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장중경의 변증논치에 관한 얘기를 했다. 전한(前漢) 말기(AD 200 년경) 사람인 장중경에 의해 확립된 변증논치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한의학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기본적인 접근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방에서 사람의 병증을 다스릴 때 중요시하는 것이 병증이 실이냐 허냐 하는 것이다. 실(實)이란 일종의 항진 증세로서 기능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것이고, 허(虛)란 기능이 취약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명리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어떤 사람의 사주팔자에서 태어난 날의 오행이 목이라 하자. 그러면 목생화로 상생하는 화가 있어서 그 사람의 의욕이 되고 활동력, 표현력이 되는 것인데, 사주 속에 물이 너무 많다면 오히려 화를 눌러서 사람됨이 어질기는 하나 결단력이 떨어지고 우유부단한 면이 나타난다. 바로 수기가 지나친 탓에, 즉 실증의 증세가 나타나서 그 사람의 건강도 그렇고 적극성이 떨어지는 폐단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 지나친 수기를 누를 수 있는 토의 기운을 운에서 만나야 그 사람이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방의 허실이나 변증논치적인 접근법은 명리에서 사용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필자는 내경을 읽거나 여타 한의학 서적들을 읽다 보면 한방 이론인지 명리 이론인지 사실 구분이 가질 않는다. 그 정도로 동일한 사상과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의학의 발전과 관련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주역 참동계(周易 參同契)'라는 도가(道家)의 경전이다. 후한 말의 위양백이란 도사가 지었다고 하는 이 책은 오늘날의 기공, 맥학, 침구, 운기학 방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이다. 이 책은 노장사상과 신선 사상, 음양오행 사상이 결합되어 훗날 도교의 소의 경전이 되었다. 주된 내용은 단(丹)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주역 참동계라는 책 제목은 주역(실은 음양오행)과 황로학, 그리고 단약 제조술이라는 세 가지 도가 하나로 귀일되므로, 세 개가 하나, 즉 삼동(參同: 參의 음은 '참'과 '삼' 2가지임)이라는 것이다.
단에는 내단과 외단이 있는데, 내단이란 수행을 통해 몸 속에서 기를 기르는 방법, 즉 양생술과 기공술의 원조이며, 외단이란 바로 약물을 통한 방법이다. 외단 사상은 훗날 약물학의 원조인 중국 남북조 시대의 도홍경이 저술한 '신농본초경'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도홍경은 약물학만이 아니라, 음양오행(陰陽五行) 역산(曆算) 지리(地理) 물산(物産) 등에 밝았고, 양나라 무제의 신임이 두터워서 산중 재상(山中 宰相)이라고 불리운 인물이며,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도홍경을 세계 4대 과학자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하고 있다.
주역 참동계의 사상은 인간의 정신기(精神氣)와 화후(火候)란 것을 강조하는데, 화후란 양생에 있어 계절의 변화에 따른 기의 늘어나고 줄어듬(이를 소식消息이라 하는데, 변화라는 어의가 새로운 것이란 뜻으로 변해서, 우리말속에서 '누구로부터 소식이 왔다'는 어휘로 쓰이고 있다)을 의미한다. 정신기와 소식은 명리학에서도 핵심 이론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온난한습을 나타내는 조후(調候) 이론은 청나라 중엽에 생겨난 '궁통보감'이라는 명리서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사실 주역 참동계와 명리학의 연관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지만 이쯤해서 그치기로 하고, 오늘날의 한의학에 관해 하고픈 얘기를 좀 해두고자 한다.
책방에 가서 한의학이나 동양 의학에 관해 일반인들을 위한 책이 꽤 있는데, 조금 읽다 보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한의학은 음양오행 사상이 이론의 뼈요 골수인데, 좀 고명하다는 한의사나 한의대 교수님들도 자신 없는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런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서구 문명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했던 계몽사조의 폐해라 할 것이다.
우리 한의학이 아직 그 주체성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몇 가지 사례를 들고자 한다. 녹용은 대표적인 보정 강장제이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녹용을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약효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연 녹용의 효과는 좋다고 믿기 때문에 나타나는 효과, 즉 위약 효과(pseudo-medicine effect)에 그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서구 사람과 동아시아 사람과는 체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음양오행상 방위로 볼 때, 서구 사람들은 냉습한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 체질적으로 신장의 기운이 기본적으로 강하다. 그래서 모두 타고난 정력가들이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 사람, 특히 중국인들은 선천적으로 체내에 수기가 부족해서 신장 기능이 약하다. 중국 사람, 특히 남방계 사람치고 치아가 튼튼한 사람이 없다. 모두 신기 부족이다.
정리하면 스칸디나비아 반도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냉습한 지역이라 한의학 이론으로 말하면 정신기 중에서 특히 정(精)이 강한 사람들이라 녹용이 필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많이 복용하면 해로울 수 있다. 반대로 그 사람들은 신(神)이 약해서 심장병이 많다. 하지만 동아시아 사람들, 특히 중국인들은 신장 기능이 약한 편이다.
그러나 동방 목의 지역에 속한 한국인들은 신장도 약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위 기능이 약한 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소화제나 위장약 천국이다. 당연히 위암도 발생률이 높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수기가 지나치게 강한 탓에 전립선 암이 대단히 많다.
또 하나 예를 들겠다. 요즘 양방에서는 환자가 열이 심하면 겨울이라도 찬 물로 샤워를 시킬 만큼 일단 열을 내리고 본다. 하지만 크게 잘못 되었다. 서양인들은 체질이 원래 찬 편이라 찬 물로 열을 가라앉혀도 별 탈이 없지만, 한국 사람 체질로는 잘못하면 한기가 스며들어 고질병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 여인들은 출산후 몸을 매우 따뜻하게 유지해야 하지만, 서구 여인들은 출산후 바로 찬 물로 샤워해도 아무런 병이 생기질 않는다. 체질의 차이다.
이 모두 기후와 풍토에 따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체질이 다르고, 그에 따라 의학 이론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점을 명확히 짚어낼 수 있는 것은 한의학밖에 없다. 그렇건만 아직 우리 한의학계는 이런 문제들을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거기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해도 길이 열리는 데 지금 우리 한의학은 양방 흉내내기 일색이니, 얼마나 우리 문화가 스스로를 부정한 채, 위축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요즘 문화라 하면 으레 영화와 같은 유흥(entertainment)이나 기타 고상한 차원의 것인 줄 아는데 그런 게 아니다. 문화란 바로 그 문화권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문화가 다르면 그에 따라 기초 학문도 달라지고, 그에 따른 응용 기술도 달라지는 것이다. 흔히들 수학이라 하면, 문화와는 상관없이 절대적인 진리 체계를 다루는 줄 알지만 수학 역시 문화가 다르면 수학의 주 관심 방향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수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문화가 우월하고 저쪽이 열등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서구의 색안경을 끼고 우리 문화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의학과 명리학의 연관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는 음양오행이 동아시아 문화 전체를 관류하는 뿌리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첫 단계였다. 다음에는 음양오행 사상이 동아시아 미술이나 문학, 학문, 수학, 정치, 사회, 등등의 모든 하부 분야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차례로 얘기함으로써 음양오행이라는 것이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 있는지, 나아가서 동아시아 문화의 전반이 음양오행을 통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혀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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