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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2> 오용 이야기 (4)

***아라비안 나이트**

3차 도한때 오용은 명화를 가지고 떠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3백50년전 명말청초 고화인데, 중국돈 20만원(지금 한화 2천6천50만원 가량)을 주고 두 장을 샀다고 한다. 오용의 말에 의하면 한국가격으로는 3억 3천만원이고, 일본가격은 3천만엔이라고 했다. 당시 6대 화가중의 한사람이 그린 그림인데, 유화가 아니고 돌가루로 만든것이라고 했다.

그림 주인은 장개석의 수하였던 할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물려받은 한족 남자였는데, 그림은 중국에서도 검증을 거친 확실한 것이라고 했다. 목포에 있는 한 한국인이 사겠다고 해서 구경시켰고, 팔아 주겠다 해서 잘 아는 사이라 아무 경계심이 없이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 한국인은 그림을 가지고 잠적해버렸다. 오용은 속이 후끈 달아 노태우대통령, 법무부장관, 대법장 등에게 편지를 썼다. 나중에 법무부와 대법원에서 답장이 왔다. 법무부 야근실에서 15일간 먹고 자며 소식을 기다렸다.

“꼭 찾아줄테니, 돌아가 기다리시오.”라고 법무부 직원이 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오용은 심어놓은 나무처럼 법무부에 뻗치고 있었다.

“그림을 찾아야 돌아가겠습니다.”

오용은 그렇게 대답했고 그렇게 속다짐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오용이지만, 20만원 거액의 그림을 잃고는 속상해 침식을 잃었다. 끝내 폐결핵에 걸려 벌겋게 열을 내며 앓아 드러누웠다.

그림은 끝내 광주 출입국관리소 소장의 노력으로 찾아냈다. 집으로 돌아간 후 오용은 목단강시립병원, 결핵병원을 전전하며 90일간 주사를 맞고 1년간 치료를 받았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아라비안나이트 같아 내 눈으로 직접 그 고화라는 그림을 보자고 했다.

“전문가가 아니고는 봐도 몰라.”

“제가 봐서 좋은 운이 생길지도 모르죠. 저 인적 관계가 되게 넓어요.”

“그래, 니가 한번 팔아봐. 천만원 준다.”

그 천만원은 물론 나 같은 글벌레들이 벌수 있는 돈이 아니다. 아마 지금까지도 오용은 그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웅담즙으로 형님을 구하다**

오용이 중국에서 폐결핵 치료를 하고 있을 때다. 어느날 한국으로부터 오는 전화를 받았는데, 송수화기 속으로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속이 철렁했다. 당시 한국에는 큰 누님, 작은 누님, 여동생 둘, 큰 형수, 둘째 형님이 있었다.

“둘째오빠가...”

여동생이 울면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일산현장에서 일하던 둘째형이 장암에 걸린 것이다. 자꾸 배가 아파하고 사람이 말라들기에 중앙대병원에 갔더니 당장 입원하라고 했고, 화험 등 일련의 검사를 거친후 보호자가 오라고 했다. 큰 누님과 작은 누님이 가니 급성장암이라고 했다. 3일간 입원한 동안에 돈은 물처럼 들어 벌써 2백만원이 들었다.

“나더러 중국서 어쩌라는거야!”

오용은 급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머리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제2차 도한때에 오용은 중국 길림에서 서울에 나온 도대실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도대실이는 친 누님이 서울 불광동에 있어 친척방문을 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1988년에 한국에서 적십자를 통해 하이야 두대를 중국에 가져가 벼락부자로 된 사람이다. 그때는 중국이 금방 국문이 열렸기에 국외상황에 대해 일반 공무원들은 아직 잘 모르고 있었고, 질서가 잡히지 않았기에 국외에서 차가 들어와도 세금을 받지 않았다.

도씨는 장사에 능한 사람이었다. 도씨가 사간 차는 한국 제1대 포니였는데, 한국에서는 가장 싸구려었다. 조선족이고, 중국으로 들어가는 첫 차였으므로, 세관에서는 운송비를 40%만 받았다. 인천으로부터 연태로 들어갔는데 일이 순조로워 한 대는 길림방산국 국장이 13만원(당시 한화 1천3백만원)에 사갔고, 한 대는 80평방메터짜리 아파트와 바꾸었다. 당시 공무원의 한달 월급은 2백80원정도, 차 두 대가 도씨를 단번에 남들이 흠모하는 부자로 둔갑시켰다.

그 사람은 두번째로 한국에 들어와 오용이를 만났다. 오용이가 기사로 있은 적이 있어 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합작해서 승용차를 사기로 합의했다. 둘은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로 호흡이 맞아 즉시 계획을 세우고 밤새도록 좋은 꿈을 꾸고 돈을 준비했다. 한편으로는 도씨의 소개로 승용차 매입의 인적 관계를 찾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적십자의 모 박사었다. 명함장도 받아두었다. 그러나 오용이로 말하면 김치국부터 퍼먹은 셈, 한발 늦은것이다. 중국사정을 알아보니 이미 수입차 세금이 3배로 뛰어올라 승용차장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박사와의 만남이 5년이란 세월이 지난 90년도의 일이었으니, 이때는 70세가 훨씬 넘었을 것이었다. 자기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어서 썩 파악은 없었지만, 형님을 살리고 싶은 심정에 쫓기다 보니 이 한줄기 희망이나마 단단히 잡고 싶었다. 누님에게 그 박사의 주소를 가르쳐주며, 체면불구하고 통사정해보라고 단단히 당부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그 착한 박사가 오용의 형님을 구해주었다. 그 분의 소개로 한국 적십자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로 했다. 양력설 바로 이틀전에 성공적으로 수술을 했다. 역시 오용의 둘째형은 생명 두개를 가지고 태어난 운이었다. 병원으로부터 소염제 한달치를 받고 보름 후에 퇴원했다. 용산역 맞은편에 방을 잡았다.

한편 오용은 형을 잃는것 같아 중국돈 수만원을 들여 한국수속을 했다. 사실상 오용의 둘째형은 비록 수술은 성공했지만, 염증제거를 잘하지 않고 감염이라도 생기면 역시 생명이 위험했다. 오용은 염증제거에 웅담즙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듣고, 매일 새벽이면 친구의 승용차를 빌려 타고 거리가 꽤 먼 목단강 동촌곰 사양장으로 갔다.

직원이 곰에게 잠군 자물쇠를 열고, 곰열을 받아내는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 배갈병 한 병에 그때 시세로 4백원이였는데, 보름동안 다니며 여섯 근을 받아냈다. 한국세관에 빼앗길까봐 비닐봉투에 여러 겹으로 싸서 참깨기름 비닐봉지 속에 밀어 넣었다. 기름을 가득 처바른 비닐봉지는 쉽게 통관되었다. 세집에서 형에게 웅담즙을 떠 넣어주며 20일간 간호했다. 형이 술을 좋아했으므로 술 절반에 타서 먹게 했다. 때마다 한 컵씩 보름을 먹으니 반뽐이 되는 수술자리의 색깔이 벌건 색으로부터 하얀 색으로 변했다.

20일이 되어 수술자리가 괜찮게 아물자 형더러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 형수의 서류는 오용이 다 해줘서 이미 한국비자수속이 다 되어있었다. 오용은 형수에게 형이 이제 중국으로 들어갈 것이니, 형이 들어간 다음에 한국에 나오라고 전화했다. 그런데 부부사이가 어떻게 약속이 되었는지 형이 중국에 나가기도 전에 형수가 들어왔다.

오용이 부산에 가서 한달 있다고 돌아오니 집은 텅비었고, 형네 부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겨우 살려놓았는데 어디로 갔을까, 걱정이 되어 누이들과 큰 형수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 모른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 부부는 일자리를 찾아 일을 하고 있었다. 형수는 일산현장에서 함바를 하고, 형은 어느 회사 야직을 서고있었다.

“얼마나 희한한지.”

오용은 희죽 웃으며 이런 말로 이야기를 끝냈다.

***수쇠운**

도적질 한번 한 이 없는 자기에게 일생에 수쇠운이 있은 이야말로 진짜“희한한 일”이었다고 했다. 제4차 도한은 잊을수 없는 경험이었다.

1994년 1월에 오용은 비법체류자로 검문당해 잡혀갔다. 청량리 휘경동 철창 속에 20일간 구속되었다.

“쇠살창이고 진짜 감옥이데!”

오용은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조선족 3백명이 갇혔다. 오상에서 온 청년이 담배를 피워 경찰에게 맞았다. 경찰은 그 사람을 독방에 가두었다. 이 일때문에 조선족들이 집이 떠나갈 듯 노래를 부르며 단식을 했다. 2일만에 오상 청년이 독방으로부터 집체감방으로 돌아왔다.

3백명은 패를 나누어 강제귀국을 당했는데, 돌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산다던 오용이도 이번에는 옹중지별(瓮中之鱉, 독안의 자라라는 뜻임)이 되어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수쇠(수갑) 하나를 차고 휘경에서 인천까지 압송되어 배에 올랐다.

이어 그는 자기 제자가 잡혀온 이야기를 했다. 내가 7월에 오용이를 만났을 때, 제자가 검문 당해 갇힌 지 한달이 됐다고 말했다. 오용이 기사를 할 때에 차 운전을 배워준 제자인데 흑룡강 녕안 사람이다. 1999년도에 스승의 주소를 적어 가지고 한국에 나와서 오용이를 찾았다. 그는 1995년도에 한국에 들어와서 돈을 벌었었다. 북경놀이터를 하는 한국인 사장을 만나 초청을 부탁하며 2인분 13만원을 주었는데, 한강에 돌 던진 격이 되었다. 악이 받혀 또 6만원을 내고 한국수속을 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돈을 받지 못하고 눌러앉아 비법체류자로 되었다.

녕안 제자는 혼자였으므로 한국에서 조선족 과부를 만나 자기들끼리 결혼식을 올렸다. 둘이 번 돈을 식당을 하는 처의 한국인 형부에게 빌려주었다. 식당이 밑지게 되자 형부는 벌어서 준다고 했다. 돈을 받을 가망이 없을것 같아 녕안 제자 아내가 울면서 돈을 달라고 했다. 술좌석에서 옥신각신하게 되자 한국인 형부가 화를 내며 처제를 신고해서 부부가 다 잡혔다.

역시 오용이는 마음이 착해서 제자의 일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했다. 그는 제자의 전화를 받자 바로 그 한국인형부에게로 찾아갔다. 제자가 차용증을 받으면 귀국하겠다고 하는데, 당신 차용증이라고 쓰는 게 좋지 않냐, 라고 구슬려서 차용증을 받아냈다. 근거가 있게 되자 수용소에서는 강제귀국을 시키지 않고 기다리게 했다. 그들 부부는 지금도 수용소에 있다고 했다.

“잘 받아 적으라구, 이런 말은 꼭 써넣어야 돼! 그래, 오용이 이렇게 말하더라고 쓰라고! 이 말은 언제든 꼭 하고 싶었다, 알았제?”

오용은 나에게 다짐을 따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술을 추기고는, 내가 받아쓸수 있도록 뜸을 들이며, 그러나 비분강개해서 말했다.

“중국에 50년 거의 살았어도 죄 한번 안 짓고 살았는데, 고향땅에 와서 불법체류 한가지가 죄 되어 평생 처음 수쇠란 걸 다 차보고, 고향친척 등지고 갈 때에 한이 맺힌다. 형제들 이종, 고종 다 여기 사는데, 중국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수쇠를 차다니, 낙후한 중국 살은 죄로...눈물이 아닌 바로 피눈물이라는 것, 이걸 써야 돼!...”

오용은 하던 말을 곱씹으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가 그대로 적는지를 탁자 너머로 확인했다.

6차 도한기간 오용의 형제가족들중 둘째형, 조카들 등 7명이 검문 당해 수쇠를 차고 강제송환을 당했다.

“옆집 사람과 옳고 그름도 따지지 못하고, 숨도 못 쉬고 사는 꼬라지야. 눈썹 밑에서 불이 떨어질까봐 신경 써야 돼. 조선족정책 변하는 해뜰 날 기다려야제!”

오용이와의 인연은 서울에 있는 동안 쭉 전화로 이어졌다. 가끔은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나오라고 하기도 했으나, 용산역다방에서의 취재 후로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오용의 인간다운 너그러움과 생활에 대한 낙천적인 태도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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