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정상회담 하면 형식적인 덕담이나 나누고 사진이나 같이 찍는 장면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들 정상은 각국에서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들로, 정상회담을 하는 동안에 은연중 '과연 어떤 정도의 인물이냐'를 탐색한다는 게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이 과정에 불필요한 신경전이 벌어져 주위 관계자를 애달케 하기도 하나, 결국은 서로가 '한수'를 배우곤 한다.
박정희 정권시절 문공부장관을 지냈던 김성진씨가 손광식 본지고문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70년대 박통과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수상과의 신경전, 80년대초 전두환 대통령과 리콴유의 정상회담에 얽힌 비사를 털어놓았다. 이들 사이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나, 흥미로운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편집자
권력의 정상 근처에서 지켜보면 정치 '고수’끼리는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
이광요 싱가폴 수상을 만나러 갈 때 당시 박봉환(동자부 장관)이를 전통(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기내에 불러 " 대면에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느냐" 물었다는 얘기지.
“형님,한수 가르쳐 주십시오”하면서 이광요의 성공적인 업적, 예를 들면 서민 주택사업 같은 걸 물어 보라고 했다는 거지.
글쎄, 친화감을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뭐 통역이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을 터이고.
***이광요 앞에서 담배를 꾹 참은 '체인 스모커'전두환**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어.
전통이 이광요 만나러 갈 때 여러 의전 절차는 양측이 그런대로 해결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 담배야. 이광요는 철저한 혐연가(嫌煙家)라 자신의 방은 물론, 외빈 접견실에서도 재떨이를 추방했을 정도라. 그래서 그와 면담이나 회담을 할 때는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의전관례로 되어 있어.
그런데 당시 전통은 거의 체인 스모커(줄담배)라 이 일을 누군가 얘기해야 할 터인데 ‘방울을 달 사람’이 없어. 그 성질에 화를 버럭 낼 수도 있겠고, 오기로 ‘나도 일국의 정상인데 담배 연기 맛 좀 보아라’하고 오기를 부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 그래 누구도 말을 안 하다가 이광요를 만나기 직전에서야 “이광요는 담배를 안 피웁니다”고 귀뜸을 했어.
전통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두세 시간 동안 면담 중에 담배를 찾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더군. 담배 피우는 사람이면 그런 대목에서 무심히 주머니에 손이 가는 법인데 말야. 옆에서 아주 조마조마했었지.
이광요는 그렇지 않아도 대가 센 데다가 영어권 교육 받았지, 국가관리 성공했지, 그러니 자존심도 무척 쎄.
박통때 한국을 방문하러 온 적이 있었어. 사전 의전조율을 하게 되는데 ‘포도주는 뭘로 하고 디저트는 뭘로 하는가’ 이런 식이지.
***박통과 이광요의 신경전**
박통은 박통대로 기를 죽이고 싶은 게 있었던 지라 “포항제철을 꼭 보여주라”고 지시했어. 그런데 그 쪽에서는 “제철소는 어디에 가도 있는 것이고 하니 문화재나 보여 달라”는 거야. 경주 불국사를 보여주자는 안이 나와서 외무부장관 대신 문공장관인 내가 안내를 하게 됐어. 코스를 잡는데 박통의 지시도 있고 해서 경호실에서 이광요가 탄 리무진이 포철을 통과하도록 코스를 잡았지. 천천히 그 지역을 통과하도록 만들어 ‘야코’를 죽이려는 의도였지.
이광요는 그걸 알았는지 공장 굴뚝이 장엄하게 도열한 좌우를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있는 거라. 경호실은 야단났다 싶었던지 “그가 귀국할 때 울산에서 비행기를 띄워 포철을 강제로라도 볼 수밖에 없게 만들자“는 안을 내 놓았어. 그러나 이건 의전상 망발이라 채택이 안되었어.
돌아올 때는 대구 길을 택했지. 농촌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지. 이광요는 여기서 감명을 받은 것 같았어.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등 표정에서도 큰 변화가 엿보였어.
싱가폴 대사를 지낸 연고도 있어 그의 귀국 길에 동행을 했는데 한창 앞을 내다보고 뭘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던 이광요가 “한국이 이렇게 빨리 발전한 원동력이 뭐냐?”고 묻더군.
그래 “그건 교육이다. 수많은 미국 유학파 학자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KDI(한국개발연구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에서 조국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자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게 누구 아이디어냐” 해. “물론 그건 박정희 대통령이다” 했지. 박통이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공은 위로 돌려야지.
귀국 후 이광요는 영국과 프랑스 쪽에 나가 있던 유학파들을 불러들이는 유인책을 강화했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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