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집**
서울에 들어서면 우선 셋집을 잡는 게 중요했다. 지하철과 가깝고, 요금이 싸고, 조선족들과 함께 있을수 있는 집이 나의 요구였다. 합숙하려고 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취재단서가 많을 수 있다. 둘째,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셋째, 여자끼리 합숙해야 오해를 덜 살 수 있다. 한국에 다녀온 여자들에게는 도색뉴스가 쉽게 생기므로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넷째, 워낙 담이 작아 집에서도 혼자 자는 밤이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나와 있는 동서와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까지 총동원했지만 셋방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여러곳에서 전화는 왔는데, 합숙할 셋집을 찾기 힘들다고 했다. 한국에 나온 지 오래된 여자들은 합숙하기 싫어하고, 나온 지 오래되지 않은 여자들은 다 합숙상대가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연길에서 안 지 오래됐던 김선생의 도움을 받아 겨우 셋집을 찾았다. 김선생은 구의동 2번출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1993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대전엑스포에 참가하러 왔던 동생이 마중을 해서 동생의 셋집으로 갔을 때,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낙후한 중국에서도 구경하지 못했던 초라한 셋집이었다.
"이곳은 후암동이라고 부르는데요, 옛날에는 홍등구였고, 참 치안이 안좋아요. 명예상에도 이런 곳에 산다고 하면 안 좋은 곳입니다. 옮기셔야 하겠습니다."
같이 안내했던 석상준 사장이 머리를 저었다.
검은색 기와를 얹은 낡은 한옥이었는데, 집안 동쪽에 이불 한채를 펼 만큼 한 방 네개가 있었다. 사람이 둘이 지나자면 어깨를 모로 세워야 할 정도로 비좁은 복도를 마주해 있었다. 그 서쪽에 주인들이 기거하는 방과 공동화장실이 있고, 북쪽에 빨래, 세수를 할 수 있는 물방이 있었다. 서쪽의 비좁고 가파른 널 층계를 오르면, 윗층에 또 성냥갑마냥 작은 셋방 일곱개가 있었다. 신문지로 대강 도배한 방들, 마주한 셋방들은 다 미닫이였는데, 쇠줄로 된 열쇠고리로 간신히 작은 자물쇠를 잠글 수 있었다. 동생이 기거한 방은 두쪽으로 된 창문이 길을 향해 있었는데, 문걸이도 없어 밖에서 뙤창문으로 뛰여들어가 열쇠를 꺼낸 적이 있다. 셋값은 한달에 10만원이었다. 셋집이 싸기 때문에 중국조선족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밤이면 괴상하게 짙은 화장을 한 할머니들이 달밤에 다리를 쪽 펴고 앉아 끄덕끄덕 존다. 지나가는 남자들을 보면 번쩍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끌었다. 그때 동생은 떠날 준비를 하느라고 밤이면 내 손을 잡아끌고 남대문시장으로 가군 했다. 새벽장을 보러갈 때나 돌아올 때면 늘 그런 정경을 보군 했다. 동생은 나보다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좋아 항상 자기가 언니행세를 하군 했다. 새벽잠에 취해 눈까풀도 바로 뜨지 못하는 나를 잡아끌고 남대문시장을 일주했다. 저 할머니들이 왜 저러냐고 물었더니 집에 몸파는 아가씨들을 감추고 남자들을 끌어들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골목길을 지나다닐 때면 나와 동생을 훑어보는 할머니들의 눈길이 이상하게 끈끈했다. 나는 삼십대였고, 동생도 금방 이십대를 졸업한 나이였으니 한창 젊었을 때이기도 했다.
주위환경이 불안한 데다가 셋집 분위기도 불안했다. 대부분이 조선족들이지만 그중 한국인들도 일부 있었다. 셋방 맞은켠 방에 한국인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들었는데, 아내는 밖에 나가 일하는 모양이고, 남편은 매일 집에 있었다. 어느날 애와 아내가 나가자, 남자가 미닫이를 열어놓고 내가 있는 방을 흘끔거리며 나체의 남녀가 뒹구는 포르노비디오를 보았다. 그 눈길이 끈끈하고 징그러웠다. 방에 있을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이미 밤이었는데, 남대문파출소앞에 이르자 한 남자가 바싹 쫓아왔다. "아가씨, 제발 화끈하게..."라고 확확 화기에 단 목소리로 지껄여대는 통에 정신없이 셋집으로 뛰어왔다. 동생이 중국으로 돌아가자 곧 방을 안암동쪽 대학생 민박집으로 옮기고 말았었다.
그때 일을 상기하며 나는 이번 셋집은 어떤 집일까, 라고 생각했다.
구의역 2번출구에서 김선생과 만났다. 길역에 구두병원, 잡화상, 삶은 옥수장사들이 늘어섰다. 썩 후에 강원도에 있는 한국친구가 사줘서 옥수수를 먹어보았는데, 우리가 연변에서 먹던 옥수수와는 많이 달랐다. 연변 찰옥수수는 노란 황금색인 데 비해, 이곳 한국의 찰옥수수는 옅은 미황색이였고, 우리가 먹던 옥수수와 달리 찰기가 적고 고소함보다는 달큰한 맛이 더 있는 것 같았다.
한참 있으니 동쪽 골목으로부터 셋방 여자가 나타났다. 첫눈에 얼굴이 낯익었다. 틀림없이 연길 사람이다. 손바닥만한 연길이기에 스쳐 지나기만 했을지라도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낯익어지군 한다. 키가 자그마하고 뚱뚱한 편이고, 숱이 많은 머리칼이 억센 느낌을 주는 오십대의 여자였다. 첫 만남에서 그녀 성격이 남자같이 직통이고 날카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의역에서 동쪽으로 5분가량 걸어 들어갔다. 떡집, 세탁소, 슈퍼를 지나서 오르막길에 들어섰다. 깔끔한 주택구였다. 붉은색의 작은 단독층집들이 줄줄이 섰고, 은빛 혹은 검은빛의 꽃무늬가 새겨진 철대문들이 거창했다. 한 검은 철대문에 이르러 연길 여자(나는 어느새 이렇게 믿고 있었다.)가 문을 밀자, 붉은색의 벽돌건물이 ㄱ자형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좋은 집도 셋집일까?)
주제넘은 생각이였다. 작은 뜰안에 꽃화분과 빨래대가 놓여있었다. 뜰안 서쪽에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변소라고 소개했다. 여자는 붉은색 건물 지하층계에 들어섰다. 따라서 내려가 보니 반지하에 작은 방이 네개 있었다. 동쪽에 마주한 두 방에는 한국인 남녀가 들어있고, 중간 방에는 어느 식당에서 일한다는 조선족 여자 둘(한번도 보지 못했다.)이 들어있었다. 제일 서쪽방이 그녀의 방이었는데, 2평이나 될까말까 했다. 가구와 냉장고가 있었고, 커다란 체경과 텔레비죤수상기가 있었는데, 전부 낡은 것들이였다. 구석켠에는 커다란 검은색 배낭이 세개나 쌓여있었다. 첫눈에 중국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일요일이면 식당에 다니는 여자들이 번갈아 와서 자고 가오."
정신준비를 하라고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취재대상들이 많아 은근히 기뻤다.
나는 주방을 돌아보았다. 이런 셋집에 단독주방이 딸린 것이 다행스러웠다. 곁방에는 주방이 없었다. 싱크대옆에 수도물이 있고, 타일을 깐 공간이 있어 몸은 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은 시름을 놓았다.
"왜 혼자 있을거지, 혼자 있으면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합숙하려 하오?"
뜻밖에 그녀가 묻는 말이었다.
"녀자니까, 합숙하면 말썽도 없고 좋잖습니까? 난 담이 약해서 밤엔 혼자 자지 못합니다."
"아직 서울 물을 적게 먹었군. 이제 오래 있으면 혼자 있고 싶어질 거야."
그녀가 확신적으로 말했다.
"왜요?"
"글쎄 있다 보면 알 거야."
나중에 한 말이지만 그녀 말에 의하면 한국에 오래 있은 조선족 여자들은 각자 다 이성친구를 사귀기 때문에 함께 있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사전에 김선생을 통해 셋값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왜서인지 세값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불쑥 이렇게 묻는다.
"왜 저 사람과 방을 잡아달라고 하지 그래?"
그녀가 턱으로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한국인 김교수를 가리켰다.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왜 터무니없이 남에게 바가지를 씌우겠습니가? 그 분이 나에게 방값을 대줘야 할 이유도 없는데요?"
후에야 나는 그녀가 나를 김교수의 애인쯤으로 추측하고 세값을 더 많이 받으려고 시탐한 줄을 알게 되였다.
"여기서는 이렇게 같이 다니면 다 애인인 줄로 생각한다구."
그녀는 나에게 한가지 상식을 더 가르쳐주었다.
나는 셋값 15만원(방값 10만원, 가구ㆍ취사도구 사용비 5만원) 에 물세, 전기세, 가스비 등은 같이 내기로 합의했다.
한국체류 조선족 취재생활은 이렇게 셋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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