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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자 취재파일 - 한국의 이너서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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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기자 취재파일 - 한국의 이너서클 <4>

박흥주 대령의 최후

오늘이 마침 10.26이다.
이 기록은 현역군인으로는 유일하게 10.26사태에 연루돼 80년 3월6일 총살당한 고 박흥주(朴興柱) 육군대령의 고등학교 동기인 정윤표 정치과 원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녹취한 것이다.
서울고 10회 동창회장을 맡았던 정 원장은 박흥주대령에 대한 총살형 집행후 동기생들과 함께 국군통합병원 영안실을 찾아가 그의 빈소를 지켰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손광식 본지고문 역시 서울고 10회로 박 대령과 동기생이다. 편집자

김재규 재판에서 유일하게 사면 안 된 사람이 박흥주 대령이야. 군인이기 때문에 사면이 안 된다는 거야. 요전 딸 결혼식에 가 보았더니, 부인은 2남1녀를 아주 훌륭하게 잘 키웠더군. 그 집의 비원은 ‘상명하복’ 명령에 살고 죽었을 뿐인 아버지의 죽음을 ‘대역죄인’의 명부로부터 빼달라는 것이지.

최용길이와 박흥주는 참 비극적인 해후를 했지. 동창생 중 하나는 국방부 출입기자(최용길), 또 하나는 이제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국사범(박흥주).
두 사람이 광주 총살 집행장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은 기막힌 우연이야.
용길이는 뒤에 얘기했지만 자신은 그 현장을 어떻게든 피하게 되기를 희망했어. 그런데 국방부 기자들이 입회기자를 선정하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했어. 입회기자는 단 한 사람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용길이가 뽑혔어.

<사진1> 박흥주와 김재규

***총살집행장에서 마주친 비운의 동기동창**

우리끼리는 다 아는 얘기지만 박흥주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실장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때 현장 지휘자의 한 사람이었고, 용길이는 경향신문 국방부 출입기자였는데 전두환 소장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지. 그러니까 크게 보면 적대적 두 진영에서 극한상황이 연출되는 현장의 끝자락에 두 사람이 서 있게 된 형국이라.

나중에 용길이는 눈이 충혈되어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얘기했어.
박흥주는 총살집행 사병이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려 하자 호통을 쳐 물리치고는 정말 아무런 빛깔도 감정도 없는 눈길로 현장에 입회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훑어보더라는 거야. 용길이의 얼굴에 시선이 스칠 때 ‘아, 네가 거기 서 있구나’하는 눈짓이 있을 법도 한데,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더라는 얘기야.

흥주의 시체가 국군통합병원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황남규(황순원씨 2남)가 빈소를 지키러 가자고 동창들 앞장을 섰어. 현역군인이었던 윤덕중이도 따라 나섰어. 우리들은 모두 말렸지. 현역 군인이 빈소에 가면 지금 상황으로 어떻게 몰릴지 모르니 자제하는 게 좋다는 의견들이었지. 그래도 덕중이는 막무가내로 가겠다는 거야. “야, 내가 가는 건 육군 중령 윤덕중이가 가는 게 아니고, 같은 교정에서 6년동안 같이 뛰놀던 동기동창으로 가려는 거다!”하고 굽히질 않아. 그래도 친구들이 결사적으로 덕중이를 떼어 놓고 갔어.

***박대령의 빈소를 지켰던 ‘진정한 동창들’**

빈소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빈소를 지키던 책임장교는 대뜸 “현역군인 있으면 나오시오”하는 게 아니겠어. 그때 병원에 간 동창 중에는 이재후, 박철우등 두 변호사가 있었지만, 대부분 흥주와 가까웠던 사람이지 뭐 이름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지.
전부 소박한 친구들이었어. 또 당시 상황으로는 ‘소박한 인간의 정’ 외에 용기가 필요했어.
지금도 나는 ‘그날 모였던 친구들이야말로 진정한 동창들이야’ 하는 생각이야.

그 중에서도 황남규의 모습은 당당하고 용기가 있어 인상적이었지. 처음에 빈소로 들어가려 하자 군인들이 길을 막아. 그러자 남규가 앞으로 나서서 “당신들 죽은 동창생 빈소에 들어가는 것도 막으려 하면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고 호통을 치고 대들었어.

한창 옥신각신하다가 그 쪽 책임자인 장교가 그럼 빈소에 조의만 표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하자고 타협하고 들어왔어. 남규는 안 된다고 버텼어. 이쪽이 하도 완강하니까 조객 리스트를 내 달라고 해. 그래서 써 주었지. ‘위’에 보고를 했더니 10명씩 떼를 지어 대역죄인의 빈소에서 밤을 샌다는 건 절대 불가라고 했는지 그냥 돌아들 가라는 거야.

남규가 또 나섰어. “마지막 가는 사람이다. 죽은 자가 죄인일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한 인간으로 이승을 떠나는 사람과 동문수학 했다는 이승의 인연으로 해서 밤새 그의 영혼을 지켜주려는 것뿐이다”라고 설득했어.

그쪽에서 다시 타협안이 나왔어. 5명만 남아달라는 거야. 그래서 병원을 하던 나(정윤표 치과병원)와 다음날 업무가 있는 이재후, 박철우 두 변호사 등 몇 사람이 빠지기로 했어.

<사진2> 재판장의 박흥주

***책임장교, “평소 박흥주 같은 선배를 존경했다” 토로**

중위 계급장을 단 책임장교는 자신은 병원지역 담당이라고 하면서 어떤 인간적인 감동을 느꼈던지 “나중에 문제가 되는 일이 있으면 나 자신도 책임을 질 각오가 돼 있다”면서 자리를 같이 했어. 그러면서 자기는 “평소 박흥주 같은 선배를 존경했다”면서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자기는 다시 군인이 되겠노라고 했어.

육군사관학교(18기) 동창들이 그를 한 인간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어떻게들 해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의 가족에 대한 정신적 지원이나 위로를 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어.
얼마 전 조선일보에 있는 이학종이가 박흥주 무덤에 꽃 한 다발 뿌리고 돌아갔어. 고등학교 동창이자 육사동기로는 유일했던 거 아닌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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