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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장아줌마 - 마른 벼락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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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장아줌마 - 마른 벼락과 하나님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7>

봉천동의 서울한중교회 주방장아줌마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남다른 책임감 때문이었다. 예배시간이면 주방장은 교회에 와서 숙식하는 사람들이 예배를 보러 가지 않을까봐 근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혹 연길교회로부터 파견돼 교회직원으로 취직해온 분일까, 라는 호기심이 있었다. 그러나 찾고 보니 역시 상상밖이었다. 취재하는 동안 나는 늘 상상밖의 일을 곧잘 만나군 했다.

“워낙 중국에서부터 교를 믿으셨습니까?"

“아니, 난 워낙 아무것도 믿지 않았소."

이때 저녁 예배시간이 되어 주방밖 큰 마루방에서는 사람들이 술렁술렁 움직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주방장은 문을 열고 나가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환자 두 분만 남고, 나머지 분들은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예배를 보러 갑시다. 꼭 갑시다.“

아직도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마지못해 움직었다.

사람들이 나가자 그녀는 교회방문을 잠갔다. 예배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다시 들어 올까봐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그녀의 책임감과 충성심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얼굴은 너부죽했고, 시원스레 생긴 쌍겹눈과 선명한 코선은 그녀가 한때는 꽤 미인이었음을 귀띔했다. 한국에 온 불법체류자치고 어느 사람에게 이야기가 없으랴만, 그녀의 이야기는 참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인생무상의 고뇌를 실감있게 말해주었다.

주방장은 연변 화룡사람이었다. 딸 둘에 아들 하나, 남편까지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생활을 했다. 큰딸은 장춘에 사는데 사위는 장춘법원 판사로 있다. 화룡에서 개인옷장사업을 했는데, 중국 각지에 가서 물건을 구입해 팔아 조금씩 돈을 모으며 넉넉하게 살았다. 1997년에 큰돈을 벌고싶어 돈을 일부 꾸어 4만5천원(한화 600만원)을 주고 가짜 한국사위“장모“로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남대문시장에 있는 보신탕집에서 일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냄새가 싫었지만 참았다.

“중국에서 우리가 먹는 보신탕과는 맛이 판 달라. 고기는 조금 넣고 맨 풀만 넣고 끓이더라니까. 고기도 중국고기보다 맛이 없어서 석달동안 일하면서도 고기를 몇점 먹지 않았었소.“

석달이 지나자 그 일을 그만두고 가정부로 들어갔다. 1백만원씩 받으며 매일 방 18개를 청소하고 화식을 했다. 사모님이 잘 대해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남편이 뇌출혈로 급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자식들은 출가했거나 장가들어 남편에게 의지해 살아왔던 그였는데, 이제 돈 벌고 집에 가도 맞아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충격이 컸다. 전화를 받고 쓰러졌는데, 그때부터 다리가 마비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그녀가 불쌍하여 의사를 불러 치료해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그 집을 나올 때 사모님은 그에게 40만원을 더 주었다.

그녀가 가정부로 있었던 아파트는 12층이였다. 남편을 잃었는데, 다리까지 감각이 없어져서, 죽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유서까지 써놓고 이튿날 죽으려고 날짜까지 다 잡아놓았다. 서울에는 함께 나왔던 친구들이 몇명 있었다. 그녀 정신상태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억지로 그녀를 차에 실어 서울한중교회로 데려갔다. 그날이 바로 1997년 10월 17일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하느님이 나를 부르고 계셨소.“

교인이 된 그의 해석은 이러했다.

7개월동안 누워있었다. 기독교교육을 받으면서 하느님에 대한 기도로 마음을 위안했다. 약물치료는 많이 못하고 전기치료를 했다. 겨우 땅을 디딜 만하게 되자, 하나님께 봉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교회의 밥을 했다. 그렇게 1년반이 되자 다리가 나아졌다. 이제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중앙병원, 청와대식당 등에서 일했다. 그런데 다리가 또 갑자기 아파났다. 약을 써도 더 아프고 침을 맞아도 더 아팠다. 끝내 교회로 돌아와 기도를 드리고 나아졌다고 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걸 알았소. 기도하면 응답이 오고 요구를 제기하면 그대로 해주셨소. 그 은혜를 갚으려면 하나님께 봉사를 해야지. 하나님아버지는 기술도 많고 정성도 있어 세계를 창조하셨소. 내 다리를 낫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바로 그렇게 해주셨소. 그래서 돈 한푼 안 받고 봉사를 계속 했는데 이제는 2년이 되었소.“

그녀는 여전히 교리대로 해석했다.

일요일이면 한중교회에는 중국조선족들이 250명~300명이 모여와서 예배를 보았다. 그 화식을 그녀가 전담당했다. 평일에는 중국조선족 50~60명이 식사하고, 많을 때에는 80명이 넘었다. 아침, 저녁을 한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이 식사를 마련했다.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 다 불쌍하고 다 잘해주고 싶소.“

그런데 그에게는 유감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오도가도 못하는 조선족들을 다 받아주고 먹여주고 식사를 하게 해주는데,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였다. 3층에서 떨어진 사람을 다리를 치료해주고, 심장병에 걸린 사람은 모금해 수술해줬는데,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병이 치료되면 그 자리로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교회에서 잘해주는데, 예배시간에 예배라도 봐주었으면 자기도 마음이 편하겠다고 했다. 같은 조선족이어서 그런 모든것이 자기 속에 걸리고, 목사님 보기에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예배시간이면 자꾸 독촉한다고 했다.

그녀 책임감과 충성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왜서인지 돈에 대한 욕망이 없어졌소. 이전에는 시간을 헤여보면서, 이게 다 돈이다, 라고 계산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다 없어진 게 이상하오. 마음이 편하고 조선족들을 알뜰하게 깨끗하게 맛있게 잘해주겠다는 생각밖에 없소. 정말 이상하오.“

그녀는 머리를 갸웃해 보었다.

(돈에 대한 욕망이 정말 없어졌을까?)

나는 나대로 이런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그녀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진실한 마음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기독교암시의 작용이 아닐까 싶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을 하느님에게 맡겨버린 교인의 심리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어 그녀는 기도가 영험한 일들을 몇가지 이야기했다. 교인이 아닌 나로서는 스스로 해석하며 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각혈하며 앓는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페병8형이였다. 아직 아이도 없는 부부라 아들은 이혼하고 싶어했다. 주방장은 아들을 교리로 교육했다. 아버지를 운명시킨 며느리와 그만두면 넌 도덕도 없고, 내 아들도 아니다, 장인장모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아내를 맞아오너라, 라고 말했다. 아들이 가책을 느끼고 엄마의 당부대로 아내를 맞아왔다. 그녀는 전화로 며느리에게, 하느님께 기도하며 울지 말고 함께 강하게 살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친척들에게 전화하여 애들을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동서들과 오래비(남동생)들이 밀방약을 얻어다가 치료받게 했다. 그녀는 서울에서 매일 며느리를 위해 기도했더니 며느리 병이 완쾌되었다고 했다. 그후 1년간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몇달전에 아들을 보았다는 희소식이 전해왔다고 말하는 그녀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페가 나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명이 짧다오. 그 말을 듣고 나는 지금 매일 하나님아버지께 손자가 백살까지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소.“

큰딸이 집이 없어 기도했더니 직장으로부터 40만원짜리(한화 5천3백만 정도) 집을 탔고, 큰딸이 사위를 따라 장춘법원에 취직되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또 생각대로 되더라고 했다. 자기도 작년까지는 몸이 약했는데 올해는 몸이 좋아졌다고 했다.

(하느님이 해준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노력에 의해 된 일이다. 그리고 병이라는 것은 정신적으로 편안해지면 절반은 낳아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교인이 아닌 나의 사고는 그녀의 해석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궤도를 했다.

“아직도 젊으신데, 한물 더 사셔야죠. 인생이란 게 아무래도 먼저 가는 사람이 있고, 후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아직도 더 살아야 할 사람은 좋은 분을 만나 결혼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심으로 말했다.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정신적으로 의탁할 사람이 있으면 그녀가 이처럼 지나치게 종교에 심취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이구, 그럴 생각은 없소. 와서 깃숙거리는 한국영감들이 많기는 하지만, 내 영감이 너무 좋은 분이어서 남의 영감들을 모시고 살 생각은 없소.“

싹둑 잘라서 하는 말이었지만 기분은 좋은 듯 웃는 얼굴이었다.

이제 10월 17일이면 교회에 온 지 3년이 된다고 했다.

“이만큼 봉사를 하셨으면 이제는 나가서 슬슬 벌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또다시 무종교인의 처세철학으로 그녀를 꼬드겼다. 주방장아줌마가 하느님에 대한 채무감으로 무한정 교회에 눌러있는 것도 그녀 인생에는 참 딱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마음을 먹으면 다리가 또 아파나더라니까, 괜찮을끼?“

그녀 얼굴에 잠시 어둠이 비꼈다. 내가 볼 바에는 하나님에 대한 공포였다.

“그만큼 열심히 봉사를 하셨고, 굳은 신앙을 가지고 계시는데, 하느님도 알아봐 주지 않겠어요? 하나님도 당신의 자식이 돈을 좀 벌어 집에 가서 자식들과 즐겁게 상봉하기를 원하시겠죠.“

나는 그녀가 신앙하는 교리에 따라 해석했다.

“정말 그러실까?“

주방장의 눈빛이 빛났다.

나는 그녀가 어서 교회에서 해방 받아 돈을 벌고 중국으로 돌아가 가정의 천륜지락을 누리며 살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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