보다 한국어의 적용범위가 상대적으로 적은데 조선족들과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라고 말입니다. 아주 진솔한 이야기죠. 그런데 교수님의 대답에 저는 정말로 깜짝 놀랐어요. 이제는 한족 많이 써요, 이제 조선족은 안 써요, 라고 말입니다.

한족을 많이 쓴다는 이야기까지는 이해하려고 했어요. 한국기업이 중국진출을 많이 하면 한족을 쓰는 일들도 자연스레 많아지겠지요. 하지만 그 뒤 부분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왜 반드시 조선족은 이제 안 쓴다, 라는 전제를 두어야 하며, 왜 반드시 한족들 앞에서 조선족을 안 쓴다 라고 하는 것으로 중국 본토민족에 대한 신뢰를 표시해야 하는 거지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우리 조선족 학생들을 앞에 두고 한족학생들의 앞에서 민족의 지성이라는 분이 어쩌면 조선족을 무시하는 말씀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을까요? 한족들도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데, 왜 한국인 교수님은 우리를 무시해야 하나요? 현실적으로 조선족이 한국에 필요 없어졌다고 해도 말이죠. 조선족들이 잘못한 부분이 있더라고 해도 말이죠.

사실 공부를 하는 동안 이 교수님처럼 조선족은 안 쓴다, 라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는 느끼는 때가 많았어요. 이것은 저 혼자의 느낌이 아니예요.

교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한국어 교수들 중 민족주의적인 분위기를 가진 교수님들까지도 국제화시대 대 중국 진출에 있어 조선족보다는 한족들과 일을 하는 게 더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보편화 하고있고, 이 점을 이해하고있습니다. 어떤 직원을 쓰는가 하는 문제는 동족이라는 표준으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국제시장쟁탈전에서 무역의 흑자를 창출하여 한국의 국력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에는 이 밖의 뜻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조선족들을 통해 한어가 공용어가 된 중국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이제는 중국에서도 제법 규모를 이루었지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수님의 말씀은 조선족들을 이때까지는 썼지만 이제는 안 쓴다, 라는 뜻이겠죠. 해외동포를 일시적인 이용의 존재로 이해하는 이런 안목과 마음을 가진 교수님이 한국에서 소수였으면 합니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30년 동안 중국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민족 문화를 지키고 정체성을 지켜왔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중국문화를 받아들였고, 중국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있다고 해서 민족을 배신한 듯한 힐난을 받아야 하는 때가 있어요. 그들이 중국을 선택할 때에는 또 '2등'으로 제외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참 곤혹스럽죠.

한국이란 환경에서 타민족 중국유학생들도 조선족학생들에게 미묘한 태도를 보입니다. 앞으로 한 테두리에서 같이 일해야 할 사람들인데도 말이죠. 그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있기는 하지만 언어장벽 때문에 성적이 조선족들보다는 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대학원에서는 장학금을 성적에 따라 주는데, 조선족들의 성적이 높다보니 장학금을 타는 비율이 자연히 높습니다. 그 애들은 우리가 조선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거리를 두거나 기분이 나빠합니다. (동포장학금은 당연히 해외 동포들이 더 탑니다.) 이렇게 우리는 양측으로부터 오는 불신의 미묘한 갈등에 신경전을 벌여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스스로에게서 오는 갈등도 심합니다. 타민족 중국유학생들이 한국이 나쁘다고 하면 마음이 상하고, 교수님들이 타민족 중국유학생들을 잘 대해주지 않거나 중국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말하면 또 마음이 상합니다.”

그녀가 흥분하는 것을 보고 곁에 있던 성이 손씨인 20대중반의 그녀 후배가 말했다. 후배는 성균관대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있었다.

“누나는 생각이 너무 복잡해. 물론 그 교수님이 너무하긴 했지만 그 개인의 견해라고 생각하면 돼. 난 그런 복잡한 생각을 안 하기로 했어. 조선족이니 한국인이니 하는 것 골치 아파. 그런 논쟁이 생길 때면 난 모든 사람을 다 개체로 보기로 했어. 한국학생들과 잘 지내기에 열심히 공부만 하고 있어. 파견을 받고 공부하러 왔으니 기본 원칙은 돌아가는 것이고, 돌아가서 조선족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싶어.”

그 말에 그녀는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저는 제 3의 선택을 하기로 했어요.”

“제 3의 선택이라니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저는 학문만 하고 싶어요. 학문은 탈이념, 탈민족적인 거잖아요. 그렇지만 우리 조선족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확고해요. 이번에 논문테마를 조선족소설에 관한 것으로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조선족문학이 범민족 문학에서 아직 위치가 확립되지 않았기에 저의 능력과 힘이 미미하기는 하겠지만 조선족문학을 모국사회에 알려서 조선족사회에 기여하고싶어요.”

20대다운 그녀의 모순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선택은 선택으로 끝나는 일이 아닐 것이고 그녀의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고민이었다.

이어 그녀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국식 사고에는 남의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심합니다. 내 견해는 이렇지만 당신의 견해에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는 세계적이고 열린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화에 대해 조선족 유학생들은 문화의 동질성 때문에 이질적인 부분에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체질적으로 이해와 수용이 빠릅니다. 타민족인 중국유학생들이나 다른 나라 유학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한국의 문화는 타민족, 타국의 문화에 불과하죠. 하지만 교수님들은 반드시 한국인처럼 해야 한다고 요구하곤 합니다. 말끝마다 우리 한국은 이렇게 하지 않아요, 라고 하는데,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를 합니다. 오, 한국은 이렇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강요할 때면 유학생들이 많이 피곤해하고 불만스러워합니다.

한국이 세계화를 위한 입장에서 한국어 교육에 열을 올리고있는 것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코 큰 사람들만 지나치게 떠받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민족언어를 지키고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국을 찾아오는 조선족 3,4세, 지어는 5세들에 대해 너무 차이를 두지 말고 좀더 따뜻하게 고무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조선족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 더 냉철한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혈연성에 연연하고 자신을 개변하지 않으면 시장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신뢰성을 높이고, 자질을 제고해 다른 민족들과의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박사과정도 함께 끝나게 된다고 했다.

“그 동안 갈등을 많이 겪기는 했지만 고국의 문화를 접하면서 다른 나라에 간 유학생들보다는 편안한 환경에서 동포장학금을 향수하며 공부하게 된 점을 많이 감사하게 생각하고있어요. 이제 박사논문만 통과되면 그이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청도의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됩니다.”

그녀 얼굴에 성공의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고국관을 심어주는 요인들**

유학생들은 고국문화의 충격 앞에서 자연스레 조선족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한국에서의 조선족의 존재,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그들과 만나는 교수와 주변의 구체적인 문화환경은 그들의 고국관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재중동포들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서 고국의 견해를 읽고 그것으로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정리하려고 한다.

한국과의 만남은 1979년 10월 북경의 중국국제방송국의 최원부 선생님이 첫 조선족으로 김포공항에 들어서서 어머니와의 눈물겨운 상봉을 하여서부터 이제는 24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국제화 시대에 조선족은 이제 동족의 차원에서 뿐이 아닌 경쟁대상의 차원에서 한국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인식해야 한다.

해외동포들에 대한 한국의 해외동포법과 현행 정책의 일관성 부족으로 하여 동포들의 감정이 많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한국은 동포들에 대해 보다 장기적이고 정치적인 안목에서 합리한 포용을 하며, 해외 동포 문화자원에 대해 거주국의 실정에 맞게 활성화하고 합리한 정책을 제정하는 것이 고국의 차원뿐이 아닌 한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대들은 조선족의 미래를 안고 갈 세대들이다. 새로운 충격에 갈등을 하다 보면 보다 체계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조선족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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