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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뜰 날 기다려야지- 6차 도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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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뜰 날 기다려야지- 6차 도한기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0> 오용 이야기 (2)

***연재재개와 관련하여**

<코레안드림> 연재를 일방적으로 취소한 후 프레시안 독자들의 의견을 읽었습니다. <<조선족문제>>에 대한 애정어리고 진지한 토론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감사드립니다.

민족갈등 역효과를 고려해 연재재개에 고민이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는 독자들의 애정과 성원에서 용기를 가집니다. 한국체류 조선족의 진실에 대한 취재보고서를 펼쳐드림으로써 독자들과 함께 범민족적인 차원에서 사색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갈등해소의 대안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연재재개의 명분을 찾아보고저 합니다. 이 한 편의 글로 모국인과 조선족 사이의 갈등에 대한 해소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진지한 토론은 이해를 기하는 길일 수가 있다는 독자들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코레안드림> 취재에서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측면의 의견들을 주의하여 읽고 조선족을위해 만들었던 글의 한계점을 한국독자들의 의견에서 더 많이 알게 되어 큰 수확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한국인독자로의 다원적인 시각의 여러 가지 측면의 논리에 설명을 충분히 제공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코레안드림>의 한계라는 것을 인정하고저 합니다.

조선족이라는 군체는 미국, 일본, 구쏘련체제의 해외 어느 나라 동포들보다 복잡한 문화환경,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어 모국과의 관계에서 복잡한 갈등과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국은 해외 어느 나라 동포문제보다 중국관계등과 관련해 조선족문제에서 태도가 애매하고 혼란할 수밖에 없고 조선족도 모국에 대해 그 표현에 있어 애매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도 그런 애매성과 한계가 표현되고 있음을 시인합니다. 중국에서의 조선족의복잡한 문화환경 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이해가 가능한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드린 글 <두만강의 충청도아리랑>의 <작가의 말>에서 민족에 대한 조선족의 애정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코레안드림>은 한국체류 조선족 문제에 대한 글이면서도 또한 체제가 완전히 다른 문화환경에서의 인간의 생존차원의 양상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족점이 많은 글이지만 독자들께서 한국인이나 조선족의 단일한 시각의 한계를 극복하고 애정을 가지고 이 글을 읽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토론에서 이 책에 대한 보완작업의 도움을 받고저 합니다.

<코레안드림>에 대한 일방적인 연재취소로 <프레시안>과 독자 여려분들께 번거로움을 끼쳐드렸던 점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독자들의 진지한 의견에 허심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2003년 3월 3일
리혜선드림.

***넘어져도 떡함지에 넘어지는 오용**

그는 성이 오씨라고도 했고 리씨라고도 했다. 한국을 여섯 번 드나들었고, 비법체류역사 때문에 여러 번 이름을 고치다보니, 지금 불리는 이름이 어느 것인지도 한참은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눈치를 보니 오용이라고 하는 이름도 진짜는 아닌 것 같다. 번마다 전화를 걸어 오선생이십니까, 라고 하면 한참은 어물거리는 과정이 있다.

취재를 하다보면 한국에 온 조선족들 중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몇 가지 경우가 있다. 비법체류를 한 적이 있어 신분증을 고친 경우, 타인의 여권을 사서 입국한 경우, 타인의 초청장을 사서 입국한 경우, 한국 국제결혼조건에 맞게 중국호적을 고쳐 결혼한 경우, 다른 녀자 또는 남자와 동거하는 경우, 술집 등 유흥업에 취직한 경우 등이다.

한 사람으로 말할 때 이름이란 부호에 불과하다. 그의 인생이야말로 진짜의 그다.

1940년 일제의 강제집단이민시기에 오용의 할아버지는 아버지형제들을 거느리고 한국 경상남도로부터 중국으로 이민했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이미 장가를 들었고 오용의 형의 호적을 올린 뒤였다.

오용은 항렬에서 셋째였다. 7남매였는데 여자형제가 4명, 남자형제가 3명, 오용의 우로 형님 2명, 누님 2명, 밑에 여동생이 2명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침 식사 때면 자식들을 한 줄로 죽 세워놓고 고향이름을 외우게 했다.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다. 그렇게 외운 고향이름은 <경상남도, 청암면, 명호리, 불화촌>이였다. 아버지는 1954년에 오용 등 다섯 자식들을 데리고 조선(북한)으로 건너갔다. 평양 김책대학 뒤 판자집에서 살았다.

"목적은 고향이였는데 무식해서 당시 사정을 몰랐어요. 조선 땅만 디디면 고향을 갈 수 있는 줄로 알았거든."

오용은 이렇게 말했다.

오용의 아버지는 3.8선을 넘을 수 없어 고향을 포기하고 조선에서 복구건설에 참가했다. 딸 하나를 더 보고 식구가 불어난 데다가 혼자의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어 1년 만에 다시 가족을 이끌고 도문을 통해 목단강으로 돌아왔다. 당시 아버지는 비행장 닦이 등 일을 하다가 차츰 해림에 자리를 잡게 되어 농사를 했다.

형은 19세였던 1958년 대약진시기에 생산대 청년돌격대 대장을 했다. 들판에 막을 치고 집단 주숙을 하면서 농사하고 탈곡했는데 겨울에 탈곡장을 지키다가 관절염에 걸려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신이 됐다. 화가 나서 해림을 떠나 몽골족이 많이 사는 중국 북쪽의 내몽골로 갔다. 다리가 병신이면서도 내몽골 씨름판에서 2등을 따내 소문을 놓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에 중국에는 3년동안 대 재해가 들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기수부지였다. 조선족들은 가만히 강을 건너 조선으로 가는 바람이 불었다. 큰집 둘째형이 조선으로 갈 때에 형도 함께 두만강을 헤엄쳐 조선에 갔다가 후에는 부모가 그리워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사회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의 싸움이 치열했던 시기 사회주의체제 중국에 있어 한국은 '자본주의'에 속하는 적국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돼서부터 수많은 정치운동이 일어나 사회주의 대개조를 했는데 그 때마다 남북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의심을 당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모택동이 발동한 반대파 대숙청 운동이고 10년 대내란이었던 '문화혁명' 시기에 오용의 할아버지가 자본주의나라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하는 문제가 '반란파'들의 주의를 끌었다. 오용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한국에 있을 때 반일운동에 참가했고, 중국에 와서도 반일운동을 했다고 했지만 증명서류가 없어 할아버지의 역사는 증명될수 없었다.

이 때 '반란파'들은 오용의 사촌형이 조선전쟁(6.25)에 중국인민지원군 통역이 되어 3.8선 너머 한국까지 갔다 온 사실을 조사했다. 6.25에는 조선족이 많이 동원되었다. 정부에서는 고향이 미제의 침략을 당하고 있으니 전쟁에 지원하라고 호소했다.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들을 조선전쟁에 내보냈고 수많은 조선족청년들이 인민군이거나 중국인민지원군에 편입돼 민족상잔의 싸움에 동원되었다가 '열사'가 되었다. 오용의 사촌형은 할아버지문제와 한국에 갔다 온 역사 때문에 조선간첩으로 몰려 '간첩'이라는 개패(소흑판 크기의 검은색 나무판임)를 목에 걸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투쟁을 받았고 노동개조를 하였다.

오용은 1970년도 18살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출생지가 한국인 사람치고 대단한 행운이었다. '문화혁명'이 끝날 때까지 군대는 아주 인기 직종이었다. 처녀들도 군인을 배우자선택 1위로 잡았다.

"내 둘째형도 참군 했어. 그 때는 대학에 못 가면 참군을 해야 출세할 수 있었잖아. 퇴대(제대) 후 목단강에 배치됐지. 똑똑한 셈이지."

오용은 그 때의 행운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는 것은 당연 출세를 의미했다. '문화혁명'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인민해방군이 '혁명'에 개입하면서부터 전국 각 단위(직장)들에는 '군대대표'가 파견돼 정치 대권이 전부 군대들 손에 장악되었다. 입대하면 우선 입당할 수 있었다. 당시의 모든 출세에는 입당이라는 조건부가 달려있었다. 대학에 가거나, 간부로 되거나, 도시로 들어가거나, 월급이 오르거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거나, 승진하거나..... 여하튼 당원이란 하나의 정치자본으로서 이익관계에서 먼저 득점할 수 있었다. 참군은 입당의 첩경이었다. 농촌청년인 경우 입대하면 도시에 배치될 가능성이 있다. 도시 각 직장들에서는 참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정치간부로 중용했다. 당시 농민은 참군, 대학(문화대혁명 10년간 시험제도 폐지, 추천제가 실시됨)이란 경로를 통하지 못하면 절대 도시호적에 오를 수 없었다.

오용은 출세한 셈이다. 그 또래 청년들이 농민이 되어 농사를 할 때 군에 5년 복역한 덕분에 입당을 했고, 도시에 배치돼 도시호구에 올라 식량, 기름, 석탄 등 도시인들이 향수하는 배급(배급제는 80년대 후반에 와서 식량과 물품이 흔해지자 점차 없어짐)을 타먹을 수 있었다. 군에서 기사를 했으므로 1975년에 퇴대하자 목단강 지구 수리국 국장의 찦차 기사로 되었다. 월급이 38원 60전, 농민으로 말하면 대단한 출세였다. 당시 국장의 기사라고 하면 빽이 세고, 고급담배거나 고급 술 등이 자주 생길 수도 있어 사람들이 흠모하는 직업이었다.

그 후 다시 목단강 운수공사에 전근했다. 원인은 월급이 조금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 직장의 월급은 41원 80전, 국장의 기사로 있을 때의 월급보다 3원 20전이 더 많았는데, 당시로 말하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배급입쌀이 근당 13전이었으므로 그 돈이면 한 사람의 한달 식량은 살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듬해에 월급이 48원 60전으로 오른 것이다.

"기사 할 때에는 잘 살았어. 수입도 남보다 좋았고, 해마다 선진일꾼이 되군 했지. 아내도 국영공장에 출근해 '쌍직공호'(맞벌이 부부라는 뜻, 부부가 직장이 있는 도시생활을 부러워하는 의미에서 나온 말임)였다구." 라고 말했다.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전원회의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시작이었다. 1982년부터는 뚜렷한 개혁조치들이 실시되기 시작하여 계획경제가 상품경제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집체 경영이 부분적으로 개인 임대경영으로 넘어갔다. 머리가 남보다 빨리 움직인 오용은 화물차를 임대 맡았고, 아내는 식당을 경영했다. 1년만에 일약 '만원호'로 되어 오용은 목단강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당시 인구가 백만이 넘는 목단강에도 만원호는 몇 호밖에 없었다. 당시의 월급수준에서는 그야말로 천문학숫자의 거금을 가진 대부자였다. 저금액 몇 백원도 없는 집이 많았다. 결혼부조거나 생일부조를 보통 도시에서는 5원(당시의 한화 5백원정도), 또는 3원, 시골에서는 1원, 또는 50전을 할 때였다. 근로치부를 고무해 정부에서는 만원호들에게 영예를 주고 상금을 주었다. 1987년에는 만2천원을 주고 목재를 실을 수 있는 자동차를 샀다. 국영단위인 목단강 운수공사에서 종업원들에게 차를 헐값에 팔았으므로 벼락 맞은 소고기 시세로 싸게 산 셈이다.

오용은 넘어져도 떡함지에 넘어진다는 부류에 속했다. 1986년에 대흥안령에는 한 달동안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거리었던 큰불이 일어났다. 인류에게는 큰 비극이었지만 한 개인인 오용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대흥안령 아무얼(阿木爾) 임장(林場)에 가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불에 탄 나무들을 실어 큰돈을 벌었다. 사촌형(조선간첩으로 몰렸던 형)이 대흥안령 5대 임업국 국장이었으므로 그 정보를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이다.

***6차 도한기 - 해뜰 날 기다려야지**

한국문이 열렸다. 오용이네는 1986년에 고향과 첫 편지를 통했다. 한국에는 친척들이 많았다. 사촌, 육촌, 외가, 이종, 고종 다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1977년에 사망했고 큰아버지도 1964년에 사망했다. 1989년에 친척들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찾는 첫 편지를 오용이 했다. 형은 다리가 불구여서 먼길을 떠날 수 없었기에 오용의 앞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는 초청장이 왔다.

당시 중국은 외국과의 내왕이 금방 시작되었기에 지방정부에서는 외사에 익숙하지 못했다. 목단강 외사과에서는 외국의 초청일 경우에는 비행기표가 와야 출국이 가능한 줄로 알았기 때문에 비행기표가 오지 않으면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오용이네는 초청장은 왔지만 비행기표가 오지 않아 여권수속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초청장을 받고 감회가 깊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슬픔과 이제 있게 될 만남에 대한 흥분 때문에 매일 울기만 하더니, 비행기표를 기다리지 못하고 갑작스레 사망했다.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고 북적거리는 때였다. 임종을 앞두고 어머니는 "오용아, 꼭 고향을 찾아보거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한달 후에 오용은 한국으로 떠났다. 제1차 도한(渡韓)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도한인데 내가 오용이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제6차였다.

"햇수로는 12년이 됐어."라고 했다.

비자수속을 하기 위해 북경으로 들어갔다. 북경에서는 한창 6.4사태(천안문사태)가 벌어지고있었다. 천안문 앞에 백만이 운집해있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수속필요상 한국에 전화를 쳐야 하는데, 처음 국제전화를 치다 보니 돈이 많이 들까봐 겁이 나서 처남이 있는 북경 중앙번역국에 가서 쳤다. 그 때는 한국전화를 한번 치면 백원이 나왔는데, 당시 보통 백성의 반달 월급에 해당됐다. 수속이 다 된 후, 수십시간 기차를 타고 심수(심천)로 가서 다시 비행기로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갔다. 비용이 많이 들었다.

오용은 한국에 친척이 40집이나 있었다. 들은 바가 있어 선물도 할 겸 팔아 여비도 할겸, 한몫 잡기도 할 겸, 겸사겸사 한약을 준비했다. 뽕도 따고 님도 보고였다. 오용은 집 두 채가 있었는데 은행에 맡겨 대부금 5만원을 대출했다. 웅담, 사향, 청심환, 녹용, 녹태 등을 가지고 떠났는데, 김포공항에서 녹용 30뿌리, 청심환 7상자, 녹태 한 상자를 전부 빼앗겼다. 친척에게서 돈 30만원을 꾸어 나흘후 김포공항여과에 가서 사정해 약들을 찾아냈다. 약을 파니 8백만원이 되었다. 친척들은 모두 잘 대해줬으나 생활이 구차해 마음뿐이었다.

1차 도한때에는 비법체류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2차 도한은 1990년도 8월 16일, 1차도한 5개월만에 시작되였다. 오용은 머리가 빨리 돌기 때문에 한국에 노다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 한국은 약 검사가 점점 더 심했다. 오용은 일본으로 해서 한국 부산에 이르는 경로를 보아두었다. 중국사람으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길이었다. 부산 여행사로부터 들은 정보였다.

오사까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갔다. 일본으로부터 입국하는 조선족인데 오용이 경상도 말을 너무 유창한 것에 의심이 들어, 처음에는 간첩인 줄로 알고 두시간이나 검사를 까근히 했다. 진짜 중국국적이고 중국조선족인것을 확인하고는 반가워했다. 부산해관에 중국조선족 입국이 처음이였기에 약도 전혀 빼앗지 않고, 오히려 짐까지 거들어주어 무사히 입국했다. 부산 형님이 자가용을 몰고와 마중했다.

한약이 여섯트렁크나 되였다. 형제들이 다 같이 잘살기 위해 맏형을 비롯해 6형제 집에서 대표들이 나왔다. 1차도한에서 번 돈에 더 꾸어 보태서 16만원을 투자했다.

"부산형과 형수님은 내가 매일 약을 3백만원, 4백만원씩 벌어들이는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어. 우리 아제(시동생) 돌 꼭대기에 올려놔도 살겄다, 그렇게 말했어."

금방 한약 두 트렁크를 처분했는데 상황이 돌변했다. 중국 아세안게임 축구응원을 보러갔던 한국인들이 청심환을 대량 사오는 바람에 가짜, 저질 약품이 많아 텔레비죤에서 중국제 청심환이 가짜라는 보도를 하였다. 한국 한약시장에 대한 중국한약의 충격을 막으려 했다. 된서리를 맞은 한국의 중국 약시장이 충격을 받았다. 적십자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약을 대량 반입했다.

2차 도한기간에는 형제들을 다 중국에 보내고 남은 약을 처분하느라고 비법체류를 했다. 약값의 다섯배 정도는 벌었다. 92년도까지 비법체류를 하는 기간에 노가다 일을 하면서 일당 5만, 6만씩 한달에 평균 150만원씩 벌었다. 40명 중국조선족들을 한국회사에 일꾼으로 소개하여 소개비를 벌기도 했다.

제3차 도한은 1993년도였다. 2차도한은 형제들의 경제력을 키운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또한 오용은 형제들의 경제력을 키우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었다. 이면에서 오용은 형제들의 인정을 받았고, 형제들은 무슨 일이든 오용에게 자문했다. 3차부터는 돈을 써야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2차도한에서 번 돈을 재투자해 형제들이 다 나왔다. 20명이 방 두칸(여자 방, 남자 방)을 잡고 건축업, 음식업에 취직해 돈을 벌었다. 집세는 1백만원 보증금에 월 10만원이었다. 한곳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15차 이사했다. 살다 보면 마찰이 있기 마련인데, 주변신고가 겁나서였다. 옮길 때에 보증금 1백만원을 그대로 주지 않고 30만원쯤 잘라내는 주인들이 많았다. 그랬지만 신고가 겁나서 눈을 감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3차도한에서 번 돈으로 아파트를 샀다.

제4차 도한은 1994년도에 있었다. 비법체류자로 신고 당해 1월달에 청량리 휘경동 철창속에 20일간 구속되었다가 강제송환되었다.

제5차 도한은 1995년도에 있었다. 그때부터는 무역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스타킹 만장, 무스탕, 가죽잠바 등을 20여장 가지고 중국에 들어갔다. 쏘련조선족 장사군을 만나 두배의 값에 훌쩍 넘겨줬다. 그렇게 무역선을 마련해 본격적인 무역을 시도했다.

제6차 도한은 1999년 1월 13일부터 내가 만날 때까지 이어지고있다. 무역회사 합작을 계기로 왔기 때문에 돈을 들이지 않고 왔다. 제5차 도한 무역에서 만든 돈에 얼마간 더 보태여 4만달러의 자금을 가지고 들어와 한국인과 합작해 사무실을 차렸다. 중국쪽 시장은 오용이 파악하고 한국쪽 시장은 그 한국인 사장이 파악하고, 상호 아이디어를 교환해 돈을 벌기로 했다.

그런데 시작하고 보니 그 한국인은 숱한 빚을 걸머지고있었다. 경찰의 전화가 자주 걸려오는 등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인 사장은 처음부터 오용의 자금으로 장사를 노렸다. 오용과 마찰이 생겼는데, 이 사장은 오용이 비법체류자라는 것을 신고했다. 오용은 사무소 보증금 5백만원도 찾지 못하고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무소 보증금을 찾기 위해 성남교회에 부탁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중국조선족 해뜰 날 기다려야지. 정부에서 50살부터 풀어준다고 했으니까, 이제도 2년은 기다려야 50세가 되겠어. 그래도 기다려야지. 지금 생각해도 손이 가려워. 장사할 것 내 눈에는 천지야. 그때부터는 무역에서 손 펼거야!"

불법체류자 오용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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