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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후배 배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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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재미있는 후배 배문석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6>

***1차 강의**

연길에서 만난 적이 있는 후배친구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선생님, 남부터미널에서 다섯시 반에 만나요. 좋은 사람 소개할게요."

나는 2번 지하철을 타고 교대에서 3호선을 갈아타고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6번 출구로 나와 조흥은행 앞에서 전화했다. 후배친구가 애티 나는 예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남자가 연변억양의 서울 말씨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연변태평양여행사 서울지사에 근무하는 배문석입니다."

조흥은행에서 동쪽으로 길을 건너 열 정보쯤 되는 곳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철판구이에 쏘세지 양파튀김에 여러 가지 밑반찬들이 올랐다. 맥주를 마시며 나는 취재의도를 밝혔다. 뜻밖에 배문석씨가 커다란 흥미를 보였다.

"저 정말 할말이 많거든요. 한국에 와서 느낀 점들을 글로 써보았어요."

"아, 그랬습니까?"

내가 만난 부류 중 가장 어린 남자라는 것, 우리 아래 세대라는 것이 기뻤다. 그 세대는 도대체 한국에 체류중인 조선족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후배친구에게 감격의 눈길을 보냈다.

"언제 오셨지요?"

"98년도인데요, 그 때 쓴 글이 지금 느끼는 한국과는 많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 그래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해요. 미국이든지, 일본이든지, 한국이든지, 가봤던 사람들을 마주하면 시간이라는 게 한 나라에 대한 인상을 많이 개변시킨다고 하더라구요."

일본에 간 한 친구가 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첫 삼 년은 거부감이 들고 그 다음 삼 년부터는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하여 흡수된다고 했다. 나의 친구의 아내는 지금 한국에 있은 지 6년째 된다. 이제는 서울에 살고싶어진다고 말하며 그녀는 난감한 기색을 지었었다.

배문석씨는 자기가 아는 대로 한국에 체류하고있는 사람들의 일반상황을 말했다.

"저는 집이 김포부근에 있어 많은 조선족들을 마중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 나온 사람이 가지고 나오는 전화번호는 한자리가 틀린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불법체류자신분 때문에 자기에게 피해가 올까봐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우리 조선족이 왜 이렇게 단결심이 없냐 하는 생각이 들어 참 유감스러웠습니다.

저는 한국에 처음 나온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줬습니다. 아마 30명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처음 몇 달은 자꾸 일자리를 바꿉니다. 습관 되는 과정이 필요하죠. 여자들은 식당, 여관, 가정부에 취직하고, 남자들은 일당을 받으며 용력을 뛰죠. 그중 가정부를 하던 여자들은 나에게 전화 와서 남자주인이 희롱을 한다고 하소연 하더라구요. 4명 정도 되죠."

"용역을 뛴다는 건 무슨 말씀이지요?"

"용역 회사는 일을 회사에서 맡아다가 일꾼에게 주어 일을 시키고, 일당씩 계산해 주는 건데요, 남자들은 보통 장기취직이 안되고, 회사에 들어가면 월급이 적으니까 용역을 뛰는 게 낫죠. 회사월급상황을 보면 연수생은 50-60만, 뽀나스까지 해야 80만원이죠. 불법취업을 하면 80-90만원, 기술이 있는 사람은 150만원도 받아요. 컴퓨터를 모르던 사람이 한국에서 열심히 배워 지금 설계까지 도맡아서 150만원을 받는 사람도 보았어요. 이철병이라고 도문 사람은 강원도의 꽃 농장에 취직했는데, 처음에는 월급이 적었어요. 사람이 차분하고 책임적이고 관리를 잘해 지금은 250만원을 받더라구요. 일하러 온 사람들은 보통 처음 반년은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는 인천 쪽이나 안산 쪽은 중국(조선족)동네나 다름이 없으며 조선족 말이 공용어가 될 지경이라고 했다. 그의 선배들이 그 쪽에 많아서 가보면 어떤 아파트는 출입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중국조선족들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는 변두리에 공장이 많아 인력이 많이 수요됨으로 용역 회사들이 많다고 했다. 가보면 아마 놀랄 것이라고 했다.

"남자들의 취직이 여자들보다 더 힘듭니다. 여자들은 적어도 식당에는 취직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의 일은 계절성이 강합니다. 안산 쪽은 용역 뛰는 사람들이 일당 4만 5천, 적어도 3만 5천은 받습니다. 어떤 회사는 버스로 사람을 실어 가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겨울철에 일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한 친구는 철근을 후리는 일을 하는데 일당 5만 7천 원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잘 만난 편입니다. 한달 쉬는 날을 빼도 120만원은 벌 수 있죠. 어떤 사람들은 한달 90만원도 받기 힘들어합니다. 그것 받아 핸드폰 값, 담배 값, 숙식비를 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아예 일을 안 하는 조선족들도 있습니다. 능력은 없으면서도 큰돈만 생각하는 겁니다. 한국이란 나라는 일한 것만큼 월급을 정해주는 나라입니다."

나는 배문석씨가 나에게 해준 한국체류 조선족 인력시장에 대한 제1차 강의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즉흥취재**

내가 배문석씨를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그의 재빨리 움직이는 머리이다. 이런 사람은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따르릉, 하고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배문석씨는 누군가와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나에게로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랐으나 그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노트를 번졌다.

"몇 년이나 와 있었는데 돈을 벌고 나니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중국 가서 살고싶소.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소. 중국에서 월급을 한 달에 천 원씩만 받았어도 안 나왔을 거요."

"한국에는 돈 때문에 왔습니까?"

"(한국에) 와보고 싶기야 했지. 돈도 벌구 싶었구."

"이렇게 가셨다가 명년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요?"

"다시는 오지 않겠소."

"한국 때문에 돈을 벌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론 감사하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지금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중국 가고싶소."

"한국에 와서 돈을 번 것은 자식을 위해서였습니까?"

"우선은 자기를 위해 왔소.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남들처럼 멋있게는 살지 못하더라도 어지간히는 살아야 하지 않겠소. 월급이 천원만 됐어도 안 나왔을거요. 공장이 불경기여서 월급이 없어지니까, 입을 봉하고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겠소. 이제는 살 만하니까 자식을 잘 해주고 싶소."

"어떻게 잘해주시겠습니까?"

"절로 독립할 때까지 도와 주고 싶소, 부모노릇을 잘하고 싶소. 대학공부 뒷바라지를 해주었으니, 이제는 가정을 꾸리는 비용을 대주고 싶소. 집은 이미 샀소. 연신교 쪽에 신흥가판사처가 있잖소? 그 부근에 있소."

이것이 나를 대신한 배문석씨의 즉흥취재 내용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금방 그와 통화한 사람은 52세 되는 그의 친구의 어머니이다. 두 살 때부터 친한 이 친구는 연변농대를 졸업했는데 외독자 아들이다.

전화를 놓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돈을 벌어 집을 산다, 자식 해준다,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좋기는 한국에 와서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이나 사고방식을 배워 가지고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앞을 내다보고, 월급이 적더라도 중국에서 해볼 만한 비전이 있는 분야에 가서 눈 동냥, 귀 동냥 해서 배워가야 한다구요. 중국에서 우리 조선족은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민족이 아니기에 자유경제, 상품경제시대에 경제적으로 부를 가진 민족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태인처럼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민족을 지키며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진출의 계기**

배씨는 대학전공이 공학원 기계전업이었다. 그러나 배씨는 자신은 문과 쪽을 택했어야 했다고 했다.

중국은 1977년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대학입시제를 폐지하고 정치, 사상, 노동 표현을 표준으로 하는 빈ㆍ하중농(토지개혁시에 정부에서는 농민들을 빈농, 하중농, 중농, 상중농, 부농, 지주로 계급획분을 했는데 그중 빈농, 하중농은 혁명의 동력, 중농, 상중농은 혁명의 단결의 대상, 부농, 지주는 혁명의 적이었음) 추천제를 실시했다.

모택동 사망 후 1977년에 등소평노선이 관철되면서부터 대학 입시제가 회복되었다. 그 때로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기초과학이 숭상 받았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공장장제도가 실시되자, 80년대 중반부터는 공정사가 공장장이 되는 등 실용과학의 지위가 높아졌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반부터는 상품경제유통, 주식매매, 광고, 관광업 등에서 벼락부자가 쏟아져 나오게 되자 경제관리, 컴퓨터, 외국어 등 전업이 인기로 되었다.

배문석씨는 1994년 졸업 전부터 개인회사인 연변태평양여행사에 가이드시험을 쳐 합격해 월급 88원을 받아 온 반의 부러움을 독차지했다. 그 원인은 80년대 후반부터 초반까지 한국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부터 가이드가 돈을 엄청 벌게 된데다가 공업이 부진상태어서 기계전업학생들의 전망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배씨는 졸업실습을 연변 통용 기계공장, 연변이앙기공장, 장춘 제1자동차공장 등에서 했는데 이런 회사들에 국가배치로 입사한 선배들이 너는 제발 우리 이 꼬라지가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일이 어지럽고 힘든데 비해 월급이 낮고, 대우가 나쁘고, 공장 경제력이 나빠 많은 기계공장이 폐업했다. 청화대학이면 중국 일류대학인데 연변통용공장에 배치 받은 사람은 일이 없어 빈둥댈 수밖에 없었다. 배씨가 선택한 전업의 비극이었다. 그 때 청화대학 졸업생 공정사의 월급이 겨우 500원, 300원, 달걀장수나 이발사보다도 수입이 낮았다.

배문석씨가 졸업할 때에는 한국 대우, 현대, 삼성 등 중국주재 분사에서 졸업생들을 초빙해갔다. 졸업생들 중 영길, 서란, 장춘 등지 한족학생들이 빠질 곳이 없어 자기 전업을 가진 외, 조선족들은 전업을 포기하고 청도 등지 한국기업을 찾아가 취직하기도 했다. 조선족 동창생은 겨우 3명이 연길에 남았는데, 배문석씨 외 한 사람은 텔레비죤방송국 기자로, 한 사람은 연변해외무역회사 직원으로 취직했으니 모두 본업은 버린 셈이었다. 왕청에 있는 최철우가 동원아이스(한국아이스크림회사) 기계를 보고 있다니 배문석씨 반의 조선족 중에는 그만이 본 전업을 가지고있는 셈이다.

회사에서는 배문석씨를 실무부문에 배치했는데 가이드보다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지만 비전을 고려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배씨는 자기는 여행사체질이며 여행업이 자기 성격과 맞다고 했다. 일에 책임감이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에 완성했다. 북경 주재원으로 있기도 했다. 배씨는 회사의 인정을 받았다. 곧 한국지사장으로 파견했다. 지금 배씨는 방배동에 회사를 두고 여행사 실무를 처리하고 있다. 아내는 어느 음식점에서 월급 100만원을 받으며 돈을 벌고있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라고 물었더니 시물시물 웃으며 "돈은 많이 못 벌었지만, 한국은 많이 알았어요. 한국은 배울 게 많은 나랍니다." 라고 대답했다.

배씨는 중국조선족 기업인들의 한국회사 설치를 위해 많이 뛰었다고 했다. 조선족들은 한국인에게 회사설립을 의뢰하면 사기에 걸릴까봐 배씨를 믿고 의뢰하였다. 회사 네 개를 차려주었는데, 그중 두 개는 운영이 잘 되고, 다른 한 회사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불법체류를 했고, 다른 한 회사는 초청이 안 되어 그만두었다. 배씨는 브로커로 의심되어 출입국관리소에 불려가 검은 도장에 찍힌 적도 있다고 했다.

배문석씨와 같은 조선족은 회사에 의해 한국에 파견돼 왔기 때문에 불법체류 딱지가 붙지 않고도 좀더 능동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족 불법체류자들보다 표정이 밝았고 당당했다. 적어도 검문을 당할 염려가 없었다. 그만큼 한국이란 사회를 좀 더 침착한 눈길로 볼수 있는 입장이었다. 젊음이 있었기에 한국체류 조선족사회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지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부분의 이야기는 내용 분류상 다음 장 절에 나누어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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