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드림을 위해 한국을 찾은 중국조선족들의 애환을 그린 장편 현지르포를 오늘부터 매일 연재한다.
필자 리혜선(李惠善)씨는 신문기자 출신의 조선족 작가로 지난 2000년 한국에 와 수개월의 취재 끝에 이 르포를 써냈다. 이 르포는 지난 2001년 중국 연변에서 <코레안드림 - 한국에서의 조선족들>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된 바 있다. 편집자
***한국행의 명분**
2000년 6월14일 밤 아홉시차에 나는 심양 한국영사관으로 한국행 수속을 하러 떠났다. 이번은 한국문인협회 초청으로 되는 두번째 한국행이다. 한국 출판사측에서 이 책의 집필과 관련해 왕복비행기표를 선대한다는 조건부가 붙었기때문에 이번 한국행은 훨씬 쉽게 이루어졌다.
나는 두달 전에 걸려왔던 낯설은 여자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이제는 낯설지 않고 성격으로 남은 그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그녀 때문에 한국문인협회에서 초청해준 한국행에 중요한 계획이 생긴 것을 내심 기뻐했다. 그녀 때문에 명분이 생긴셈이다.
지난 3월, 연길 날씨는 아직도 쌀쌀했다. 북경에 있는 한 친구가 소개를 해서 전화했다는 그녀는 중국조선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서울말을 잘했다.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은데요. 시간을 내실 수 있겠어요?"
우리는 여러번 시간을 맞추고서야 연길빈관(賓館) 커피숍에서 만났다.
당시 나는 한창 작가 직함과 관계되는 외국어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였다. 놓은 지 18년이나 되는 일본어다. 머나먼 기억의 저편에서 "사요나라", "오겐끼데스까" 등의 짤막한 구절 몇 개만이 떠오를 뿐이였다. 시간에 쪼들려 있었으므로 그녀와의 만남이 썩 달갑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북경친구가 바로 북경사회과학원 연구원으로 있는 장춘식이였고, 역시 잘 지내는 문우였으므로 체면상 만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를 만나고 나자 나는 곧 그녀에게 두번째 만남을 요구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였다.
가무레한 얼굴에 원색에 가까운 옅은 화장을 해서 화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밝은 밤빛의 길다란 장발이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 30대의 나이에 맞지 않게 그녀 표정은 담담했고 말소리도 조용했다. 웃을 때면 검은빛이 나는 사환소이발이 드러났고, 그사이로 가끔은 발음이 좋은 중국말이 불쑥불쑥 튕겨나왔다.
그녀는 한국에 시집을 간 서울 모 여행사 사장 김금화씨였다. 두번째 취재는 이틀이 지난 날 저녁 여섯시에 연길동방관에서 불고기를 먹으며 있었다.
동방관은 연길 중심인 서시장 남쪽에 위치해있다. 이 거리를 사람들은 한국의 명동거리요, 자본주의거리라고 불렀다. 90년대 초반에 한국의 노래방문화가 가장 빨리 들어와 자리했고, 다방, 사우나, 레스토랑, 안마원 등 유흥장과 음식점 등 서비스업이 가장 빨리 발전했던 곳이다. 주위에 큰 호텔들이 있어 관광하러 온 한국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최초로 한국 노인들에게 동동 매여달린 아가씨를 구경할수 있었다.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한국흉내를 가장 빨리 낸 곳이다. 최근에는 한국상품시장으로는 가장 큰 성보빌딩, 태화빌딩이 들어섰고, 북조선에서 꾸리는 삼천리랭면집 등이 들어서서 십년사이 이곳의 부동산값도 놀라울 정도로 올라있다.
동방관은 초창기에 서울 요리사가 주방장을 했고, 불고기가 서울맛을 닮았다 해서 한때 민간에서는 한국손님 초대 필수음식점으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그녀와는 동방관에서 불고기에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는 계속 길어져서 다방에까지 이어졌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나보다는 십여년 어린 여자였지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의 이런 노력을 글로 써서 한국사회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
이것이 그녀가 나를 만난 의도였다.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나는 이 글의 '결혼한 여자들의 이야기' 부분에 쓸 것이다.
나는 한국에 시집간 중국조선족 여자들의 이야기를 취재해 소설로 쓰고 드라마로 만들고 싶은 생각에 속이 달았다. 나는 이 새로운 계획 때문에 며칠이나 들떠있었다. 계획은 자칫 권태에 빠지기 쉬운 나의 생활에 지속적인 활기를 부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계획은 점차 부풀어져가서 한국에서 결혼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 중의 한 부분만 차지하게 되었다.
***신기한 암호 - '왕쑈밍'**
심양 남쪽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6시가 지난 후였다.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다가 뜻밖에 언니의 생전 친구였던 지언니를 만나서 기뻤다. 한 바곤(wagon: 기차의 열차칸)에 타고 왔음에도 서로 몰랐던 것이다. 지언니는 머리를 꼬실꼬실하게 지지고 연보라빛 적삼에 까만 스커트를 입고 목이 긴 검은 구두를 신었는데, 언제 봐도 40대 후반의 여자답지 않게 생기에 넘쳤다. 가버린 언니 생각이 났다.
"령사관은 일찍부터 줄을 서야 당날에 신청할수 있다던데요? 신청이 끝나고 오후 다섯시 차에 돌아갈수 있겠는지 모르겠어요."
"근심하지 마, 내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알려주면 안돼."
지언니가 신비하게 말했다.
지언니는 연길에서 가방가게를 차리고 한국 가방을 들여오기도, 자신의 공장에서 가방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한번 한국에 가서 한 보따리 메고 오면 왕복여비를 떼고도 중국 돈 만원은 쉽게 번다고 했다. 한국에서 샘플을 많이 사서 중국시장에 맞추어 만들어 팔아도 수입이 짭짤하다고 했다. 워낙 나의 언니와 한 공장에 근무했던 지언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택시비 10원을 내고 영사관에 이르렀다.
화평리에 있는 한국영사관은 벌써 수백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대사관거리에 가서 줄 선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가면 바로 한국영사관이라니까."
떠나기 전에 누군가 귀띰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영사관거리에 있는 미국, 일본 등 대사관 앞은 줄 선 사람들이 고작 십여명이였다. 분위기도 한국영사관과는 달리 조용했다.
아침의 태양이 9시가 되자 벌써 열기를 발산하며 사정없이 내리쪼였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직사광이 중국 서장보다도 북방지구에 더 심하다고 해서 심양 여자들은 다 양산을 쓰고 다녔다. 자전거를 탄 여자들은 얼굴에 투명한 수건을 쓰거나, 어깨에 수녀복처럼 넓은 가운을 걸쳐, 멀리에서 보면 나방이나 잠자리 같았다.
문앞에는 하늘빛 반소매 제복을 입고, 머리에 검은 색 채양이 달린 모자를 쓴 관리인원 서너명이 지켜섰고, 줄을 선 수백명의 사람들이 폭양에 노출된 채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듣던 소리와 같이 제복을 입은 관리인원들이 사납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짠뚜이, 짠뚜이! 부짠뚜이꾼이밴취!(줄을 서시오, 줄을 서시오, 서지 않을 사람은 물러가시오!)"
죄인을 다스리는 것 같은 그들의 언행은 둘째치고, 무시로 터져나오는 쌍욕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쩍하면 달려와 사람을 콱 밀쳐놓거나 눈을 부라리며 욕했다. 줄을 선 사람들은 굴욕적인 표정으로 눈치를 보며 줄을 잘 서려고 애를 썼다. 자칫하다가는 쫓겨나 맨뒤에 가서 다시 줄을 서야 하기 때문이다.
"넌 내 뒤를 아무 말 말고 따라와야 한다."
지언니가 소곤거렸다.
나는 이처럼 삼엄한 문을 어떻게 뚫고 들어가랴 싶어 반신반의했으나, 오랜 장사경험이 있는 지언니는 낯빛 하나 변치 않고 문지기들 앞으로 걸어갔다. 줄을 선 수백명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9층에 가서 왕쑈밍을 찾아 일을 처리해야겠어요."
지언니가 말했다.
'왕쑈밍'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떤 암호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통과되었다. 들어가 보니 널다란 홀이였는데, 직원 한 명이 문을 마주한 테블에 앉아 있었다. 넓은 층계가 반달형의 호를 그으며 이층으로 이어져있었다. 영사관은 11층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잽싸게 층계로 올라갔다. 이층에는 비행기표 판매예약, 전화, 팩스, 복사 등 업무를 취급하는 상무(商務)사무실이 있었다. 우리가 금방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오더니 나와 지언니를 아래층으로 떠밀었다.
"왜 그러세요? 우리는 정상적으로 들어온 사람이에요."
덜미를 잡힌 도적놈처럼 조금은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당신들은 이층에 와서 비행기표를 산다고 거짓말하고 영사관으로 올라가는 거지?"
거짓말은 했지만 비행기표를 산다고는 하지 않았었다.
"아닙니다, 우린 9층에 가서 왕쑈밍씨를 만나야 합니다."
나는 지언니와 함께 아래층으로 끌려가면서도 낯도 코도 모르고 이 세상에 있는 존재인지 부호인지도 모르는 '왕쑈밍'을 무슨 호신부처럼 외워댔다.
그처럼 어렵게 통과했던 문밖으로 밀려나갈 순간이 왔다. 뒷덜미를 잡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분명 죄인취급을 받으며 압송되고 있었다. 지언니는 결사적으로 '왕쑈밍'에게 매여달렸다. 한족말로 소리쳤다.
"우린 왕쑈밍을 만나러 왔는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쫓아내는거요? 당신들 증명 서세요, 우린 왕쑈밍을 만난다고 했잖아요, 비행기표를 사러간다는 말은 안했잖아요!"
문지기 직원이 우리 말이 맞다고 해석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증인으로 나서주어 고맙기까지 했다. 아니면 우리는 땡볕에 줄을 서서 몇시간이고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저녁 다섯시 심도선을 타지 못하게 된다. 애매한 여관비를 팔면서 내일 다시 이 지루한 줄서기를 거듭해야 하는 것이다.
"언니, 왕쑈밍이란 사람이 정말 있는 거예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긴장한 사건을 치르고 헐레벌떡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물었다.
"나도 몰라!"
지언니의 대답이였다.
***양떼**
영사관앞에 면담을 오는 수백명의 사람들은 대개 네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첫번째 부류는 공무였다. 이들 중에는 공무원, 무역인, 기업인, 문화예술인 등이 있었다. 4차 이상을 한국에 다녀오면 비자수속이 간단하고 그 자리에서 비자가 나온다고 한다. 이 부분의 사람들은 5% 정도밖에는 안된다.
두번째 부류는 비지니스(商務)였다. 장기비자를 내고 보따리장사를 해 짭잘한 수입을 보면서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들이다. 비교적 부유한 계층으로서 5%도 안 될 것이다.
친지방문이 세번째 부류, 그러나 순수한 친지방문은 많지 않을 상 싶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이다. 한 고령의 할머니가 부축을 받아가며 층계에 겨우 올랐다. 이 분이야말로 친척방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외 팔다리가 성하고, 일할 기력이 있는 사람들은 친지방문도 하고, 돈도 벌 것이다. 중국의 경제수준에서 비행기표값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돈 벌 곳을 찾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비법체류자로 되는 길밖에는 없는것이다.
네번째 부류는 국제결혼이였다. 이 속에는 물론 위장결혼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결혼수속을 해주는 한국남자에게 돈을 7백만 내지 천만원을 주고 하는 수속이다.
순수하게 돈을 벌러 가는 사람이 다섯번째 부류이다. 이 부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들중 연수생은 대부분 단체수속을 하기 때문에 면담을 오는 사람들이 적다. 5월경에 연길에서 20~30대 연령의 연수생을 모집했는데, 그들은 자기 돈을 5만원 낸다고 했다. 지정된 회사에 가서 지정된 월급(한국인보다 절반 낮은 월급)을 받고, 지정된 시간(1년부터 3년 사이)을 일하고 돌아오면, 그중 2만원은 돌려 받는다고 했다. 돈을 벌러 가는 사람들중 연수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짜 공무초청, 가짜 '한국사위'의 초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돈을 7만5천원(한화 천만원)씩 낸다.
11층에 올라가면 곧 수속을 하는 줄로 알았는데, 영사관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의 11층 엘리베이터 앞의 작은 공간에 또 길다란 줄이 있었다. 줄은 그 아래층의 층계까지 뱀처럼 길다랗게 흘러내렸다.
신분증과 여권을 보이는 순서였다. 무장경찰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테이블 앞에 앉아 신분증과 여권을 조사해 기록했고, 그 곁의 경찰은 높다란 걸상에 올라서서 줄을 감시하는 한편 그것을 넘겨받아 또 한번 확인했다. 경찰에게서 여권과 신분증을 넘겨받은 사람은 영사관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신분증과 여권을 검사맞히고 문을 여는 순간, '촉도의 길 험난하여라' 라는 당시가 떠올랐다. 200평방미터가 될까말까 한 방안에도 2백명은 넘어보이는 사람들이 석줄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 화기(火氣)와 땀냄새가 진동했다. 무작정 앞사람을 따라 중간줄에 섰다. 약속시간과 약속번호를 등록하는 줄이었다. 양쪽으로 길다랗게 앉은 두 줄은 안의 비자신청 창구에 들어가는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였다. 비자신청 창구로 통한 문어구에 한 한족 여성직원이 앉아 서류들을 검사했다. 빠진 것이 있으면 퇴짜를 놓고, 빠진 것이 없으면 안의 빈 창구에 들여보냈다.
나의 차례가 되자 30대의 한족 남성직원이 물었다.
"몇시로 약속했습니까?"
영사관에 전화로 약속한 시간을 묻고 있었다.
"9시입니다."
"몇번입니까?"
"54번입니다."
직원이 기록부를 살펴보더니 등록을 하고는 다른 줄에 가서 서라고 했다.
남녀 두 직원이 번갈아 신경질을 부렸다. 서류들이 너무 많아 질문할 일이 많았다. 비자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전부 조선족인데다가, 3분의 1정도는 친척방문이거나 시집간 딸의 부모들이기에 나이가 많아 한족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들이 조선말에 한족말을 섞어 알아들을수 없는 질문을 해오면, 직원들은 얼굴을 찡그리고 신경질을 부렸다. 줄을서는 사람들이 맥이 진해 줄을 비뚤게 서도 신경질, 줄서기에 싫증난 사람들이 창구쪽을 가서 어슬렁거려도 신경질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욕하기는 했지만 어렵사리 여러 고비를 통과한 이 좋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나지막한 소리로 웅얼거릴 뿐, 줄은 줄대로 열심히 섰다.
남자직원은 얼굴이 하얗고 턱이 뾰죽했고 코날이 날카로웠다. 짙은 눈썹이 안쪽으로 모여 있어 워낙 성격이 퍅해보였다. 소녀처럼 빨간 입술이 신경질로 충혈된 듯 싶었다.
"저렇게 매일 신경질을 부리면 간장이 잘못될텐데."
나는 자기 정서를 통제할 줄 모르고 화만 내는 젊은 나이의 그가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줄을 선 사람들이 더욱 불쌍해 보였다. 나 자신을 망라해 모두가 능욕을 감내하는 양떼들 같았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진 사람들이냐? 개새끼들!"
마침내 어느 양이 소리를 질렀다. 60세는 될상싶은 시골차림의 남자였는데, 술을 좀 마신 것 같았다. 남자직원이 그 남자를 잡아 문쪽으로 끌었다. 남자가 더욱 소리소리 질렀다.
"왜? 내가 탯줄을 묻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뭐가 잘못돼서 굽실거려야 하냐! 무슨 죄인취급이냐, 이 새끼!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노무새끼, 뭐가 잘못됐단 말이냐?"
그 사람은 비자신청을 이미 했고, '비자가 언제쯤 나올 수 있냐', 등을 물어보았었다. 발음이 안 좋아서 직원이 알아듣지 못하자 소리를 높였는데, 그 남자직원이 다짜고짜 그를 내쫓은 것이다. 이 노인은 진짜 친척방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수속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야단쳐도 죽은 듯이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후 그 남자는 제보를 받고 들어온 무장경찰들에 의해 어디론가 압송돼가고 있었다. 공무방해죄에 걸린 모양이다.
점심에 문우 윤정삼씨, 전정환씨, 그리고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정창호텔 사장 고향순씨가 기다린다고 전갈이 왔지만 나는 전혀 식미가 없었다. 영사관에서는 서류요구사항에도 없는 엉뚱한 요구로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많은 증명서류들을 가지고 갔지만 초청직장 설립허가서와 나의 소설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한국문인협회와의 연락이 잘 안돼 초조했다. 국제통화비만도 2백여원을 썼다. 나의 책이 심양서점에 있을지 없을지는 운수에나 맡길 일
이었다. 두가지중 어느 한가지가 안돼도 비자신청이 접수되지 않을 것이었다.
다행히 친구 윤정삼씨가 택시로 '심양일주'를 해서 나의 장편소설 한 권을 사왔다. 밥을 먹고 영사관으로 갔을 때 나는 또 한번 질렸다. 나는 이미 여러가지 검사를 거쳤고, 보충서류만 제출하면 그만인데, 비자신청서류도 제출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또다시 처음부터 줄을 서라는 것이였다. 곧 비밀무기 '왕쑈밍'이 떠올랐지만, 두번이나 써먹으면 혹시 탄로라도 날까봐 망설였다.
이때 나의 팔을 툭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40대의 강마른 자그마한 한족남자였다.
"우스콰이(오십원)?"
나는 대뜸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50원을 내면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얼스콰이(이십원)!"
나는 흥정을 했다.
"뿌싱뿌싱, 싼스콰이(삼십원)!"
마침내 싼스콰이로 흥정이 끝났다. 이어 뚱뚱한 한족남자가 왔다. 수군거리더니 나더러 돈을 내라고 했다. '너희들이 먼저 돈을 호주머니에 넣고 나를 상관하지 않으면 어떡하느냐', 라고 했더니 자기들을 믿으라고 했다. 믿지 않으면 어떡하랴. 시궁창에 던지는 셈치고 10원짜리 석장을 넘겨주었다. 돈을 받은 뚱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마른 한족남자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그마저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면 눈을 펀히 뜨고 돈 30원을 뜯기는 것이다. 마른 남자의 눈빛이 반짝하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니쮸숴마이페이지표!(비행기표를 산다고 말하시오, 빨리 들어가시오!)"
나는 반신반의하며 경계가 삼엄한 문쪽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줄을 선 사람들 쪽을 향해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콰이! 콰이! 궈이훨쮸뿌관라!(빨리! 빨리! 좀 지나면 다시 상관 안할테니까!)"
등뒤에서 마른 남자가 독촉했다. 나는 재빨리 문쪽으로 다가갔다.
"마이페이지표!"
나는 비밀암호를 외우듯이 짧게 나직이 말했다.
"찐취바!(들어가시오!)"
나는 튕기듯이 문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행히 한국문인협회 설립허가서가 팩스로 와 있었다. 허가서 팩스본과 나의 장편소설을 비자신청 창구에 들이밀며 나는 직원아가씨에게 말했다.
"영사에게 말하세요, 대한민국 외에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작가더러 소설을 가져오라는 나라가 있느냐 말이에요!"
이때 곁에 서있던 50대쯤 보이는 한국남자가 켕겨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도 가짜 공무신청이 많아 그래요. 이해하세요."
"영사관에서 일을 잘 못하는거예요. 필요한 서류를 확실하게 규정해야지요. 신분에 따라 작가는 작품을, 공정사는 설계도면을, 주방장은 요리를 가져오라 할겁니까? 저의 작품도 다행히 심양에 있었으니 말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또다시 연길에 갔다와야 하는거 아녜요!"
"그건 좀 너무 했군요, 그렇지만...이해하세요!"
한국인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쯤에서 나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가짜 공무초청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니까.
***필자 리혜선씨 소개**
1956년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1982년 연변대학 졸업. 1989년 북경 노신문학원 수료. 연변일보사, 길림신문사 기자, 부주임(차장) 등 역임. 현재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중국 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위원
저서로는 <푸른 잎은 떨어졌다>(중국 북경 출간, 중편소설집) <폭죽놀이>(한국 출간, 아동소설) <야경으로 가는 여자>(중국 흑룡강성 출간, 창작집) <빨간 그림자>(중국 연변 출간, 장편소설) <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한국 출간, 장편 르뽀)이 있다.
전국 제5기 소수민족문학상, 전국 제7기 소수민족문학상, 제4기 연변작가협회 문학상(소설부문 최우수상), 흑룡강 신문사 장편 공모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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