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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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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냐"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2>

***영사관 앞의 자리세**

비자는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9일에 나오기로 되었고, 대신해서 찾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나는 21일에 또 왕복 열아홉시간의 심양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주일사이에 기차를 거의 마흔 시간을 타는 셈이다. 이번에는 비자만 찾으면 되니까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침 기차에 심양에 도착해 비자를 찾고, 점심 열두시 비행기로 떠나려고 생각했지만, 경험자의 권고에 의해 노선을 바꾸었다. 그렇게 했더라면 크게 손해를 볼 뻔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이야말로 진리였다.

지금도 이해할수 없는 부분은 비자를 오전에는 절대로 내주지 않는 것이다. 오후 두시부터 발급했다. 아무리 열흘전의 비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심양-서울행 비행기는 아침 여덟시와 점심 열두시경에 있다. 심양에 도착해 오전에 비자를 찾고, 점심에 서울로 떠나는 코스를 정하려 한다면 그건 심양 영사관 생리를 몰라서 하는 판단착오이다. 반드시 여관비를 준비해 하루 묵어서 가야 한다.

중국은 규정에 의해 출국자는 비자를 낸 여권으로 국가은행으로부터 2천달러를 살 수 있다. 그런데 당지 은행에서만 살 수 있다고 정해져서 불편했다. 2천달러면 당시 국가가격과 암시장가격 차이가 8백원정도가 되었다. 중국의 경제수준에서는 한달 월급에 해당되는 괜찮은 수입이고, 심양 2차왕복의 기차표값과 택시비가 나오는 돈이다. 나는 연길에서 기차로 떠나 장춘세관을 통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비자를 오후에 발급했기에 비자를 찾는 사람들마다 조급한 정서를 보였다. 이튿날에 떠나는 사람들은 여관에 둔 짐이 근심스러워 조급했고, 다섯시의 심양-도문차로 돌아갈 사람들은 차시간 전에 찾지 못해 애매한 여관비와 시간이 들까봐 조급해했다. 득을 보는 사람들은 당연 심양 한국영사관 문지기들과 자리거간꾼들이었다.

점심 열두시경에 나는 영사관 앞에 도착했다. 연길에서 떠날 때 만난 할머니가 내몫까지 줄을 서주겠다고 했으므로 나는 심양백화에 가서 출장에 필요한 물건을 샀다. 할머니는 심양지리에 익숙하지 못해 차에서부터 근심하던중 나를 만나 기뻐했다.

할머니덕분에 나는 기차에서 차입쌀인절미며 소고기쫄임을 맛있게 먹었다. 노인은 63세였고 며느리와 딸 둘이 한국에 가 일한다고 했다. 아들 둘과 사위, 손자손녀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노인이었다. 이렇게 많은 연세에 어떻게 한국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자기는 한국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 위장결혼을 간 딸이 초청서 두장을 해보냈는데, 비자만 나면 그것을 한장에 만5천원(한국 돈 2백만원 가량)씩 주고 판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 한국에 가서 벌지도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앉은자리에서 3만원 벌고 나앉을 예산이라고 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자를 팔다니! 이름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생년월일...뭐든지 다 다를텐데!

노인이 내몫으로 다섯번째 자리를 차지했으므로 이번에는 자리세 30원을 내지 않고도 일찌기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오산이였다. 비자를 찾는 줄과 비자신청을 하는 줄이 있었는데, 자리세거간꾼들이 영사관 문지기들과 함께 짜고들었다. 앞자리에서 공공연히 돈을 받아먹고 자리를 양보하는 바람에 뒤의 사람들이 다 앞에 와서 돈을 내고 먼저 들어갔다. 자리세는 처음에는 계속 50원세를 보전하더니 나중에는 10원으로, 그러다가 성미가 급한 사람을 만나면 불쑥 50원으로 올라가군 했다. 괘씸하여 터무니없는 자리세는 절대 안 낼거야, 라고 고집하며 참았다.

나의 앞에 돈을 50원을 낸 이십대의 여자가 섰다. 연길에서 온 이 여자는 다섯번째로 비자신청을 했다고 했다. 결혼수속이라고 했다.

사람들 속에서 원성이 터졌다. 왜 차례대로 들여보내지 않느냐, 라고 소리쳤다. 돈을 내고 앞에 선 사람들과 티격태격 마찰이 생겼다. 문지기직원은 대뜸 질서를 유지하는 엄격한 얼굴이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옆에 비죽이 나와 선 사람은 확 잡아당겨 뒤에 끌고가 세우거나 한바탕 욕설을 퍼붓군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자리세를 낸 사람을 들여보냈다.

겨우 내 차례가 되여 들어갔더니 영사관 사무실 안은 벌써 50여명이 서있었다. 잠깐후 내 뒤에도 돈을 냈다는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그러니 자리세거간꾼들의 호주머니로 얼마나 많은 돈이 흘러들어갔을까? 오후 네시에는 영사관에서 떠나야 저녁차를 탈 수 있는데 자칫하면 차시간을 놓칠지도 모른다. 나는 돈 30원을 아꼈다가 크게 밑지는구나, 라고 한탄했다.

한창 속을 바질바질 태우는데 다행히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동포문학세미나에 참가하려고 한국경유 비자신청을 온, 나의 상급을 만났다. 영사와 사정해 나는 첫사람으로 비자를 찾았다. 여전히 화를 잘내는 그 남성직원이었으나 나에게 비자의 도장을 확인해주는 등 여간 섬세하고 상냥하지가 않아 나는 공연히 오스스 소름이 끼쳤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맞붙은 눈썹, 날카로운 콧날, 충혈된 입술 등 신경질적인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에게 인기였던 이유**

비자를 받아 쥐자 곧 연길할머니가 근심되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줄을 서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가면 이 할머니를 누가 심양역까지 안내할까? 그렇다고 그 할머니를 기다리자니 자칫하다가는 심도행 저녁기차를 놓칠 것 같다.

차에 올라서도 나는 그 이름을 모르는 연길할머니가 걱정되어 찾아보았다. 할머니의 인절미와 소고기를 먹어서가 아니였다. 두 사람의 비자를 찾으러 심양까지 왔으면 분명히 돈도 속곳주머니에 챙겨넣었겠는데, 지리에 어둡고, 한족말도 모르는 할머니가 어느 불량한 택시기사에게 속으면 어쩌랴 싶었던 것이다.

나는 침대바곤(침대칸)을 차례로 여러번 훑었다. 할머니는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실망하고 있을 즈음, 한 40대의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연길할머니를 찾지 않느냐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진짜 귀신같은 사람이다. 어떻게 알았냐, 라고 물었더니 내가 심양에 비자수속을 하러갈 때부터 유심히 살펴보았었다고 했다. 남자에게 인기라는 생각에 잠깐 기뻤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로 접근한 의도를 알게 되자 곧 어이없어지기도 했다.

그 남자는 앞장에 서서 연길할머니를 찾아주었다. 할머니는 순조롭게 비자 둘을 찾아 속곳의 붉은색 돈주머니에 넣고 제시간에 차에 오른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돈 3만원은 땡땡 굳게 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할머니에게 안내했던 남자가 나더러 자기한테로 가서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나의 침대로 가자면 그의 차바곤을 지나야 했다. 맥주를 함께 마실 여흥은 없으되 자진해 할머니를 찾아준 고마움때문에, 그리고 심양으로 갈 때부터 유심히 살펴보았었다는 그 고마움(?) 때문에라도 잠시 그의 침대에 앉기로 했다.

그는 철도국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가끔 승무원들이나 승경들과 인사를 하군 했다. 80년대 후반까지도 철도국에 있다고 하면 꽤 인기였었다. 기차부족으로 침대권이 긴장했기 때문이였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어려운 청을 드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가짜공무수속을 하잼둥?"

그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그는 나를 사업자로 보았고 좋은 파트너로 생각했다. 자기 주위에 한국에 돈벌이를 가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 연줄이 있으면 같이 '사업'을 하자는것이다. 어찌하여 나에 대해 그런 상상력이 발동된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는 한국에 공무출장을 하는 사람은 대개 한국에 연줄이 있으며, 연길할머니는 내가 수속해준 사람이고, 비자를 받기 위해 심양에 안내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철도국남자는 내가 인절미와 소고기를 먹은 빚 때문에 할머니를 관심하는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별볼일이 없는 할머니를 그처럼 관심한다고는 더욱 생각지 않을 것이다.

***돈 없는 북한엔 쌀이 나가고, 돈 많은 남한엔 노동력이 나가**

오해라는 것이 판명되자 우리는 한참 웃고 나서 맥주를 한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연길에 돌아오자 곧 중국인민은행에 가서 달러를 사서 팔아 8백원을 챙기고 장춘코스를 택했다. 비행기표는 2백원가량 더 비싸지만 대신 기차로 가는 길이 더 가까웠다.

장춘세관에서 뜻밖에 나는 또 한번 소설을 꺼내들었다. 세관직원이 여권, 신분증과 나를 찬찬히 대조해보더니 신분증과 사람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내 짐을 끌어냈다. 그 직원이 남쪽사무실에 들어갔는데 한참 지나자 상급인듯한 사람과 함께 나왔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엄한 표정으로 내 나이를 물었다.

그제야 나는 문제의 요점을 알 수 있었다. 하얀 운동복차림을 한 내가 실제나이보다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 얼굴보다 더 좋은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설명도 설명이 될 수 없었다. 심양 한국영사관에서 내 소설을 보자고 했던 일이 생각나 곧 짐을 헤쳤다. 역시 소설이 나를 증명해주어 무사통과령이 내렸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심양 한국영사관에서 미리 공부를 시켜준 듯한 고마움(?)까지 느꼈다.

6월 27일, 나는 마침내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냐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경우는 한국수속이 가장 간단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힘들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한국수속은 그 얼마나 많은 곡절을 겪었겠는가? 다 같은 한반도지만 북조선 수속은 이렇게 힘들지 않다. 북과 남의 차이는 돈없는 나라와 돈많은 나라라는 점이다. 돈이 없는 나라에는 쌀이 나가고, 돈이 많은 나라에는 노동력이 나간다.

노동력이 나가는 나라에 대한 수속은 언제나 까다롭다. 어느 나라든 자기 나라 돈을 벌어다가 다른 나라에 가서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자기 나라 돈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흘러들어오기를 원한다. 수요되는 인력만큼 입국시키는 것이 그 나라 자위가 아니겠는가! 미국이란 나라는 세계 수많은 후진국은 물론, 한국인에 대해서도 입국을 통제한다. 미국에 비하면 한국이 대단한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해보면 한국도 원망스럽지 않다. 수속이 까다로운 괴로움은 후진국에 사는 사람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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