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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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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4>

음양오행설 어디서 왔나

사주 명리학의 기본 이론 체계인 음양오행설은 사주 명리학뿐만 아니라 중국문명,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가 없이 동아시아 문명을 이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나 결과도 그것은 바깥사람의 인상(Image)일 뿐, 동아시아 문명 속으로 들어가 그 심층 결구를 들여다 본 것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인이란 동아시아 문명을 접하는 서구의 학자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한국에서 태어나 우리말을 쓰면서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는 국사학자일 수도 있다.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없이 동아시아 문명을 연구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서 기독교를 알 뿐, 그리스 사상을 모르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유교와 음양오행은 중국 문화의 양대 지주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수 역할을 맡은 공자의 가르침은 이미 중국 진한 시대에 와서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유학자들 역시 음양오행을 그들의 기본 이론 체계로 받아들였다.

유교가 중국 문화의 상층에 자리잡았다면 음양오행은 중국 문화의 기층을 이루고 있다. 유교가 중국 문화의 정신이라면 음양오행은 중국 문화의 몸이다.

음양오행설은 엄밀한 견지에서 중국 문화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서주(西周) 사람들이 동이(東夷)라 부르던 사람들로부터 기원하고 있다. 따라서 유가의 경전인 주역(周易)과 음양오행과는 그 기원이 다르고 이론 체계도 다르다.

그래서 사주 명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역술인(易術人)이라 부르지만 물론 틀린 말이다. 아울러서 무속(巫俗)과 사주 명리 또한 엄연하게 다르다. 무속은 음양오행을 넘어서 있는 인류의 오래된 문화이며 그 미치는 범위도 전 세계적이다. 우리 문화는 무속과 음양오행, 그리고 유불도(儒佛道)라는 세 가지 상이한 정신적 뿌리를 이어받은 상태에서 서구 문명과 조우하고 있는 셈이다.

서주 문화권 사람들이 동쪽의 활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붙인 동이(東夷) 사람들은 그러나 중국 문화의 형성, 발전에 있어 엄청난 자양분을 공급했는 바,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을 든다면 음양오행과 신선 사상이다.

훗날의 도교는 이 두 가지가 나름대로 결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처럼 중국 문화의 기층을 이루는 음양오행 사상은 한 사람에 의해 주창된 것은 아니며, 그 기원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대다수 학자들이 음양오행설을 가장 먼저 제시한 사람으로서 ‘추연’이라는 동이 출신의 방사(方士)를 꼽고 있지만 추연 역시 완전한 형태의 음양오행 사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며, 정확히 말하면 음양 사상과 오행 사상도 연원이 다르고 오행 사상 역시 그 속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후에 정리되었다. 그러나 학자들간에 합의를 보고 있는 것은 음양오행 사상이 중국의 한나라 시대에 들어서는 거의 종합된 형태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음양오행 사상이 유가의 기본 이론 체계로 들어온 것은 전국 시대를 거쳐 진한(秦漢)에 의해 통일되었을 무렵 유교적 가르침은 지리멸렬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바, 동중서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의 사람들이 제왕의 통치학으로서 춘추 공양전에서 제시된 대통일 사상과 함께 당시 이미 주된 사조로서 자리잡은 음양오행 사상을 편입하면서부터였다.

그 이후 음양오행 사상은 중국 문화의 최상층부터 최하층에 이르기까지 그 절대적 위치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궁궐의 배치나 복식, 관제, 의전 절차, 나아가서 군사 편제 등등 모든 것이 음양오행이라는 틀에 기준하여 제정되고 운영되었으며 중국 문화가 외래의 불교에 맞서 위기감을 느낄 무렵, 새롭게 중국 문화의 혼에 활력을 불어 넣은 송대의 성리학 또한 음양오행 사상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탐구에 바탕을 두었다.

따라서 음양오행 사상은 당연히 우리와 일본, 남쪽의 베트남으로 전해져서 사실상 동아시아 문명과 문화의 핵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위치를 점한 음양오행 사상이 인간의 운명을 점쳐보는 운명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을 음양오행이라는 틀을 통해 예단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은 동한 시대의 사상가 ‘왕충’이 지은 논형(論衡)이라는 책 속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바 이를 정명론(定命論)이라 한다.

동한 말엽은 조조가 젊었을 무렵 유명한 관상가를 찾아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효웅’이란 말을 듣고 마음에 들어했다는 바로 그 시대이다. 오늘날 사주 명리학의 출발도 대략 이 때쯤이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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