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조치를 아는지. 박 대통령 때 대기업 빚 까주려고 1974년에 단행했던 조치지. 사금융 양성화를 위해 단자회사 설립근거를 마련하고 정부 출연의 한 기관을 만들었어. 그것이 '한국신용보증기금'이지.
이 기관의 탄생이야말로 참으로 깊은 시대적 의미가 있었어. 그 시대, 아니 그 이후 한국이라는 나라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야. 그게 무엇인가. '신용'이야.
한국의 어떤 기관도 필요한 것은 신용이야. 특히 금융기관은 말할 것도 없어. 기업도 마찬가지야. 가장 중요한 생존과 발전의 필요조건은 바로 신용이야. 이게 어느 관공서를 가나 정부기관을 가나 보장이 되어 있으면 국민이 맨날 정부를 욕할 리가 없지.
이게 확립되어 있으면 은행이 구멍이 나고 급기야 IMF라는 사태로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았을 리도 만무할 일이야. 기업도 신용이 요체 중의 요체야. 돈 꾸는 데 담보가 필요 없어. 시장과 고객을 무서워 할 것도 없어. 정치에 대입시켜도 마찬가지 이치야. 사회도 마찬가지야.
이 기관은 경제적 이유, 다시 말해 금융관행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지만 국가와 사회가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셈이야. 제대로 진화가 되었더라면 국가신용, 사회신용이 아마 상당한 수준이 되었을 거야.
그런데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지. 그 후 십 수년이 흐른 뒤 당시의 대통령 전두환은 "이 나라에 믿을 만한 기관이 딱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위에서 내려다보고 들여다보니 단 한 곳도 없더라는 푸념이었지.
세월은 그 말씀이 있은 지 거의 20년 가까이 더 흘렀어. 그리고 그 문제의 기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지점장들이 떼거리로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어. 이건 드문 사례야 . 과거에도 부정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한 두 사람이지, 이렇게 많은 보증기금 지점장들이 쇠고랑을 찬 일이 없어. 그러니 어떤 징후가 숨어있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자, 서두가 길어졌지만 이 기관에서 일어난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부패의 회로'와 패거리 의식과 은행부실과 궁극적으로 왜 국가부도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는가를 탐색해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야.
이 기관의 초대 이사장은 정재철이야. 강원도 출신으로 배재고-동국대 출신이지. 의리가 깊다해서 고교 때 별명은 '노틀담의 꼽추'지. 박통 시절 몇 개의 인맥 가운데 최강력 라인 가운데 하나였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계였지.
재무부 차관을 겨냥하고 있던 때라 당시 남덕우 재무부 장관은 껄끄러웠던 존재인 그를 어딘가 주요 포스트에 앉혀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가 초대 이사장이 된 배경이야. 정치적 결정이었지.
정부 설립 이래 수많은 기관들이 나타난 걸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데,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어.
하나는 새로운 기관과 조직이 만들어질 때 담긴 철학이 전 사회적으로 전파되지 못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조직의 우두머리를 항시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그 결과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사실이야.
쉽게 말해 새 기관 혹은 조직이 장래 국가사회에 어떤 진화의 암시를 담고 있는지 모두들 잊어버려. 그리고 그 우두머리는 그가 지닌 철학보다는 '빽'이라는 후견파워에 의해 결정되고 말아. 그리고 이것 또한 관행으로 묵인되니 돈 보따리 싸들고 뛰거나 동아줄, 쇠심줄, 보다 강한 끈을 찾아 헤매게 하는 거지. 이런 각도로 보면 정재철은 이 중요한 기관의 장으로는 철학성이 안 맞아.
수십년 후 우리는 한보사건 청문회에서 그 부적격성을 발견하게 돼. 정치자금 명목으로 거액의 뇌물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은 거 다 알고 있잖아. 사실 정태수와의 악연은 신보(한국신용보증기금의 약자) 창업 이사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한보주택은 취약한 신용상태에다 담보력이 있나. 은행돈을 빌려 쓸래야 쓸 수가 없지. 보증서가 필요했지. 신보의 정재철 이사장실 문을 두드렸어. 이런 저런 연줄에다 뇌물을 싸 들고 공격했겠지. 감이 익어 떨어질 만할 때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어.
신용조사 부장이 '부적격' 판정을 내리고 막무가내로 도장 못 찍겠다고 버틴 거야. 정재철이는 화가 났지. 조직의 관행으로는 버티다가도 우두머리가 꼭 해주려는 눈치면 적당한 논리를 세워 후퇴하는 법이거든. 그런데 조사부장 N이 버티는 거라. 이럴 경우에는 기회를 보아 우두머리는 자리를 바꿔버리거나 적당한 죄를 뒤집어 씌워 내쫓는 게 문법이지. 좀 공격적인 놈에게는 다른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하지. 말썽을 피하려는 노련한 수법이지.
그런데 이 경우는 조금 달랐어. 조사부장 N은 재무부에서 데리고 나온 창업 멤버라. 그래서 무리하게 보증서를 떼어주지 않기로 했지. N부장은 이렇게 말하더군.
"어느 조직이건 정치적 무리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지. 좀 보아주고 적당한 사례를 받고 하는 건 하나의 생산양식처럼 굳어있었어. 그러나 나는 '신용보증'이라는 간판을 단 국가기관까지 이런 관행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는 데 불만이 있었어. 딱 한 곳이라도 압력으로 안 되고 뇌물로 안 통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고 이사장에게 말했지.
그렇지 않아? 신용보증 한다는 기관의 신용을 못 믿게 되면 조직이 서 있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 아니겠어. 더구나 국가 비상조치를 통해 기업신용을 회복시켜주고 난 후 엄청난 의미를 담은 국가기관을 만들고 하는 짓거리가 새로운 특혜의 구멍이나 뚫어놓는 것이라면 볼장 다 본 셈이란 생각이었어."
하지만 정부조직이라는 것들을 보면 물론 시대적 역할과 경제 확산에 따른 필요성으로 세워져 그럴싸한 간판과 우람찬 빌딩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그 내부의 틀 속으로 들어가면 조직 혹은 기관 탄생의 철학은 매몰되고 지배세력들의 먹이사슬이 되고 있는 측면이 드러나곤 해.
어떻든 N부장은 한보 정태수의 신보 진입을 막았어. 나의 친구 N군이 정재철 이사장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지.
"이사장님은 쎄지요. 밖에서는 이후락 정보부장이 후견인일 정도로 정치적 배경이 간단치 않다고 하데요. 그러니 골치 아픈 부탁 많고 무리한 청탁도 밀려들 거라 생각하지요. 다 일사천리로 해결해 주어 '역시 정재철이야' 하는 소리 듣고 싶겠지요. 아니, 다른 정치적 배경이 약한 이사장이 왔더라도 무리하게 압력 받고 부패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이사장 자리의 '안보'가 흔들리지 않고 비자금이 마련되어야 여기저기 로비를 해 다른 자리로 영전을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여긴 아직 대기업이 얼씬거리지 않고 있습니다. 유망하고 열심이지만 담보 없어 낑낑 매는 중소기업에 신용을 제공해 은행돈 군소리 안 듣고 지원 받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의리의 사나이, '노틀담의 꼽추'가 멋있게 판을 지켜볼 만하지요. 빽을 믿고 소신 한번 펴 보는 겁니다. 웬만한 청탁 압력은 그 정도 정치적 배경이면 다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재철이가 있어 다 통한다'가 아니라 '정재철이가 있어 안 통한다'로 발상을 바꾸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권력, 그것이 국가권력이든 조직권력이든 혹은 기업권력이든 이런 메시지는 알아듣지만 '현실 지배의 교과서'는 따로 있기 마련이지. 청탁을 주고받고 이면 거래를 하고 조직과 부하에게 무리한 압력을 가하는 거야.
이사장이 N부장에게 또하나 무리한 주문을 한 건 이런 문법에 따른 결코 '적절하지 않은' 지시였어.
이번에도 N군은 '불가' 의견을 고집스럽게 고수했지. 알고 보니 문제의 X산업은 이사장의 동생이 하는 기업이라는 거야. 이사장은 불같이 화가 났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압력을 거두고 보증서를 떼어주지 않았어.
그러면 보증기구의 창립 이념이 그 후에도 고수되었을까.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거치게 돼.
다 알다시피 신보라는 기관에서 보증서 하나만 떼면 은행대출은 자동이야. 이 제도의 표면은 담보력이 약한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먹고 튀기'의 안성맞춤인 표적이지. 사업을 하다 망해 대신 은행융자금을 물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담보 안 들어가니 아주 작심하고 떼어먹고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신보의 기금은 수천억원씩 줄어들었어. 공적자금은 '공짜자금'이라는 인식이지.
이런 일이 있었어.
여성 국회의원 D의원은 자기 동생업체의 보증한도를 늘려달라고 압력을 넣었어. 대체적으로 국회의원의 청탁은 이사장 선에서 끝이 나. 그런데 이번에도 실무부장이 반대 의견을 이사장에게 제출했어. "모든 기준에서 미달이라 할 수 없다"는 의견이지. 이사장은 이럴 경우 '노(NO)'하면 그만이지만 뒤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찜찜해지지. 그래서 넌즈시 이렇게 말하지. "실무자만 오케이(OK) 하면 보증서 떼어준다"고.
한편 거절을 당한 쪽에서는 딴 생각을 해. 내 압력 가지고는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더 큰 빽을 물색해.
당시 D의원은 같이 국제회의에 참석중인 청와대 K경제수석을 그 표적으로 삼았어. 이리하여 청와대 수석은 현지에서 전화통을 잡고 서울에 전화를 걸어. "야, 그거 웬만하면 해 줘라"하고 압력을 넣었어. 사태가 이 지경 되면 이사장 모가지 쓰다듬게 되고 실무자는 좌천의 공포에 떨게 돼. 먹이사슬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야. 크고 작은 특혜와 부패의 틀은 이렇게 단순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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