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은행업 참여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은행 민영화' 논의가 최근 다시 급부상하고 있다. 21일 한국개발연구원(KDI)같은 국책연구기관조차 재벌의 은행소유를 막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할 정도이다. 그러나 학계등에서는 아직도 '재벌의 사금고화' 가능성을 우려해 민영화를 극구 반대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전에도 같은 논란이 있었다. 82년 장영자사건이 터진 직후의 일이다. 당시는 재벌의 사금고화 우려로 불가(不可) 결론이 났다. 그 무렵 손광식 본지고문은 장영자 사건의 와중에 말려들어가 고초를 치루고 있던 공영토건의 우재구 사장과 만나 '우리나라 은행'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은행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사장의 지적은 상당부분 유의미한 게 유감스런 현실이다. 편집자
은행은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언론에서는 ‘사금고화’ 어쩌구 하지만, 그거 웃기는 소립니다. 주인 없는 어정쩡한 상태라야 은행에서 돈 빼먹기가 더 수월하니까요. 왜냐고요? 은행 망해도 대기업은 손해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기업들이 그 은행 주식들을 갖고 있습니다. 민영화 되면 대기업 주식 갖고 있는 대기업의 사활과 직결됩니다. 지금처럼 방만하게 운영되지 않을 겁니다.
주인이 들어서면 오전 9시30분에 어슬렁거리고 나와서 6시 ‘땡’ 하면 퇴근하는 일 없을 겁니다. 9시30분이면 민간기업은 벌써 회의, 지시 끝내고 행동에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은행임원들의 관심사는 자리보전과 외기권의 변화뿐**
왜 은행이 중요한가 하면 정책의 산실이자, 아이디어의 집결지요, 정보센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행 행장, 중역 몽땅 모럴(도덕)이 없어요. 갈아 치워야 합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뭘 했습니까.
아마 두 가지 생각들만 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는 자리보전과 출세, 다른 하나는 외기권의 변화에 대한 예민한 감각 기르기입니다. 그러구서 무슨 상업은행의 중역이라 할 수 있겠어요. 그저 임기동안 자리를 잘 보전하다가 다시 때가 되면 중임할 수 있는 길을 찾기에 바쁠 테지요. 전체 경제를 보는 안목, 해외경제에 민감한 반응, 창의적인 기법, 이런 걸 항시 생각하는 금융인들이 새 의자에 앉아야 합니다.
요즘 은행 지점 개설하는 데서 중역들이 나와서 축사하는 걸 보면 정말 웃깁니다. 도대체 비전과 철학이 없어요. 출발부터가 모럴 상실입니다.
작년 이맘 때 쯤 공영토건은 장영자 여인에게 말려들어가기 시작할 때입니다. 청와대 쪽에서는 몰랐고 안기부 쪽에서 8월부터 추적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건 터지고 나서 청와대 보좌관들이 사표내고 “각하, 면목 없습니다”했다더군요.
아무튼 공영문제로 지금 다섯 사람의 회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거래 상업은행, 재무부, 법원, 청와대, 검찰이 몽땅 우리 회장들입니다.
이리 저리 불려 다니다 느끼는 건데 우리나라 법은 상충되는 게 엄청나게 많다는 걸 보고 놀라게 됩니다. 예컨대 국세체납하면 건설회사는 국내 수주 못하게 되어있는 반면, 법원은 법정관리 절차상 국세 못 내게 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디서 해결하는가. 재무부 세제국입니다.
그러나 재무부가 언젠가 유권해석 내렸다가 감사원으로부터 기업 봐준다고 혼쭐이 난 후로는 정당한 유권해석도 회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은행에 배짱 있고 창조적 인물 안키워 놓는 것, 나중에 큰일 몰아올 겁니다"**
신문에 기업이 오르내리면 보통 아픈 게 아닙니다. 사우디 같은 곳에는 곧바로 우리나라 국내소식이 들어갑니다. 소문이나 신문보도는 그날로 공사현장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기사에 아주 민감해서 현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웃어요.
사우디정부는 장여인 사건이 터지자 기성고 대금 동결하고 송출 인력도 지금 상태에서 중지하라고 요구하고 나옵니다. 현장에 사장이 가면 기능공들은 왜 출국 안 시키느냐고 아우성이고……. 게다가 주한 사우디 대사는 보통 콧대가 세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지 관료와 합의해도 이쪽 대사가 보고서를 틀어버리면 그만입니다. 대사의 삼촌이자 장인이 사우디왕의 비서실장이라서 힘이 세다는 얘깁니다.
현지 협상에서도 물먹기 일쑵니다. 만나자고 약속하고 바람 놓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번은 그쪽 호텔에서 회식 약속하고 11명의 관계자가 기다리다 몽땅 물 먹은 적도 있습니다. 양측 합의안을 싸인 하자고 한 날, 같은 시간에 재무성 장관은 유럽으로 날아가 버려 황잡는 때도 있었지요. 나중에 유감 표시하니까 “배탈이 나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하면서 다음날 만나주는 것도 큰 대우 해 준 걸로 생색까지 냅니다. 사우디는 해외에 58억 달러 지원하고는 간이 부어가지고 한국에 대해서는 대부 노릇까지 할려고 합니다.
저 혹시 도이치 뱅크의 아베 총재를 아십니까. 그 사람 종신 총재했습니다. 그래야 비전도 나오고 철학도 나와요. 금융기관에 배짱 있고 창조적인 인물 안 키워 놓는 것, 이것 나중에 큰일 몰아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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