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동에 있는 서울한중교회에 가면 조선족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나는 무작정 봉천동으로 향했다. 봉천역에서 내려 교회에 전화를 해서 4번 출구를 잡았다. 출구옆 멀지 않은 곳에 자동판매기가 있어 나는 블랙커피를 한잔 뽑아 마셨다.
이때 나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신문지를 깔고 신문지를 열심히 훑어보는 50대의 일남일녀가 앉아 있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정이 익숙했다.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연변사람들이였다.
한국에서 중국조선족 비법체류자들은 말 한마디를 들어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도 익숙한 냄새를 맡고 동류를 알아보는 것과 비슷했다. 우선 눈빛이 어두웠다. 목소리가 낮았다. 남의 집 지붕 밑에 선 듯한 송구스럽고 경계심이 있고 주눅이 든 눈빛이었다.
그들은 신문의 구직란을 열심히 훑고 있었다. 얼굴빛이 말이 아니었다. 까맣게 탄 것 때문에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빛이 얼굴밖에 내비쳐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연변말로 "조선족분들이시죠, 예?"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 나도 그들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일남일녀는 부부였다. 서울에 시집온 딸이 초청했기에 돈은 별로 들이지 않고 왔다고 했다. 사돈이 눈치 보이고 딸이 눈치밥을 먹을까봐 딸집에 있지 못하고 교회에 나와 먹고 자고 한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서 일이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신세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온 지 한달이 됐는데 오리농장에 가서 반달간 일하다가 너무 정 떨어져서 왔다고 했다.
"오리알 깨진 것 있어도 절대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도 안하지 않겠소. 그동안 오리고기 한 점 못먹어 봤소.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게 일해도 말 한마디 따뜻하게 안합디다. 말 한마디 천냥빚 갚는다구 하는데, 말도 그렇게 아끼고, 정 떨어지게 사는 사람들 세상천지 처음 구경했습니다. 에라, 돈 못 벌면 말지, 이렇게 짐승취급 받으며 살겠냐, 해서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데 정작 일자리를 찾자고 보니까, 나이 많아서 쉽지가 않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워낙 한국에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했다. 여자는 가정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남자는 건축장의 야직(경비)을 섰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이촌동 현대아파트에서 가정부로 있는 동서에게서 여주인의 친구들이 가정부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었다. 동서에게 부탁해 가정부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하고 그들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러나 나중에 동서에게 청을 들었을 때, 동서는 그렇게 길에서 만난 사람을 가정부로 소개할 수 없다고 했다. 가정부라는 것은 주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주인집의 귀한 애를 보는 사람인데, 잘못 소개하면 오히려 주인집에 피해를 준다고 했다. 들어보니 좋은 마음만으로는 소개할 수 없는 직업이 가정부였다. 생각 같아서는 그 아줌마에게 어서 일자리를 소개해주어 밝은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나는 교회를 쉽게 찾았다.
교회에는 50대부터 60대의 사람들이 많았고, 젊은 층들은 대개 금방 한국에 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남자들은 윗층에, 여자들은 그 아래 지하실에 있었다. 40평쯤 되는 통방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거나 누워있었다. 동쪽에 주방이 있고 그옆에 집사의 방이 있었다. 문 앞에 집사가 앉아 구직등록을 받거나 구직자소개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알맞는 직업이 나지만 그쪽으로 소개받아 가곤 했다. 구직회사에 부탁을 하면 5만원에서 8만원, 십만원을 주어야 소개받을 수 있는데, 그렇게 소개받은 직업은 십중팔구 본인의 요구와는 딴판이고, 믿음성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해도 이미 낸 돈은 그냥 떼인 돈이 되고 만다고 했다. 한번 장기 직업을 찾자면 적어도 몇차씩은 소개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들어가는 돈을 댈 힘이 없어 교회에 찾아오군 했다. 교회에서는 소개비를 받지 않고 소개를 해주었다.
연길아줌마가 나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사람들이 몇명 나를 빙 둘러앉았다. 그중 서란에서 왔다는 한 50대후반의 아줌마는 워낙 교원출신이였다. 목소리가 힘들게 나왔다. 교원이어서 후두염이 있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녀 말에 의하면 요즘 일자리를 찾지 못해 속이 타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아들이 민족대학을 졸업하고 대련의 어느 회사에서 일보고 있어요. 아들애가 지금 세상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국외에 나가 학위를 따지 않으면 안된다고, 친구들도 다 그렇게 나갔으니 엄마 좀 도와주세요, 하더라구요. 그래서 나왔는데, 나이가 많으니까 어데서도 안 써주잖아요. 숱한 돈을 꿔서 나왔는데 일자리가 없어서 속이 타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놈이 괘씸하다구요. 그 놈이 아니면 내가 왜 이렇게 나와 고생하겠어요?"라고 했다.
오상에서 왔다는 한 아주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정부로 들어갔는데, 집주인이 매일 술 마시고, 부부가 매일 싸우고, 겁나서 못 있겠어요. 그릇이 왔다갔다 박산나고, 집주인이 부인을 뚜드려 패고, 겁나서 겨우 두주일을 했는데 더 못 하겠다고 했더니, 돈을 안 준대요. 워낙 남의 집살이라는게 속이 오그라드는 건데, 이런 집에는 굶어 죽는다 해도 있을 수 없지, 그래서 나왔더니..."
"그래 돈 못 받았어요?"
"한달을 채우지 않았으니 안 준대."
전화를 받으러 갔던 50대후반의 한 키 큰 아주머니가 희색이 만면해 돌아왔다.
"땡 잡았어, 백만원짜리야."
큰 꽃무늬가 간 적삼에 짧은 바지를 입은 무척 장대한 아주머니였다. 머리는 노란물을 들였고 관골이 큰 너부죽한 얼굴에 눈썹을 짙게 문신했다.
"오매, 어떻게 그런 자리 생겼남?"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쌍둥이인데, 내가 산모조리원 출신이라고 하니까 나를 잡은 거라구. 아이구, 그동안 속 바질바질 태웠는데, 이제 살았다!"
아주머니가 벌렁 바닥에 누웠다.
"이제 일곱시에 데리러 온대."
이때 역시 50대의 한 아주머니가 주방으로부터 나오더니 사람들을 향해 높은 소리로 말했다.
"빨리 갑시다. 빨리, 예배시간이 됐습니다. 갑시다. 빨리 일어들 나세요!"
말소리를 들으니 연변말투엿다.
"저 분은 누구신데요? 집사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연길아주머니가 연변사람인데, 주방장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천천히 일어났다.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빛깔들이 역력했고 어떤 사람들은 입을 비죽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빨리 움직여 나갔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꼭 참가합시다, 식사할 때만 오지 말구, 예배에 잘 참가합시다."
주방장이라는 연변아주머니가 또 한번 강조했는데,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재빨리 나가는 사람들에게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눈치로도 예배를 피하는 사람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낮은 소리로, (주방장이) 한국인 집사도 아니면서 한국사람보다 더 엄하다고 두덜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주방장을 눈여겨보았다.
방을 비운다고 했으므로 나도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는 여전히 사정없이 더웠다. 해가 한창 서쪽으로 가고 있어 사람들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한결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이 극소수다. 이날 내가 본 조선족들은 바람을 가리워주고 비를 긋게 해주는 주인의 은혜를 저버릴수 없어 감사의 마음으로 가는 모습들이였다. 다음 끼니를 먹기 위해서라도, 라는것이 예배당으로 가는 그들의 단순한 동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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