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연길 여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연길 여자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4>

***연길 여자**

낯익기만 했던 연길 여자는 나에게 훨씬 더 익숙하게 다가왔다. 하룻밤을 자고 난 6월 30일 저녁, 트럼프패를 떼고 있던 그녀가 불쑥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도 워낙 성미가 이렇게 고약하지는 않았어. 연길시 제2중학교에 다닐 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쟤(나를 턱으로 가리키며)처럼 나물나물하구 얌전했지. 음악선생님이 내가 하도 말을 안 하니까, 얘, 네 입에 파리가 앉았다, 하고 소리쳐서야 놀라 입을 벌렸다니까. 그랬는데 나그네(연변 함경도 방언에는 남편을 나그네라고 함) 때문에 하도 고생을 하니까, 성격도 다 변하더라..."

"남편 때문이라니요?"

나는 노트를 펼쳐 '2000년, 6월 30일, 구의동 셋집에서 밤 10시반'이라고 적었다.

그녀는 이름이 김옥자, 장춘요리학원을 졸업했다.

"죠즈같은 건 최고로 잘한다니까! 궈보우러우(탕수육)같은건 히쭉 웃으며 하지. 중국요리 못 하는 거 없어요. 호텔 주방장 양성이 학교목표였으니까, 궁중음식을 배웠지. 음식예술의 극치만 배웠어!"

그녀 말이 허풍치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볶아준 중국요리가 참 맛있었다.

남편은 북경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연길 모 직장에 초빙되어 왔는데, '문화혁명' 시기인 1975년에 피해를 받았다. 당조직에서는 남편더러 간첩혐의가 있으니 교대하라고 했다. 남편은 '입당지원서'의 '사회관계란'에 둘째형이 조선 라진 광산부부장이라는것을 적어 넣었었다. 그 부분만 적지 않았어도 조직에서는 남편의 둘째형이 조선 요직간부라는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본인도 간첩으로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은 솔직한 사람이어서 당조직에 사회관계를 속이지 않았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시달림을 받다가 정신병에 걸렸다.

당시 그녀는 딸 하나에 아들 하나가 있었다. 남편이 정신병에 걸렸을 때에 아들은 일곱달이였다. 남편은 담배로 이불을 지지고 구들을 구멍냈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고, 가구들을 부수기도 했다. 집은 매일 전쟁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1984년에 그녀는 처음으로 장사에 나섰다. 그녀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청도의 모 병원에서 정신병을 잘 고친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돈을 벌어 남편을 청도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이였다. 남편이 혼탁한 세계에서 헤어나와 다시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가정의 악몽이 사라지는 그 밝은 날이 그녀의 꿈이었다.

옥자는 옷장사로부터 시작해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내가 볼 바에도 그녀의 머리는 천성적인 장사머리였다. 돈이 조금 모여지자 1986년 여름에 사천 청도행을 계획했다. 당시만 해도 비행기는 급이 높은 사람만이 탈 수 있었기에 아무리 돈이 있어도 상급단위 소개신이 없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비행기표값은 보통백성에게 천문학적 숫자였으므로 개인이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였다. 정신병자인 남편을 위해서는 비행기행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옥자는 연길시정부를 찾아가 사정했다. 겨우 소개신을 얻어서 비행기표를 샀다.

그렇게 떠난 청도행은 실망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그 병원은 간질병치료가 전문이었다. 연길로부터 낯설고 물설은 청도에 이르는 동안, 남편이 자꾸 실종되어 온갖 속을 다 태우면서도 꿈은 꿈대로 꾸어 만리길이었던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였다. 병원 의사는 그녀 처지가 딱해 청도의 다른 한 정신병원을 소개했다. 역시 치료불가능이라는 결론뿐이였다. 청도행은 차라리 그녀꿈을 깨어버리는 행이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꿈이 필요했다.

그녀와 합숙한 지 17일만에 합숙을 옮기려고 했을 때 내가 본 그녀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그것은 그녀 다른 꿈의 표정이였다.

***범의 등에 오르면 내리기 힘들다**

전화불통이 내가 합숙을 포기한 주요원인이였다. 합숙집의 전화는 받을 수는 있고 밖으로 걸 수는 없는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받을 수만 있었어도 합숙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단기체류였기 때문에 전화를 신청할 수 없었다. 93년도에 동생이 전화 때문에 애를 먹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전화요금 결산은 상례대로 전화중지 한달후에 했는데 수속이 까다로웠다. 동생의 전화보증금 25만원은 내가 있었기에 찾을 수 있었지만, 내가 전화를 신청한다면 누가 나의 전화보증금을 찾아줄 것인가.

어느날 전화가 완전불통이 되었다. 알고 보니 이 집에 세를 낸 사람은 옥자가 아닌 또 다른 여자였다. 그녀가 요금을 물지 않아 전화국으로부터 중지를 당한것이다. 취재 때문에 전화불통을 그냥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사정이야기를 하고 합숙을 옮길 준비를 했다. 나는 한달 셋값을 지불하고 17일밖에는 못 있었으니 얼마간은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93년도에 한국인의 집에 민박했을 때에도 사정에 의해 그 달을 다 채우지 못하자 주인은 나에게 일부를 빼어주었었다. 이때는 금방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번역비도 벌지 못해 호주머니사정이 안 좋았다. 적당히 빼어달라고 했더니 그녀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 나는 사정이야기를 다시 한번 하고 더 낮춰서 3만원만 빼어달라고 했다. 그랬지만 여전히 그녀 기색이 험악했으므로 그 3만원도 포기해버렸다. 뜻밖에 그녀는 기색을 고치고 3만원을 내주었다.

"12만원이면 나를 너무 애하게(밑지게) 준 거는 아니야. 가져가라구."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을 때 나는 승리한 느낌이 아니었다. 중국돈으로도 2백원밖에 안되는데, 그 돈으로 신세 고칠것도 아니고, 내가 왜 이러지? 라고 생각했다. 짐을 부탁한 차가 올 무렵, 당당해야 할 내가 오히려 불안해서 부랴부랴 슈퍼에 가서 만원짜리 쌀 한톨과 천백50원짜리 김 한 봉지를 사다가 주방에 놓았다. 그녀도 180도로 변해 쌀과 김을 강경하게 짐 속에 밀어넣었다. 나는 그녀 모르게 김을 다시 꺼내 놓고, 있는 동안 쓰라고 선물 받았던 200g짜리 랑데부샴푸와 린스를 내어놓았다.

나는 여전히 우의 그녀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런 여자는 아니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후의 이야기에서 나는 그녀의 두번째 모습을 찾아보았다.

한번의 장사는 그녀를 기호난하(騎虎難下)의 여자로 만들었다.

남편의 병을 치료하려다가 실패한 1986년 가을, 그녀는 우연한 인연으로 광주(廣州)에 있는 홍콩기업인 장사장을 알게 되어 홍삼판매계약을 체결했다. 거액의 이윤에 머리가 돌아버린 그녀는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계약금을 마련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홍삼장사를 성공하기 위해 번 돈들을 전부 때려 넣고 또 거액의 고리대를 꾸었다. 찡위현 홍삼장의 조농장장과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지불한 뒤 홍삼 7톤을 싣고 광주로 갔다. 장사장이 넘겨받기만 하면 거액의 돈을 벌 수 있었다.

광주는 남방이어서 기온이 높아 여름처럼 더웠다. 검사가 시작되어 현미경으로 홍삼을 살펴보던 장사장이 화를 벌컥 내며 홍삼상자를 전부 뒤집어엎었다. 곰팡이가 꼈으니 계약대로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몇만원도 아니고 수십만원을 썩여버릴수는 없었다. 인력을 동원해 홍삼을 했볕에 널고 썩은 것을 가려서 팔았다. 결국 인건비, 창고보관비 등을 물다 나니 얼마 건지지 못하고 빚구럭에 빠졌다.

현미경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홍삼들이 있었다. 그것을 팔아 받아 쥔 돈은 본전은 턱도 없었지만 부피는 적지 않았다. 당시는 100원권이 아직 나오지 않아 10원짜리가 가장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돈 한 마대를 싣고 찡위현 삼장으로 갔다.

"그때는 바보처럼 순진했어. 홍삼값은 놔두고 내 빚을 먼저 물었더라면 그렇게 죽도록 얻어 맞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야."

그녀는 홍삼값을 물고 자기는 철저히 망했다.

돌아오자 곧 빚꾼들에게 포위되었다. 빚은 본자(원금)에 이자가 새끼를 쳐서 어느덧 22만원으로 올라갔다. 겨울이 되었는데 석탄이 떨어졌다. 쌀도 떨어졌다. 밤 열두시가 되였지만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방에서 떨고 있는 남편을 보자 대담한 궁리가 떠올라 삽과 쓰레받기를 들고 부근의 식료품공장 석탄더미로 나갔다. 아이와 앓는 남편을 위해 한번만 도적질하자. 그런데 조용한 밤에 삽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생각보다 더 끔찍하게 울려 석탄 한덩이도 못가지고 도망쳐왔다.

정신병남편을 집에 둔 채 빚꾼들을 피해 예술학교 부근의 작은 세집으로 피신했다. 추운 겨울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해 밀차에 실어왔다. 난생 처음 나무를 팔자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왕청에서 빚을 피해 온 기준이라는 애가 그녀 세집에 함께 있었는데 그 애가 나무를 팔았다.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밤에 가만히 남편에게로 가져가군 했다.

숨어사는 삶이 계속되던 1990년, 딸애가 부산총각과 결혼했다.

한국은 그녀에게 두번째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돈이 보이는 눈**

1992년에 딸이 결혼하는 것을 계기로 옥자는 한국으로 나왔다. 식당에서 일하고 공사장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가정부, 파출부로, 나중에는 절에서까지 일했다. 식당에서는 한달에 한번도 쉬지 않고 백만원을 받는 일을 했다. 가정부로 있을 때에는 아침 다섯시반에 일어나 식사준비를 하고, 식사 후면 커피를 끓여 주인의 화장대에 올려놓고, 주인이 가면 방을 거두고 빨래를 했다. 주인은 무슨 병이 있는지 이상하게 팬티에 동글동글 입쌀알만한 똥을 자꾸 뭍쳐놓더라고 했다. 그것을 씻을 때면 화가 나고 구역질이 솟구쳤다. 점심 11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주인이 하는 음식점의 사발을 씻고, 저녁 7시부터 밤 12시까지 음식점과 가라오케를 청소했다. 북한산에 있는 절에서 일할 때에는 떡을 찌고 집을 청소하고 촛불을 달고 망자옷을 태우는 일을 하고 일당 3만 5천원씩 받았다. 보살들이 가끔 팁을 주기도 했다.

옥자는 빚 22만원을 갚기 위해 결사적으로 일했다.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1992년 7월인데 그날밤 9시 20분 경이었어..."

서울역 벽산빌딩뒤 셋집에서 그녀는 경찰의 검문을 당했다. 그녀는 화장실로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여권, 사향, 웅담을 셋집 화장실에 감추었다. 이어 회기역 외국인보호소에 잡혀갔다. 60여명이 잡혔다. 주인집아줌마에게 전화로 화장실에 있는 여권, 사향, 웅담을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두달만에 풀려서 셋집에 찾아가니 아무것도 없더라는 대답이였다.

외국인보호소에서 그녀는 KBS에 편지를 썼다. 경찰은 편지를 쓰면 독감방에 넣겠다고 위협했다. 옆방에 흑인,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잡혀있었다. 그애들도 남편이 빚때문에 층집에서 뛰여내려 자살하는 등 고통이 많더라고 했다. 흑인여자가 한국말을 잘해서 친구로 되었는데 그녀에게서 그런 사정이야기를 들었다고, 그 애들은 온몸이 깜둥이지만 손바닥은 하얗더라고 했다. 빵도 나누어먹고 주소도 서로 나누었다. 옥자는 새벽잠이 없었다. 일찌기 일어나서는 그 애들에게 물총을 쏘았다. 장난 한 일인데 애들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경찰들이 달려와서 야단쳤다.

"그 애들과 우리 사이에 일이 생길 때면 경찰들은 언제나 우리 조선족들의 편을 했어. 그래도 내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라고 하며 그때만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방에는 감시카메라가 있어 사무실에서도 방의 동정을 다 감시했다. 경찰들은 옥자가 일주일을 자지 않는것을 보고 자결을 할까봐 근심했다. 나이가 많은 여자치고 옥자는 담도 크고 말썽꾸러기였다. 감시카메라에 라면포장지를 씌워놓았다. 카메라가 마사진(망가진) 줄로 알고 경찰들이 달려나왔다. 옥자는 양걸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두달을 있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목욕도 자주 시키고 음식도 잘 먹이는데 사람은 홀쭉하게 되였다.

"그래서 자유라는 게 인간에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지."

창너머로 차를 마당에서 몰고 나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고 했다. 물건주문을 받으러 오는 남자가 있었다.

"아저씨, 손 좀 잡아주세요!"

저도 몰래 그렇게 집작거리고 싶어지더라고 했다.

배민숙이라는 착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옥자 대신 공탁금 천만원을 외국인보호소에 냈다. 보름동안 자유가 있는데, 그동안 중국으로 가면 그 돈을 찾을 수 있고 가지 않으면 몰수한다고 했다. 옥자는 도망하고 싶은 생각이 불붙듯 했지만, 착한 여자에게 피해가 갈까봐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빚은 다 물었습니까?"

"한국덕분에 빚은 다 물고 꽤 벌었어. 장사 하나야 먹었지! 셋집 사는 이 꼬라지를 보면 거지같겠지만, 돈이 있다니까. 이제 돈을 다 벌면 중국 가서 양로원 꾸릴 생각이야."

"양로원은 왜?"

"나그네한테 정신 팔려 시집과 본가편의 노인들을 잘 못해드렸어. 후에는 빚구럭에 빠져 그랬고, 노인들이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니까. 노인들도 멋있게 살수 있는 놀이터, 도서실...여하튼 멋있게 만들 자신이 있어."

"그래서 양로원을 하려구요?"

"바보, 좋은 마음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 사업해? 중국은 지금 양로원 하면 돈 번다니까. 노인이 많은 나란데, 아이 하나만 낳으니까 노인은 점점 더 많아질 거라. 젊은이들 노인을 맡길 곳이 없어하잖아. 노인들도 젊은이들 눈치보지 않고, 당신들끼리 친구하며 사는 곳이 있기를 원할거야. 된다니까, 꼭 잘 될거야."

그녀의 눈이 돈을 볼 때의 모습이 저것이 아닐까 싶다. 눈빛이 강렬했다.

그녀는 정말 돈벌기능수였다. 중국을 가나 한국에 있으나 그녀 눈에는 돈만 보인다고 했다. 한국문화가 들어오면서 중국의 음식점들도 위생물수건을 썼다. 그 수건을 수만장씩 도매가 29전(한국돈 60원)에 사서 한국에 메고 와, 한국 돈 150원에 넘기면 한번에 한국돈 수백만원을 벌었다. 싼 한국천을 중국에 실어다가 집에 쌓아놓고 저울로 떠서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때밀이수건 수만장을 중국돈 2원(한국 돈 150원)에 사서 한국 돈 500원, 또는 800원에 넘겼다. 그렇게도 한번에 수백만원씩 벌었다.

"정말 바보다. 어떻게 한국을 글쎄 빈손에 온단 말이냐? 아무거라도 가지고 와서 돈을 만들어야지!"

나를 보고 답답해했다.

"삼장사도 난 멋있게 해. 삼을 말이야, 가져올 때 이것이 돈이다, 라고 생각하면 어떤 방법을 대서라도 세관을 넘는거야. 장뇌삼을 팔아 돈 많이 벌었어."

삼장사를 하다 보면 이산삼을 믿지 않는 한국인들이 많다고 했다.

"그건 양삼이 둔갑한 거야. 가짜야!"

"아저씨, 이리 오세요." 라고 해놓고 옥자는 멋있게 설명을 했다.

"아저씨, 장뇌삼은 산삼을 옮겨서 키운 이산삼이예요. 삼은 산신령이 봐줘서 나는거예요. 삼이 있는 자리는 그래서 뱀도 얼씬하지 못하는 거래요. 아저씨, 이담부터는 절대 삼을 욕하지 마세요. 산신령이 노염을 타요. 삼을 욕한 사람은 아무리 삼을 먹어도 병이 낫지를 않아요. 삼머리도 사람과 같은거니까요, 손을 씻고 만지세요. 남자들은 소변을 보고 손을 씻지 않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얼토당토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그녀의 화술은 감화력이 있었다.

삼을 천뿌리를 가져다가 1,2,3등으로 나누어놓고 좋은것은 25만원, 괜찮은것은 세뿌리에 35만원씩, 나쁜것은 몇만원에 한 뿌리씩 불렀다. 남은 겨우 몇만원씩 받을 때 그녀는 십여만원, 어떤것은 이십여만원씩 받았다. 장뇌삼은 중국에서 한 뿌리에 25원 , 50원짜리도 있고 백원(한국 돈 1만3천원)이 되는것도 있다. 모양과 크기에 따라 값이 달랐다. 삼장사군들은 머리가 갸름하고 목이 길고, 몸매가 늘씬하고, 뿌리들이 섬세하고 단단하고 방울이 맺힌 것을 좋은 삼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삼은 그 모양이 사람을 닮았다 해서 사람에 대한 심미관으로 그 표준이 확정되는상 싶다. 삼을 고를 줄을 알았기에 옥자의 삼장사는 언제나 7~8배, 십배의 이윤을 보군 했다. 중국은 삼이 흔하기는 해도 먹는 사람들이 적다. 녹용도 마찬가지이다. 고혈압, 뇌출혈 등 부작용이 겁나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삼이거나 녹용 등을 특별히 좋아하며 병에 대한 치료보다는 병나기 전의 보양에 더 신경을 쓴다. 이해할수 없는 점은 체질에 관계없이 삼을 마음대로 복용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가 있기에 저렴한 중국삼이 끊임없이 한국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어떻게 다시 나왔습니까? 불법체류자는 컴퓨터에 찍혀 다시 못 나오게 될 텐데?"라고 물었더니 그녀가 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세상에 어디 길이 한 갈랜가?"

옥자는 짓꿎은데가 있었다. 배짱이 세고 성칼스럽고 때로는 의리도 있고 그러나 위태한 점도 있었다. 돈을 보는 눈이었다. 언젠가 연길에서 노인들에게 따뜻하고 안온하고 즐거운 양로원을 꾸린 그의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녀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자정이 지나 1시 40분이 되고 있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