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타고난 장사꾼, 타고난 의협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타고난 장사꾼, 타고난 의협심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1> 오용 이야기 (3)

7월 6일, 오용과의 약속대로 용산역으로 출발했다. 2호선을 타고 왕십리에서 국철을 바꿔 타고 용산역에서 내리니 오후 세시었다. 용산역광장에 나타난 오용이 자기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나는 어이없어 한바탕 웃었다.

“여자가 초면강산에 남자 집으로 가는 것은 실례지요.” 라고 얼렁뚱땅 넘기려고 했지만 기어코 자기 애인을 하라고 하면서 집으로 끌었다.

“아이구, 커피값이 아까워 그러세요?”

“커피값도 물론 아깝고, 다방은 조용한 곳이 없어 이야기가 잘 안될기다.”

그러다가 결국 내가 주장한 대로 다방으로 갔다. 역시 쉽게 포기하는 너그러운 오용이었다. 용산역 다방이었는데 오용이가 레몬쥬스를 샀다.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이야기를 했다.

***타고난 장사꾼, 타고난 의협심**

1차도한후 집으로 돌아갈 때었다. 뱃속에 만5천 달러를 감춰넣고 홍콩을 경유해 돌아가는 배를 타기로 했다. 그때 한국의 백 달러는 1불짜리가 680원, 50불짜리는 640원, 20불짜리는 620원이었다. 오용은 머리가 빨리 돌았다. 홍콩은 1 달러나 백 달러나 다 한값이었다.

“그때는 비법체류라는 걸 몰랐기에 함께 한국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석달이 되는 날 다 한배에 탔어. 그 사람들 다 홍콩에서 면세물건 살 거라는 걸 알았거든.”

타고난 장사꾼 오용이는 만 5천 달러를 전부 20불짜리로 바꾸어 한 트렁크 가지고 떠났다. 배에서 석달 전에 함께 떠났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잘 인사했다. 홍콩에 갔을 때에는 퍽 친숙한 사이로 되었다. 배에는 남자 여덟명이 탔는데, 아니나 다를까 홍콩에 가자 면세점에서 그중 다섯이 일본제 오토바이를 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또 사진기 열대를 샀다. 오토바이는 한대에 1,200불이고 사진기도 꽤 비쌌는데, 오용은 그들에게서 100 달러짜리를 받고 20불짜리를 주었다. 그렇게 15,000불이 1불에 중국돈 60전씩 새끼를 쳐 중국돈 9천원(당시 한화 90만원)을 벌었다.

“우리는 친척들이 좋아서 백딸라짜리를 바꿔줘 받았는데, 당신은 바보처럼 20불짜리밖에는 못 바꿨네.”

그들은 오용이 자기들에게서 깨고소하게 한 밑천 잡은 줄은 모르고 오용이를 놀려댔다.

“그래, 난 친척 못살아 그렇다. 너희들 좋겠어.”

오용은 그렇게 응수했지만 속으로는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나중에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오용도 더는 참지 못하고 돈이 새끼를 친 비밀을 말했다.

“이 문둥이들아, 머리를 써, 머리를!”

모두들 입을 딱 벌렸다.

일행중에는 설옥매라는 길림여자가 있었다. 전라도에 가서 약을 팔아 7천 달러를 벌었으므로 여자는 집을 사는 등 꿈이 많았다. 홍콩까지는 무사했는데 광주에 이르러 일이 생겼다. 기분이 좋아 일행이 함께 식당에 가서 작별식사를 했는데, 금방까지 곁에 있던 여자의 가방이 없어졌다. 여자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당시 오용이네는 이미 광주-할빈행 비행기표를 뗐었다. 설옥매는 길림이였으므로 그들과는 길이 달랐다. 황차 비행기표도 다 잃어버렸고 몸에는 일전한푼 없었다. 설옥매는 이제는 다른 길이 없다고, 죽겠다고 했다. 그때 여자들은 이미 떠나갔다. 오용은 언제 죽어버릴지도 모를 설옥매를 두고 떠날수 없었다. 남자들 다섯명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그들은 비행기표를 되물렸다. 표값의 10%를 깎여 손해를 보았지만 한 여자의 목숨이 더 중했다. 그들은 설옥매에게 표를 떼줘서 다 같이 길림행 기차를 탔다. 오용은 여자를 아기처럼 구슬렸다.

“너 친척 그래 좋다는데, 돈 벌러 금방 또 가면 되잖아. 다음에는 일본으로 해서 가면 된다구. 우리 또 같이 가서 벌자, 알았제?”

여자가 다시 의욕을 가지자 그들은 장춘에서 갈라졌다.

그후 오용이네는 서울에서 또 그녀를 만났다.“오빠-”라고 부르며 반가와했다. 오용의 제3차 도한기간에 그녀는 오용이네 부부를 따라 1995년까지 3년을 벌어 집 살 돈을 마련해가지고 돌아갔다. 중국에 있을 때에는 오용 아내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해오기도 했다.

***일본 벙어리여행기**

2차 도한은 일본을 경유지로 해서 성공했다고 앞에 말한 바 있다. 오용은 형제식구 5명과 함께 여권을 가지고 홍콩에 가서 한국비자를 맡고 북경에 가서 일본비자를 맡았다. 당시 상해로부터 일본행 비행기는 한달에 두번밖에 뜨지 않았다. 배표를 사는게 중요했다. 비행기표가 비싸기 때문에 다른 식구들은 기차를 타고 나중에 오기로 하고 오용은 비행기를 타고 먼저 상해로 향했다. 도한을 위해 그들은 홍콩에서 4일, 북경에서 3일, 상해에서 1일, 길에서 수일, 이렇게 목단강으로부터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길에서 15일간을 보냈다.

“봉이 김선달 난다더니, 내가 그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

오의 말이다.

일본말은“바가야로”밖에 모르는 그들이었다. 이 한마디도 일제의 중국침략을 반영하는 영화에서 배웠다. 그날 배에는 오용이네까지 조선족 19명이 탔는데, 누구나 그 한마디밖에는 몰랐다. 착한 한국목사를 만나 여인숙에 들기까지는 순조로웠다. 부산행 배에 오르기까지 일주일을 있었는데, 그동안 지니고 갔던 달러가 떨어졌다.

배표를 사야 하는데 지하철을 어떻게 갈아 타야 하는지 몰랐다. 여인숙의 일본인이 약도를 그려주었다. 갈아탄다는 뜻의“나까노리”라는 말 한마디를 새로 배우고 바로 배표를 사러 떠났다.

“손짓발짓을 다 했어. 말을 그렇게 두 마디만 알고도 그 19명 조선족의 대표로 배표를 떼러 가는거야. 오사까 항구에서 한국 간다고 중국글로 <上韓國, 買船票>라고 썼더니 여행사 안내책을 주더라구. 그걸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아라비아숫자 전화번호를 알아보고 전화를 했는데, 일본말을 어찌 알아듣나, 〈여보세요〉를 50번도 더 소리치는데, 여행사측에서는 그래도 전화를 놓지 않고 자꾸 사람을 바꾸더라구, 그러던중 <여보세요>로 대답하는 사람이 있길래, 제발 전화를 끊지 말아달라고 막 빌었어. 한국 가는 중국조선족인데, 오사까항구까지 와달라고 부탁했지. 오후 세시까지 기다릴수 있냐, 물어. 오후가 아니라 밤까지도 기다릴수 있다고 말했어. 그때는 아침이였거든. 그 사람이 정말 오후 세시에 도착하더라. 정말 고맙습니다, 라고 했지. 막 엎드려 큰절이라도 하고 싶었어. 일본에 사는 한국인인데, 점심도 못 먹었겠다고 하면서 빵과 커피를 사주는거라.”

그 재일한국인은“아저씨, 19명인데, 6명 더 합하면 단체표를 살 수 있어요. 단체표는 훨씬 더 싸니까, 한번 그렇게 해보세요.”라고 했다. 그래서 항구에 나가 수소문해 한국인 10명을 데려왔다. 8천엔짜리 배표를 6천엔에 샀다.

“일본은 정말 서비스가 좋은 나라야. 벙어리라 해도 살 수 있는 곳이야.”

오용은 일본을 옷자락 스치듯 지나치고도 어느새 친일파가 돼있다.

일본으로 떠날 때 천달러를 가지고 떠났는데 ,배표를 사고 나니 돈이 떨어져 배에서는 입을 딱 다물고 배를 곯아야 했다. 착한 한국인들이 돈 3백 달러를 꾸어주었다. 역시 오용이는 대박 터지는 운을 타고났다. 배안에서 한국인들을 만나 중국에서 68원에 산 우황청심환 백 곽을 일본돈 만엔씩 받고 팔았다. 그래도 싸다고 많은 사람들이 샀다. 한 곽에서 이윤이 엄청나게 났다. 꾼 돈을 물고도 한국돈으로 7백만원을 벌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