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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입국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3> 서울보모와 아기 (상)

1999년 11월에 이정자가 한국으로 떠나는 날, 시집 편과 본가 편의 형제들이 연길 역으로 배웅을 나왔다.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고혈압이 심한 그녀였기 때문이다. 피곤하기만 하면 눈이 빨갛게 '토끼눈'이 되군 해 번마다 '웅담 환'으로 눌러 놓곤 했었다.

정자는 연길 모 직장 노동자로 근무하다가 45세에 조기퇴직을 했다. 한 공장에서 같이 조기퇴직을 한 친구 일곱이 한국에서 가정부를 하고 있었는데 종종 전화가 와서 정자더러 한국에 일하러 나오라고 했다. 사실 정자도 자나깨나 근심스러운 일이 있었다. 집에는 심장병 때문에 두 번이나 입원하고 국영직장 영도자 직을 그만두고 병퇴한 남편과,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병 때문에 고중 진학을 포기한 19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남편의 병퇴 월급은 원 월급의 5분의 1로 줄어 2백원밖에 안된다. 그 혼자의 식사비도 안 되는 돈이다.

정자는 퇴직을 하게 되자 러시아에 가죽옷장사를 떠난 적이 있다. 수속비용도 채 벌지 못했는데 갑자기 아들이 앓는다는 소식이 와서 급급히 돌아오고 말았다. 연길의 어느 개인식당에 가서 밥과 김치를 하는 일을 꼬박 열 달을 했다. 월당 5백원이었는데 남편의 병 치료에는 턱도 없는 돈이었다.

80년대 전까지만 해도 국가직장의 종업원은 무료치료혜택을 받았었는데 계획경제가 상품경제로 넘어가면서부터 무료치료제가 폐지되고 본인이 30%를 부담하는 공비치료제를 실시했다. 공비치료는 비싼 약은 엄격히 통제했고 병을 치료하려면 자기 돈으로 약을 사서 써야 했다.

남편과는 집체호때 시가 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사이였으므로 옥신각신하는 때는 있어도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남편의 병을 치료하고 병약한 아들에게 작은 가게라도 차려주는 것이 그의 꿈이였다. 정자는 돈 6만원(당시 한화가격 9백만원정도)이 든 비밀번호저금통장을 브로커에게 넘겨주고 한국행 가짜공무수속을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서울 독립문부근의 한 아파트에서 가정부를 하고 있는 그녀 친구와 함께 그 아파트에서 들었다. 저녁 일곱시에는 대전에 계시는 오금손 어머니를 뵙기로 하였기에 총망한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신 부모님에 의해 중국 자금성에서 태어나 국민당 장교의 집에서 15세까지 자랐다. 부모님은 일제의 칼에 살해되었고 어머니는 광복후 광복군에 의해 귀국하셨다. 6.25때에 참전해 국방군 대령까지를 지내신 분인데 전쟁에 몸을 상하시고 자식이 없이 홀로 사신다. 나와 친구 몇몇을 자식처럼 생각하시고 해마다 중국에 놀러 오셨고 우리 친구들은 한국에 갈 때마다 어머니를 찾아뵙곤 한다.

기차시간이 정해져 있는지라 마음이 급했지만 이야기들이 잘 흘러나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취재를 끝냈다.

면담 관을 넘기 힘들다고 브로커 측에서는 공무출국답게 작은 가방 하나만 가지고 세관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가방이 클수록 물어보는 사항이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다 보면 의심할 기회도 더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큰 짐 때문에 걸려든 사람은 일체 책임을 본인이 지라고 했다. 스프링코트에 검은색의 작은 가방을 어깨에 달랑 멘 정자는 오히려 출근을 하는 사람 같았고 멀리 국외출장중인 사람 같지가 않았다. 동서가 말했다.

"명색이 공무출장인데 너무 작은 가방을 들었구만. 여자라면 화장품, 속옷과 갈아입을 옷은 챙기는 게 상식인데... 해관에서 오히려 더 의심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생각하니 너무 작은 가방을 가지고 떠난 것도 문제일 듯 싶어 정자는 후회했다.

"저금통장을 넘겨주었는데 괜찮을까?"

정자는 공무수속이 가짜일 경우에 6만 원짜리 저금통장을 사기 당할까봐 근심했다.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며 이빨 틈에서 빼어 저금한 돈 만원과 꾼 돈 5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이었다. 한국수속 때문에 사기 당한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정자의 마음은 허공 중에 있었다.

"글쎄 아무리 비밀번호를 넣었다고 해도 그 돈이 안전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돈만 주면 귀신도 석마를 찧는다는데, 흑심인 브로커가 마음만 먹으면야..."

누군가 이렇게 말해 정자는 한층 기색이 어두워졌다.

이제도 앞에 건너기 힘든 몇 고비가 있다고 생각하니 차안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연길로부터 9시간 기차를 타고 심양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6시 반경이였다. 정자 혼자뿐이 아니고 그 외 남녀 5명이 있었는데 전부 연길 사람들이였다. 주숙지는 심양군구 초대소, 정자는 505호실에 들었다.

수인사를 하고 나자, 문이 열리며 낯설은 여자가 들어섰다. 키가 크고 눈이 둥그렇고 머리가 큰 50대의 조선족 여자였다.

"모두 어째 이렇게 스산하게 생겼는가?"

사람들을 둘러보고 하는 첫마디가 그러했으므로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고 불쾌했다.

"농촌에서 왔지?"

그녀가 정자를 보고 물었다.

"아니, 연길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밉게 생겼소? 시골사람들은 세관에서 귀신같이 도장 찍혀 되돌아온다니까."

정자는 난생 처음 이런 창피를 당하고 나니 화가 나서 단번에 혈압이 쭉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남자들도 있었으므로 여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 행동 거지를 보아 보통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꾹 참았다. 6만원이 왔다 갔다 하는 행차인데, 세관을 건너고 볼 판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로 말하면 외모에 신경 쓸 만도 하다고 했다. 명색이 공무출장이고 보면 시골모양의 사람들은 세관에서 걸리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세관에서 걸리면 곁 사람도 액을 같이 당하게 된다. 그녀는 브로커 중의 일원이였다. 가짜공무 출장인원의 주숙, 교육, 도한 등 심양에서의 전반 과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한국 간다고 다 돈을 버는 줄로 알면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 가서도 돈도 못 벌고 찔찔 울며 다니더라구요."

그녀는 한참동안 촌뜨기를 상대한 기분으로 지껄였다. 이것도 교육의 내용이었는지 모른다.

정자네 일행에는 꽤 괜찮은 대우를 받던 공무원도 있었으므로 사람을 자기 먹이로만 간주하는 그녀에게 격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꾼 돈 6만원이 왔다 갔다 하는 행차였고, 새로운 "드림"의 행선지 서울로 가는 것이 운명 전환의 또 다른 계기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굴욕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도한객들은 그녀를 '강사'라고 불렀다. 물론 이 호칭에는 빈정대는 뉘앙스가 들어있었다.

'강사'는 드디여 본직에로 돌아와 <<강의>>를 시작했다.

"여러 분은 경운전자로 가고있습니다. 세관에서 어디 초청이냐, 라고 물으면 경운전자라고 해야 합니다. 경운전자가 뭘 하는 곳이냐고 물으면, 리모콘, 스위치를 만드는 회사라고 할 것이며, 경운전자의 주소가 어니냐고 물으면, 서울 ×××구 ××동 505호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세관을 통관할 때 주의점과 서울에 들어서서 불법체류가 된 다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강의가 끝나자 누군가 비자를 받으면 달러를 어떻게 바꿔야 하느냐고 물었다. 출국하는 사람은 여권을 가지고 은행에 가서 국가시세대로 달러 2천불을 살 수 있다. 이것을 암시장가격에 팔면 인민페 8백여원이 떨어지는데 출국하는 사람들은 이 호떡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브로커에게 돈 6만원을 주고도 십여시간씩 기차를 타고 비싼 호텔에 드는 등 적잖게 돈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사'는 안 된다고 했다. 세관을 통과할 때 여권에 달러를 샀다는 도장 하나라도 더 박혀있으면 그만큼 절차가 늘어나기 마련이고, 그러면 가짜공무수속이 드러날 기회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 아니냐, 라고 했다. 한국에 가서 벌면 10만원이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한치보기를 했다가 6만원을 망치면 어떡할거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람들은 할말이 없었다.

'강의'가 끝나자 그녀는 한국 브로커한테 전화를 했다. 그러더니 오늘은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강의내용이 불안했다. 어느 날 떠나느냐고 물었더니 상황을 보아야 한다는 애매한 대답이어서 더욱 불안했다. 며칠 동안 심양 군분구 초대소에 눌러있었다. 그동안 그들보다 먼저 심양 세관으로 해서 떠났던 패들이 한국세관에서 걸려 되돌아왔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왔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초조하여 그야말로 일각여삼추였다. 참을 수가 없어 공무원을 했다는 사람이 큰 소리로 따졌다.

"왜 우리는 정상적인 수속도경을 거치지 않았습니까?"

그는 밀입국일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저쪽(한국) 대장(서류)에 공무출국서류가 없습니다. 한국사람들을 든든히 끼어야 하는 일인데, 그렇게 식은 죽 먹기라면 왜 돈을 그렇게 많이 받겠습니까? 천진하시네!"

강사가 어이없다는 기색을 지었다.

드디어 출발일자가 잡혔고 심양 세관을 통해 나간다던 노선을 바꾸어 대련으로부터 나간다고 했다. '강사'는 그들을 모여놓고 강의를 했다.

"분명히 말합니다, 잘 기억하세요. 내가 지금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본인이 결과를 책임져야 합니다."

모두들 긴장한 분위기가 되었다.

"벽으로부터가 아니라, 창문이 있는 유리창이 있는 곳으로부터, 네 번째 출구를 통해서 나가야 합니다. 기억하세요, 네 번째 출구라는 것, 벽으로부터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는 사람마다 인민페 2천원을 갖추라고 했다.

절대 내가 이번 수속을 알선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중국 측에 걸렸을 경우에는 친구가 해줬다고 하고, 한국 측에 걸렸을 경우에는 동생이 해줬다고 해야 합니다. 내 이름을 대지 말아야 빠꾸(퇴짜)맞아도 책임지고 다시 건너가게 해줄 수 있습니다. 돈 2천원을 가지고있으면 빠꾸 맞을 경우 벌금을 하고 풀려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이 군분구 초대소로 와서 나를 찾으십시오. 꼭 책임지고 해주겠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른다. '빠꾸' 따위의 불길한 생각은 하기도 싫었다. 사람들은 제발 무사히 세관을 건널 수 있기를 속으로 열심히 빌 뿐이었다.

대련에 도착하자 그녀는 아무래도 속이 켕기는지 갑자기 살갑게 굴었다.

"그렇게 스프링코트를 입으니 밉지 않고 곱구나. 왜 그 때(자기가 정자를 시골여자라고 빈정거렸을 때를 말함.) 가만이 있었습니까?"

"우선 건너가고 볼 일이라고 참았습니다."

정자의 대답 또한 순진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서운 마음이 들어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모를 견딜 준비를 단단히 하고 떠난 그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부터 그 수모가 시작될 줄은 그녀도 상상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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