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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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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46>

음양 오행과 과학

음양 오행을 연구하는 사람은 과학이란 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독자 중에 혹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필자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화두이다. 오래 전부터 이 이야기를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이 칼럼에서 필자는 가급적 독자들이 읽어서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들을 다룬다는 생각이지만, 오늘의 글은 다소 사변적이다. 그래서 머리나 좀 식혀보려고 클릭하신 분이라면 읽는 도중에 좀 딱딱하다 싶은 분은 언제든지 나가셔도 필자로서는 전혀 유감이 아니란 말을 드리고자 한다.

필자는 과학이란 말은 반기지만, 과학적이란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과학적이란 말은 오늘날 지나치게 오용되고 남용되어 마치 종교의 부적처럼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적이란 말을 들으면 ‘아, 좋은 거구나, 옳은 거구나’하고 단정지어 버린다. 그래서 과학적이란 말을 먼저 늘어놓고 다음 설명에 들어가면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이미 판단이 긍정적으로 변해 있다. 이는 사실 지독한 비(非)과학이고, 무속보다 더 심하다.

과학의 본질이 무엇인가? 과학의 본질은 그 방법론에 있다. 사물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해서 모종의 결론을 내리고-이를 가설이라 한다, 이 결론에 입각해서 다시 사물의 현상을 들여다보고 실험 내지는 예측을 통해 맞는지를 확인한다. 틀릴 경우, 기존의 결론을 엎어버리거나 아니면 수정하여 보다 정교한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이것이 과학의 방법이다. 따라서 과학은 결코 절대의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전제로 한다. 모든 주장은 가설로서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또 다른 주장이 나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학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얘기에서 하나 빠진 것이 있다. 사물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해서 모종의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하는 일인데, 그 일은 바로 모든 관찰과 기초 자료를 수치화 한다는 것이다. 수치화 되지 않는 모든 관찰 기록이나 자료는 결국 과학의 영역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통 과학의 방법론이다. 이 지점이 과학과 여타 다른 학문이 갈라서는 지점이다. 수치화라는 것은 결국 양화(量化)의 개념이다. 따라서 양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물론 오늘날 사회과학이라고 해서 사회 현상을 다루는 분야가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사회를 다룬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관찰 못지 않게 가치의 개념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서 가치의 개념이 아니더라도 수치화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개재되는 바람에 아예 엄두가 나질 않는 연구 대상도 많고 오히려 그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과학이란 용어를 쓰는 것은 정치적이고도 사회적인 현상 내지는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래, 너희들도 과학적이고 싶다 말이지, 좋아 그게 대세이니 따라오렴. 어쨌든 그래야만 우리도 추종자가 생겨서 힘이 더 불어나는 법이니 말이야.’하는 생각에서 나온 절충 또는 협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회과학자의 연구실도 실험실을 뜻하는 ‘lab'이란 용어가 더 일반적이다. 혹 사화과학도가 계셔서 이 글을 읽고 불쾌하시더라도 우선은 너그럽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그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주실 것으로 믿는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분들은 경력을 쌓아가고 좀더 솔직히 말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한 처지에 놓인 분들이다. 사실 오늘날은 철학에 대한 수요가 없는 탓에 철학사(哲學史)는 존재해도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신문지상에 ‘알기 쉬운 철학 이야기’, 이와 유사한 타이틀의 책이 소개되곤 있지만 과연 얼마나 팔릴 것인지 댁도 알고 필자도 안다.

철학이 아닌, 그나마 철학사라는 것도 그러면 어디에서 숨을 쉬는가? 인문대학의 철학과 안에 있다. 극히 미미한 숫자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졸업하면 다른 직종을 찾아 나선다. 철학을 써주는 직장은 대학의 가르치는 자리 외에는 거의 전무하고 일부 문예 전문의 출판사에서나 그나마 받아준다.

그렇다고 철학이 스스로를 철학과학이란 명칭으로 둔갑할 수는 죽어도 없다. 원래 과학이 자연철학이라고 해서 철학의 한 분파에서 발전해 나왔는데 이제 와서 굶어 죽을지언정 철학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 이쯤에서 정리하면 오늘날 학문으로서 제법 번듯한 시장이 있고 수요가 있는 분야는 XX 과학, 즉 과학이라는 접미사가 붙지 않으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실 정통 과학이 아닌 인문과학 중에서 그나마 잘 나가는 경제학도 잘 해야 통계를 다루는 기관이나 아니면 증권회사에서 브로커들의 장사를 돕는 애널리스트가 기껏이다. 그래도 이는 나은 편이고, 가령 정치학 전공은 그저 열심히 토익 시험 보는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법학이나 경영학 등은 그런 대로 공무원 시장도 크고 일반 기업의 수요도 있는 편인데 이는 일종의 기술학이기 때문이다.

왜 필자가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이는 오늘날 과학이란 것이 본질에 있어 강력한 종교로 자리잡았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보다 ‘과학적’이란 말이 훨씬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나아가서 과학이 하나의 종교적 힘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오늘에 와서 사물의 다른 면을 궁구하는 학문은 더 이상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사물의 다른 면이란 무엇인가? 바로 양에 대응하는 개념인 질(質)이다. 사물에는 양으로 나타낼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이를 질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양화를 전제로 하는 과학의 영역밖에 놓여 있다. 그런데 과학은 종교의 자리를 차지했고, 과학의 대상이 아닌 사물의 질적인 면을 연구하는 분야는 사실상 종교적 이단의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이단에 대한 처벌은 과거 기독교의 마녀사냥 식의 처벌은 아니고, 시장(market)이라는 수단을 통하는 보다 부드러운 방법(soft kill)을 쓴다.

근대 과학의 선구자로서 인정받는 뉴턴은 그러나 자신의 연구 속에서 사물의 질적인 측면 역시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룰 ‘도구’가 없기 때문에 양에 관한 연구만을 다룬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명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고 한 것이다. 이는 과학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수학의 발전 테두리 내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치화 또는 양화를 위해서는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야 하기에 과학의 극한은 언제나 수학의 극한 아래 어딘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는 고급의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고급의 수학을 원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도 논문을 작성할 때, 열심히 미적분 수식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수학을 거의 원용할 필요가 없는 학문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날 학문의 세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주류 학문은 수학과 과학, 그 응용인 공학이 첫째고, 일반적으로 전통 인문학에 속하는 철학과 역사, 문예가 두 번째고 다음으로 법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사회 응용기술이 마지막이다. 이중 가장 수요가 큰 분야가 공학이고 다음으로 사회 응용 기술 부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권위는 과학이 차지한다.

수학은 과학의 실질적인 종주이지만 의외로 수학자들은 배가 고프다. 수학은 저 높은 올림포스산 정상에 있는 바람에, 과학자들이 바치는 제사 음식으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이며, 일반인들은 아예 수학자들도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전통 인문학자들 역시 상아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떼어놓기 어려운 지경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른바 제도권 학문에 속한다.

그럼, 이제 필자가 매일 다루고 있는 음양 오행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된 것 같다. 음양 오행에 관한 탐구는 현 시점에서 제도권 밖, 즉 먼 변방의 미미한 북소리요, 아파치족의 토마호크 돌도끼에 불과하다. 그러나 필자는 바로 이 변방의 황량한 산 동굴에서 광맥을 발견했다. 최소한 그랬다고 믿고 있다.

음양 오행에 관한 탐구는 오늘날 사라져버린 질에 대한 탐구에 있어 가장 첨예한 최전선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음양 오행을 연구한다고 해서, 서구의 과학 문화를 배격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문화는 그 고유한 광채와 매력을 지니기 마련이고, 서구의 과학 문화 역시 대단한 매력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에 당연히 수용한다. 다만, 과학이 서구의 중세 기독교처럼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양을 다루지 않는 모든 탐구를 배척하는 그 배타성을 거부할 뿐이다.

음양 오행의 논리 체계는 비록 서구 과학의 견지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어 보일지 모르나 이는 공평한 평가가 될 수 없다. 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지식이 필요한 데, 이 전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음양 오행이란 것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를 말하면 더욱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대학 1학년 교양 철학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유명한 학자였다. 강의가 마칠 무렵 우연히 필자와 이런 대화가 오갔었다.

“교수님, 동양 철학이란 것이 어떤 거죠? 흔히 사주나 역술이란 거요.”
“이놈아, 그것은 미신이지 뭐야.”
“그럼 교수님은 그것을 공부해 보셨나요?”
“이놈아, 내가 왜 그걸 들여다 보냐.”
“그러면 교수님은 공부해 보지도 않으셨는데, 미신이라 하니 그것은 동굴의 우상 아닌가요?”
“아니, 이놈이, 이런 버르장머리가 있나!”

이 바람에 필자는 교양 철학이 F학점을 받았고, 썸머 스쿨로 때워야 했다. 무더운 여름 방학 때 보강을 끝내고 귀가하다가 필자는 종로 서점을 들러 ‘사주학 개론’이라는 책을 한 권 샀다. 몸소 읽어보고 미신인지 아닌지 판단해 봐야지 하는 생각이었고, 그것이 필자가 이 방면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필자는 음양 오행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음양 오행이 장난이 아님을 알게 되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필자가 음양 오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것이 일종의 수학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양을 다루는 수학이 아니라, 질을 다룰 수 있는 수학이라는 점이 기존의 수학과 다른 점이었다. 수학이라는 명칭 자체가 수는 양을 뜻하는데 무슨 수학이냐 하겠지만, 광의의 수학은 반드시 수를 다루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 예로 집합론을 예로 들고자 한다. 집합에 속하는 원소는 구체적인 사물, 또는 추상적으로 생각된 것이라도 무방하며, 단지 명확히 규정될 수만 있으면 된다. 음양 오행은 집합론과 비슷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다만 명확하게 규정하는 방식에 있어 서구인들의 인식 체계에 들어있지 않은 요소를 다루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필자의 속내를 이제 좀 더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음양 오행과 수학은 인류가 다듬어낸 최고의 지혜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다만 음양 오행은 동아시아라는 문화적 공간에서 생겨난 것이고, 수학은 고대 바빌론과 이집트 문화로부터 고대 그리스로 이어지고, 서구적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난 지혜의 체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음양 오행이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 여전히 일종의 신비학 내지는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그것은 간단히 말해 모르는 사람들, 진지하게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 음양 오행은 동아시아 문화가 만들어낸 문화적 정수이고 학문 체계지만, 근대 서구열강의 위력 앞에 모든 것이 서구화되는 오늘에 와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특히 음양 오행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탐구를 신비학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예측한다는 것이 그다지 신기한 것은 아니다. 로켓을 발사할 때 탄도물리학자들은 몇 초 뒤에 로켓이 어느 지점을 통과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이처럼 음양 오행도 자신만의 독특한 논리체계를 통해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무얼 그리 신기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사실 납득이 가지 않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옳은 것은 저절로 힘을 지니는 법이다. 제도권 내에 있든 바깥에 존재하든 그것은 시대적 상황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 그 자체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음양 오행은 머지 않은 장래에 수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상을 내다보고 변화를 이해하고 대비할 수 있는 대단히 유용한 도구로서 자리잡을 것임을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음양 오행적 표현으로 정리하고 싶다.
수학과 과학은 물의 정신이고, 음양오행은 불의 정신이다. 물과 불은 생명을 성장 발전시키는 기본인데, 물만으로 만물이 발전해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너무 축축하기만 하다, 오늘의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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