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전 한푼도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보통사람의 대통령'은 선언을 했지.
돈하고는 먼 대통령이 되겠다니 재계가 얼마나 좋아했겠어. '이제야 정치가 바로 서는구나' 하고 순진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척은 했지. 손해 날 것도 없고 워낙 정치자금으로 해서 시달려 왔으니까. 그래서 진짜로 돈 싸들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짓이 줄어들었어.
문제가 생겼어. 청와대에 가뭄현상이 일어난 거야. 일시적인 게 아니라 돌아가는 기미가 좀 이상해졌어. 진짜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거지만.
그러던 89년 12월 어느 날 모 유력신문의 1면 톱으로 <14개 재벌기업에 강력한 세무조사> 제하의 기사가 등장했어. 우리 사회야 반(反)재벌의 정서가 있으니 "세무당국이 '정의의 칼'을 빼어들었구나" 하고 박수는 안 칠지라도 국세청 편이 돼 .
그러나 그 내막과 진실을 알고 보면 황당하지. 이게 바로 그런 케이스였어. '청와대의 가뭄'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던 거야. 한 푼 두푼도 아니고 크게는 수천억 원의 세금추징이 걸리는 문제니 재벌들은 정치적 해결을 시도할 수밖에 없어.
이 정도 수준이면 국회의원이나 각료의 힘으론 안돼. 청와대가 '직방'이야. 직방의 대가는 물론 돈이지. 대통령은 국세청장을 불러들여 감세나 면세를 고려해 보라고 하는 거지. 그건 형식이고 규모가 이쯤 공개적이고 대대적이면 당측과도 협의하고 적절한 세정 타협안을 청장이 만들어 내도록 지시하지. 지시보다는 묵시적 명령이지.
당시 현대재벌의 경우 2천억 원의 세금이 추징된다는 설이 사전에 새 나갔는데, 이런 세무기밀 사전누설도 실상은 시나리오라는 냄새가 나는 거야. 신문에 흘리는 게 아니라 현대쪽 고위 채널에만 극비로 알려주는 형식인데, 이걸 알았으면 '뛰어'하는 암시지. 가령 1백억 원을 들고 청와대로 들어가 추징 세액을 1천억 원으로 감액 받으면 당해 기업으로는 9백억 원을 건져내는 셈이 돼.
실제로 K회장은 정주영이한테 물어보니까 "2천억 원 맞는다고 하는데 그럼 내가 보기엔 1천억 원이야. 당신 국세청장 하구 친구지? 한 50억 원 가져다주고 (청와대에) 한 5백억 원 정도로 봐 줄 수 없는지 말해 볼 수 없느냐"고 그러더라는군.
기업은 일단 당하면 이렇게 바로 '장사'로 들어가. 50억 원으로 4백5십억 원을 건지는 셈법이야. 이른바 TK(대구·경북)의 울타리를 세력 삼아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노통은 이 협박을 통해 비어가는 청와대 금고를 채울 수가 있었어.
이건 꽤 그럴 듯한 시나리오지. 우선 국세청은 '정의의 칼'을 빼어들었으니 그럴 듯 해. 재벌은 청와대에 '헌금'을 하고 세금 덜 때려 맞으니 혼은 잠깐 났지만 큰 손해를 작은 손해로 만들어 좋고, 대통령은 권력 유지와 추종세력에 대한 지원금을 마련하는 한편, 재벌들에게는 힘을 과시하는 기회까지 제공되니 정말 그럴 듯 하거든.
흔히 언론이 사실과 진실의 낙차를 논하는데, 이게 그 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어. 이너서클에 침투하여 증거를 포착하기는 힘들어도 언론은 탐사보도를 할 수 있지. '세수가 매년 계획치를 초과하고 있는데 왜 거액의 세금을 더 거둬들이는 세정 조치를 취하는가?' 뭐 이런 의문으로부터 출발하면 실체규명에 접근할 수가 있다고 봐.
그게 왜 안될까. 탈세 하면 재벌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고, 물론 그런 원인 제공을 재벌이 해 왔지만 말야. 또 하나는 그런 의문은 언론이 재벌 편에 서 있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자기 도덕적 측면의 알리바이 입증이 어렵게 되거든.
또 국회는 국회대로 재벌을 물고 늘어져야 업적도 크게 부각되고 정치자금도 쏠쏠하게 입금지부에 올라가게 되지. 언론이 제대로 긁으려면 '이 세무조사에 흑막은 없는가. 다음 조사작업은 제대로 하는가. 최종 결론은 정치적으로 수정되고 있지 않는가. 추징과정에 금품 수수의 흑막은 없었는가'를 두고 탐사보도가 확대되어야 마땅하다.
또 유사한 일은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이벤트로 살아남아야 사회가 진화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지.
<노태우 대통령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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