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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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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1>

위를 보아 아래를 살폈던 사람들 - 천문ㆍ역법 (2)

먼저 천문(天文)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얘기해보자. 지금도 천문학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지만, 과연 천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文)은 무늬나 형태를 뜻하는 문(紋)과 통한다. 따라서 천문이란 하늘이 생긴 모습이나 형태에 관한 학문이다. 즉, 하늘의 형상에 관한 것이란 얘기이고, 줄여서 천상(天象)을 다루는 학문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서양 문명에서 천문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서양의 천문학은 원래 astrology 였는데, astrology 는 그대로 점성술로 남고, astronomy 는 천문과학이 되었다. 계측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규범이나 규칙을 뜻하는 라틴어 'nomos'를 나중에 가져다 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출판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동설을 제창하기까지 근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과 이슬람 문명권의 대표적인 천문학 교과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 였다. (almagest 란 말은 아랍어 al-mjsty에서 온 것으로서, al 은 정관사이고, mjsty 는 '위대한'이란 의미)

알마게스트는 유클리드의 "기하원론"과 함께, 계량화와 수학적 명증성을 특징으로 하는 서구 과학 문명의 양대 보전이라 할 만한 책이다. 또 기하원론은 증명(demonstration)을, 알마게스트는 검증(testing)을 중시함으로써 오늘날 서구의 과학문명은 사실상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알마게스트의 저자 프톨레마이오스는 AD 100 년경, 로마 시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수리천문학자였다. 당시 그곳은 로마 제국 최대의 도서관이 있었던 곳으로서, 지성적 풍조가 강했으며, 최초의 기독교 신학 역시 이 도시에서 움텄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론적 철학의 두 분야(물체를 다루는 물리학과 신의 영역을 다루는 신학-기독교 신학이 아니다)는 지식이라기 보다는 추론(guesswork)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theology)은 그 보이지 않고 손에 잡을 수도 없는 성격으로 인해, 그리고 물리학(physics)은 물체의 불명확성과 불안정성으로 인해 모든 철학자들간에 의견의 일치를 볼 희망이 없다. 오로지 수학만이 그 추종자들에게 확고부동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이처럼 서구 과학 문명의 정신적 토양을 제공한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런데 점성술에 관한 책도 남겼다. 어찌 보면 최고의 과학적 정신을 지녔던 이가 점성술 책을 남겼다는 사실이 의아해 보일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에 대해 하나는 태양이나 별들의 위치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고, 다음 것은 천체가 인간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혹시, 이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나 기하학 수준이 별 거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하시는 독자들이 있을까 싶어 얘기인데, 책 속에 제시된 그의 천문과 기하에 대한 논리 전개는 워낙 어려워서 필자 역시 읽기를 그만두고 다시 유클리드의 기하원론에 손을 댔다가 아예 포기했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일러둔다.)

덧붙여서, 서양 천문학의 발달에 있어 재미난 사실이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이를 뒷받침할 관측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를 데이타로 뒷받침함으로써 천문학의 혁명을 가져온 이는 덴마크의 천문학자이자 케플러의 스승으로 더 유명한 티코 브라헤 였다.

그런데 이 사람과 그 제자 케플러는 모두 당대의 실력있는 점성술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케플러의 법칙' 역시 케플러가 점성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점, 코페르니쿠스에 이어 지동설을 확립한 갈릴레오도 점성술을 더 연구하기 위해 일부러 교회 첨탑에 잇는 다락방으로 은거했던 사람이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당시까지 서양 천문학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브라헤의 다음과 같은 말속에 잘 나타나 있다. "Suspiciendo despicio-By looking upwards, I see below." 위(하늘)를 봄으로써 나는 아래(인간사)를 본다는 말인데, 이는 천문을 살핌으로써 세상사를 예측한다는 동양의 천문과 역법 사상과 정확하게 동일한 말이며,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사기를 썼다는 사마천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그러면, 다시 동아시아의 천문과 역법으로 돌아간다.

천문이 천상(天象)에 관한 학문이란 것은, 음양 오행이 물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이나 물체(줄여서 사물事物)의 상(象)을 말한다는 데 기인한다. 가령, 오행의 목화토금수 중에서 목이 나무라 해서 산이나 들에 자라는 나무만이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상을 띄는 모든 일과 물체가 목에 배속된다는 사상이 음양 오행 사상이라는 것을 간단히 말해 두고자 한다.

따라서 천상을 다루는 학문이 천문학이고, 그보다 더 상위의 원리로 자리잡은 음양 오행은 우주와 인간 모두를 통괄하여 하늘의 상에 대응하는 지상과 인간 세계의 상을 밝히고 그것들간에 감응하는 원리를 통해 인간사를 예측하자는 것이 동아시아 천문학의 기본 의도였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 유산으로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그 기록은 왕의 일들을 정말 성가실 정도로 곁에서 따라 다니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것인데, 왜 임금은 그토록 앵벌이같은 스토커들을 그렇게 둘 수 밖에 없었을까?

왜 젊은 사관의 무례한 간언들을 그냥 듣고만 있었을까? 이는 앞에서 얘기했듯이 천인감응의 사상에 의해, 왕의 일거수 일투족이 그냥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늘이 그에 반응하여 칭찬하기도 하고 천벌을 내리는데 특히 가뭄이나 홍수가 질 경우 그 피해를 백성이 입게 되기에 철저히 기록하여 항상 조심하고 삼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 중국에서 전대의 왕조사를 기록 편찬하는 일은 대단한 국가의 중대사로서,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기록 그 이상의 일이었다. 그것은 왕조, 특히 황제나 왕의 정치에 대해 하늘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피는 일이며, 한편 후대의 통치자들로 하여금 앞의 일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근신하고 경계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준엄한 역사의 심판이고 하늘의 심판인 것이다.

현재 중국 정부는 아직 청사(淸史)를 편찬하지 않았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적당한 시간적 거리를 두고 공정하고도 엄밀한 평가를 내리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하늘의 심판을 전하는 대리자이다. 역사는 청사(靑史)라고 한다. 푸른 대나무 조각에 기록해서 청사가 아니라 영원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심판의 칼날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사를 공식 편찬한다는 의식마저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저 이재황씨가 프레시안의 지면을 빌어 조선왕조실록과 외롭게 씨름하고 있다. 탄식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이제 하늘의 상을 살핌으로써 인간사를 밝혀보자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을 외계로 보내는 세상이 되었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사실은 변한 것이 없다. 미국이 그 많은 돈을 들여 아폴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목성과 화성 등지에 얄랑한 쇳덩어리를 보내는 일을 하는 이유가 뭘까? 물론 천체물리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신난다. 그러나 그 일이 과연 인간의 지식욕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로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통일장 이론 운운하고 거대한 입자가속 충돌장치를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일의 본질적인 의도는 그들만이 신과 교류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세계 만방에 그들의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신호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이집트나 중국의 천문학자들이 천문과 역법을 살핀 것은 왕조의 힘을 과시하는 금단의 비의(秘義)였듯이, 오늘날 영미의 물리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제자들로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금단의 언어, 즉 수학을 통해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오늘날 천심을 대변하는 것은 이제 자연 재해보다는 민심이 되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천심과 직결되는 민심을 우리는 투표를 통해 확인한다. 그런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주의 체제는 그들의 원 발명품인 대의 민주주의를 양당제(이는 사실 짜장면 아니면 짬뽕인 식으로서 양당제는 대의 민주주의를 원천 봉쇄한 것이며, 사실상 대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사망했다)로 고착시켜 버리고, 투표보다는 시장을 통해 천심을 확인하고 있다. 모든 국민을 연금기금이라는 장치를 통해 시장에 묶어 버리고, 다우와 나스닥 지수를 통해 하늘-그들에게는 '신'이 되겠지만-의 뜻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마음(市心)은 천심도 아니고 민심도 아니다. 자본이 조직화되기 전까지는 시장이 하늘의 뜻을 반영했던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아담 스미스는 시심(市心)을 신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프레이즈로 표현했다. 2000 년전 동중서가 음양 오행을 통해 유교혁명을 일으켰듯이 그는 국부론을 통해 자본주의 혁명을 가져왔다.

하지만, 자본이 고도로 조직화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자신의 연금을 수탁받아 관리하는 기금이 대주주로 둔갑하여 구조 조정의 논리를 앞세운 채, 자신을 직장에서 내쫓는 이상한 논리가 상식화되는 세상. 이윤 추구로 환경 파괴를 서슴지 않고 전 세계 여기 저기에 전쟁과 앙화를 불러일으키는 냉혹한 자본의 정신이 제대로 하늘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시심(市心)이 전심(錢心)으로 둔갑한 것이다. 맑스가 경계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지난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이 전심(錢心)을 경계하라고 그만큼 경고했건만, 오늘날의 전심은 최근 제국주의의 개량 소프트 버전(version)인 '글로벌리즘'이라는 교묘한 논리로 위장한 채 천심과 민심에 역행하고 있다. 머쟎아 재앙이 내릴 것이다!

다음 번에는 역법에 대해 좀 더 얘기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지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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