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직후라 서슬이 시퍼렇던 지난 80년 여름 정주영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겸 현대그룹 회장이 ‘자유기업론’을 펼쳐 신군부의 신경을 건드린 적이 있다.
정회장은 즉각 출입기자들과 만나 ‘와전’된 것이라 해명하며 불끄기에 나섰다. 그는 그러나 해명을 하는 와중에 경제의 정치 종속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아울러 노조 및 언론, 학계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정회장이 훗날 대통령선거에까지 출마하는 돌출행동을 했던 것도 이같은 그의 평소소신에 따른 것으로 해석가능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회장의 생각은 지금 시대와 안 맞는 대목이 적잖으나, 개발연대의 그룹총수들이 어떤 패러다임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증언이기에 소개한다. 편집자.
전임회장들과 점심을 하면서 얘기들을 했는데 거기서 지금 항간에서 얘기되는 ‘자유기업에 대한 도전’이란 말 쓴 일이 없어. 사무국(전경련)의 유인물에 약간 비친 것뿐이야.
기자 여러분이 양해해 줘야 해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재계 대표들의 의견이야 얘기했지. 여기(전경련) 나오는 기자들이 기사 들고 들어가니까 편집국에서 과민해 가지고 쓴 거 아니야? 어느 신문 편집국 간부가 전화해 가지구 “뭐가 ‘도전’이냐?”구 묻기까지 했어.
아무래도 정치가 과민해 있는 것 같애. 나는 신문의 만화를 보고서야 ‘아하!’ 하고 정치를 느껴. 만화에서 중앙청이 안 보이면 ‘뭐 좀 있는 게 아니냐’ 하지. 그런데 경제에 관해서는 신문이 7할은 뒤지는 것 같거든.
***기업인들은 선거기간을 싫어한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전체주의라는 건 장기집권을 위한 것인 모양이야. 후르시초프도 아직 살아 있지. 독재자 스탈린 다음에 나와 가지구서두 꽤 오래나 버텨. 티토는 명이 긴 사람이야. 진시황도 죽었는데, 저 고생하는 것 보단 일찍 죽는 게 낳아. 아주 고역일 거야. 그 나라도 그렇고 주위 사람도 그렇고.......
우리 기업가들은 선거 기간을 아주 싫어해. 쓸 때 없는 얘기가 터지곤 하니까 말야. 내년 선거에서 큰 기업들은 모두 중립을 지킬 거야. 이쪽에서 찍고 저 쪽에서도 찍어 부치고...... . “선거자금 공개하자”는 것도 다 거기에 이유가 있거들랑. 쓸 때 없는 오해가 싫어요.
부익부 빈익빈 문제는 소비절약 없는 나라의 소리야. 헌법에 으레 끼어 있는 게 있어. 자유와 향상인데 그 비용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 당최 말이 없어요. 국민의 생활향상을 인권보호에는 모두 돈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그 돈 마련하느냐에 대해서는 말들을 안 해.
후진국에서 헌법이 가장 잘 된 나라가 인도라고 하던데, 제일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야. 헌법에 왜 국민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는지 모르겠어.
모든 사람이 경제가 중요한 건 알고 있는데 기업인을 소홀히 생각하는 풍조가 있어. 지금 경제가 야단났다고 걱정들을 하지. 말들은 많이 해.
이런 얘기 들어봐. 대궐에 바람이 부니까 도승지가 아랫사람보고 “불조심해라”하지. 그러니까 그 사람은 또 그 아랫사람한테 “얘들아 불조심해라”하지. 그런데 그만 대궐에 불이 나고 말았어. 왜 불이 났나. 불조심하라고 소리들만 높였지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지시가 없었던 때문이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왜 현대에 노조가 없느냐’고 하지만 노조가 있는 곳 보다 잘해 주니까. 노조회비 공제해서 얻어 내는 것보다 회사가 알아서 잘 해 주면 되는 거야. 건달들이 노조 한다고 사무실에서 일도 안하고 빈둥빈둥 노는 건 보기 싫어.
학원은 배운 자들의 사회인데 과거에는 뭣들 하고 이 어려운 때에 떠들고만 있는 거지? 교수들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근로자의 힘'으로 말하는 시대**
모든 일은 상식에 따라서 처리하면 돼. 모든 법은 상식에 약간의 힘을 준거야. 헌법이 나빠 인권이 잘 안됐나. 수사기관원이 가자고 하면 법적으로는 안가고 버틸 수 있는데 다 달려들 어간 게 지금까지의 실정이야. 우리 회사의 경우 공원들이 사고내서 붙잡혀 가면 꼭 변호사 보내지. 그러면 변호사는 검사 앞에 가지. 그런데 검사가 “영감님 좀 비켜주십시오”하면 변호사는 거의 자리를 비켜주지. 검사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영업을 못하니까. 변호사가 그런 형편이니 따지고 보면 다 소용없어. 국민이 스스로 자신들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아무튼 변호사란 사람들은 형편없는 놈들이야.
신문사는 공무국이 제일 쎄다지. 기자들이 파업을 해도 책상에 앉은 간부들만으로도 신문을 만들 수 있는데, 공무국이 파업을 하면 꼼짝 못한다지. 이젠 공장 노동자를 다시 보아야 해. 과거에는 기업이 있어야 직장이 있다는 관념이었지만 이제는 근로자들이 잘 해 주어야 국제경쟁력이 생겨. 잘 되는 기업 얘기할 때 사장 훌륭하다고 했으나 이제는 ‘근로자의 힘’으로 얘기하는 때지.
기업주가 잘한다고 해서 트러블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1백중 50은 잘 하지만 나쁜 사람이 꼭 10은 있는 게 세상이라. 국내만 상대하는 기업은 파업을 두려워 할 게 없어. 올려달라면 올려주고 소비자에게 부담시키면 그만이야. 문제는 외국을 상대하는 기업들이야. 상품 인도 날짜를 지켜야 하고, 파업이 생기면 제품이나 공사의 질이 문제가 되거든. 지금 경제계에는 4.19때 당한 사람들이 아직도 일선에 있기 때문에, 정치 시류에 따라 후유증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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