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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너서클' 2부 <10>-'폭력성의 권위'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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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너서클' 2부 <10>-'폭력성의 권위' 김영삼

정주영, 미 대사의 넥타이 선물 받고 YS와 격돌

보스로서 YS가 갖춘 덕목을 말하라면 그 특유의 친화력이야. 그러나 그건 필요조건일 뿐이지. 오히려 한번 물면 놓지 않고 끝까지 손을 보고야 마는 '폭력성'이 권위를 만들어낸 절대적 조건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 노통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었지만 정주영씨와의 사이가 그랬어.

대통령 입후보자라는 라이벌 관계에 있었지만, YS와 정씨는 '정서적'으로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 선거가 끝나면 그런 좋은 관계가 복원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어.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정씨가 "내가 당선되지 않길 잘했다"면서 YS의 대통령 당선을 극구 환영하는 말을 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라고 현대그룹 수뇌부들은 생각했지.

그러나 사태 전개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났다. 대통령 YS는 재벌에 대한 중립적 입장은커녕 완전히 적대적 감정을 표출했다. "현대도, 정주영도 안 된다" 이거야.

당시 산업은행에는 산업지원 자금이 많이 남아돌고 있었지. 재벌들의 기업신용이 흔들리고 있어 융자창구가 극히 보수적으로 운용된 거야. 돈 꾸어줄 마땅한 기업이 없어 은행이 거꾸로 대출 세일을 할 정도였어. 거기다가 현대 몫으로 할당되어 있던 7천억~8천억 원의 자금이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 자금 과잉 상태지.

문제는 바로 YS의 눈치야. 이미 "현대와 정모는 눈밖에 났다"는 소문이 무성했거든. 이런 상황은 은행 실무진들에게 상당한 당혹감을 안겨주었어. 그 때까지만 해도 현대는 신용 1급이었기 때문에 융자 1순위 기업의 위치에 있었고 현대와의 거래관계로 빚어지는 외환 등 파생수익원이 짭짤한 수익원이었거든. 쉽게 말해 장사가 되는 기업이란 말야.

그리고 은행 거액 대출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어. 산업은행의 대출 창구에 파란 불이 올라야 다른 상업은행들도 해당기업에 돈을 풀어주는 게 관행이었어. 그러니 그들로 보아서는 현대가 '막힌 병목'인 셈이지. 이형구 산은 총재는 이런 정황에 대한 실무진의 건의를 듣고 기회를 보았지.

YS의 감정이 상당히 누그러졌다는 첩보를 듣고 청와대로 들어갔어. 총재 도장 하나 꽉 찍으면 나가게 되어 있는 돈이지만 문민시대라도 대통령의 '고-사인'이 있어야 하니까. "현대에 풀겠습니다"고 이형구가 말하자 대통령의 표정이 변했어. 예의 그 눈썹이 아래로 쳐지면서 한 마디로 잘랐어. "씰데 없이 ..." 하면서 고개를 외로 꼬았지. 이형구는 아뭇 소리 못하고 은행에 돌아왔고 은행 실무자들도 그 후 입을 다물어 버렸고 현대 쪽에는 어떤 우호적인 신호도 보내지 않게 되었어.

결과론에서 본 것인지는 몰라도 현대 그룹이 멍들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어. 그룹과 더불어 정 회장에게는 '정치적 금족령'이 내려 그의 왕성했던 스태미너는 하루가 다르게 약화되었거든.

출중한 친화력을 갖추었다는 YS가 어째서 '정 회장 죽이기'를 했을까. 그건 상당한 미스테리였어. 패배했으면 몰라도 자신이 승리했고 정서적으로는 가까웠던 사이였는데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냐. 적대적 관계였더라도 싸 감아야 할 판인데 말야. 이런저런 상식적인 추리들이 있었지만 설득력이 없어.

정 회장의 최측근 중 한 사람에게서 그 비밀을 들었어. 이런 얘기야. YS와 정 회장은 유력한 대통령 입후보로 이런 묵계를 했어. 대세를 타는 한 쪽으로 표를 몰아주자는 것이지. 더 구체적으로는 선거 종반에 이르러 우열이 판명날 즈음 정 회장이 유세단상에서 YS의 손을 들어주는 선언을 하겠다는 '굳은 맹세'였지.

그의 솔직성으로 보아 정 회장의 이 시나리오는 실현성이 높았었지. YS 비장의 카드는 바로 이 시나리오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 사실 정 회장의 출마는 상당히 계산적인 일면이 있었거든. 선거하면 재벌은 돈 뜯기게 되어 있어. 차라리 내가 입후보하면 돈 달라는 소리 못할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사퇴하면서 무더기로 표 안겨주면 당선 된 후 현대그룹의 입지는 더 강해질 수밖에. 뭐 이런 식으로 단순 명쾌했지. 주변에서는 정말 대통령이 되려고 나섰다는 해석이었지만 진실은 '정주영식 사이버 게임'이라 할 수 있어.

그런데 데이타 입력 과정에서 변수가 일어났어. 바로 미국 대사와의 만찬이야. 주한 미국대사 XXXX는 여러 가지 격려의 말을 해 주고 정 회장이 떠날 때 넥타이를 하나 선물했어. 한국 정가에는 다음 대통령이 될 인물에게 미 대사가 이런 식으로 암시의 선물을 전달한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있었어. 그러니 얼마나 정 회장이 고무되었겠어. 더욱이 그 배경에는 워싱턴의 여론 수집 정보가 바탕이 되고 있다는 소리이니 이건 보통의 이벤트가 아니지.

정 회장은 행동파, 곧 워싱턴으로 날아갔지. 그리고 근소한 차이지만 현재 정 후보가 박빙의 리드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했지. '이게 중도에 그칠 게임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한 정 후보는 예의 '돌관 작업' 명령을 현대건설 군단에 내렸어. YS의 시나리오는 날아가 버렸지. 이제 YS의 최대 정적은 DJ가 아니라 정주영 회장이 되어버렸어. 실제로도 정 후보 캠프의 '부산 초원복집 사건' 폭로 등으로 핀치에 몰리기도 했지만 정씨가 내 준다던 수백만 표가 안 돌아오니 피가 말라 들었으리라 짐작이 갈 만해.

'현대-정주영 금족령'은 한참 지난 후에 풀긴 풀렸다고 해. 그걸 푼 것은 '경복 라인'이야. 당시 실세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가운데 이원종 정무수석, 김덕룡 의원 등이 경복고교 출신이었고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도 경복이야. 몽구씨가 '현대 해금' 로비에 나선 것은 같은 경복 출신이라는 데 있었어. 단순하지.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전혀 새로운 권력 집단이 등장했기 때문이야.

박-전-노의 로비에서는 어느 정도 연결고리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거든. 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했던 인물 중의 하나였던 산은 출신의 박용찬씨는 이런 말을 했어. "재벌의 흥망성쇠는 정권이 바뀔 때 어떻게 말을 잘 갈아 타느냐에 있다"고 했어.

시장경제다 개방이다 하지만 경제는 정치를 죽일 수 없어도 정치권력은 기업을 죽일 수 있다는 '어둠의 법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봐. 아마 재벌 기업들은 대선을 앞두고 정치자금 낼까 말까가 아니라 주긴 주어냐 하는 데 어떻게 줄 것이냐 하는 게 고민거리일 거야. <김영삼 대통령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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